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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평점 :
매일 일어나 은총이 우유를 데워 먹이고 허겁지겁 아침을 때우며 응가하는 은총이, 짜증내는 은총이, 기저귀 안 갈겠다고 도망다니는 은총이, 내 다리에 달라붙는 은총이, 현관에 나가 신발부터 만지작거리는 은총이 등 버라이어티한 딸내미의 상황에 대처하느라 초겨울에 접어드는 이 시점에 매일 땀을 한바가지씩 흘리며 출근준비와 등원준비를 하고 거의 매일 지각을 눈앞에 두고 단지내 아스팔트길을 유모차와 함께 전력질주하는 나. 겨우 애를 어린이집에 두고 나와 이미 퇴근길의 체력과 정신상태로 출근하여 일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다시 커피를 들이키며 퇴근하여 폭탄맞은 집 정리를 어차피 30분 뒤에 난장판이 될 걸 알면서 의미없이 하고 은총이 하원을 시켜 온갖 진상과 저지레의 한복판에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온몸에 밥풀과 침이 묻어가며 저녁을 먹이고 퇴근한 남편과 함께 설겆이를 하고 애를 씻기고 우유를 먹이고 재우고 나머지 정리를 하고 다음날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기고 빨래를 하고.
매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듯 이 쳇바퀴를 돌고 도는 나의 일상에는 이런 책이 필요했다. 지극히 비일상적인 책. 이런 책이 너무 읽고싶었다. 분단위로 짜여진 나의 삶을 잊고 여백이 가득한 삶을 읽어보고 싶었다.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언제나 여름인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사는 삶은 과연 어떨까?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저녁을 준비하고, 모닥불 옆에 누워 별을 보는, 여름휴가와 같은 삶이 일상이 된다. 그러나 시장도 극장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이스 라테를 파는 카페도 없는 것 역시 일상이 된다. 단조로운 생활과 고립감 역시 익숙해져야 한다.
p.118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p.164
요즘 나는 매일같이 해 질 때를 기다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러 하늘이 물든 날에는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엄마는 그것도 고맙다고 하고, 나는 미안해지고 만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공짜라서, 정말 다행이다.
p.216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엄마를 보고 자라는 아이가 어찌 불행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p.260
내일의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어제오늘과 똑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계속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지루함이 축복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뭐 그렇다고 별 수 있나.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지루함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늘이 언젠가 우리만 아는 농담이 될 날을 기다리며.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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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퇴 후 지친 눈과 조금은 속상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읽기 시작한 책의 나머지. 무심히 쓴 문장들 하나하나에 왜 그런지 울컥 눈물도 났고 때로는 위로도 받았다. 좀 더 여운을 즐겨보고 싶지만 아기 빨래가 다 되었다는 알람이 울린지 20분이 지났다. 피곤함으로 점철된 오늘도, 은총이의 쿠키처럼 앙증맞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니 또 힘을 내어 보기로 한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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