여기저기서 브람스 음악의 선율이 자주 들리는 것을 보니 가을이 오나보다. 주말에 내린다던 비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종일 서성이고 있었는데 밤이 깊어서야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어보니 땅내음이 축축한 대기에 묻어 방 안으로 훅 밀려든다. 주변이 온통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인 곳인데도. 

'그 여름의 끝'에 서 있는 나..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김훈)고 하더라도 이젠 가을로, 겨울로 절실하게 발을 내딛뎌야 할 때이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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