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특별한 우울 - 우울증에 걸린 정신과 의사의 치료 일기
린다 개스크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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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교 4학년 정신과 실습은 기대했었던 만큼 남달랐다. 폐쇄병동에서는 조울증 환자의 타겟이 되어 일주일 내내 병동에서 그에게 휘둘리다가(알고보니 원래 이 환자는 "한놈만 찍는다"는 특징이 있는데 하필 그 실습조에서는 대상이 나였다) 실습 마지막 날에는 결국 acting out의 대상이 되어 내 손가락이 부러질뻔 했고,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아직 증상이 있는 환자의 망상의 대상이 되어 청혼을 받았다. 내가 받은 첫 프로포즈는 무려 "당신과 내가 결혼해서 낳는 아이가 이 시대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될 것입니다" 였다.


그로부터 2년 뒤, 내 지인이 갑작스런 상실을 겪고 공황장애 증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허구헌날 차트에 emotional support was done이라 적으면서도 실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그에게 도움이 될 지 몰라 답답했던 나는 일단 내가 아는 정신과의사에게 상담을 부탁했다. 미국에 거주하다 잠시 한국에 들어왔던 의사는 내 지인을 만나 상담을 하고 증상을 완화시켜줄 만한 약을 추천했다. 한국을 떠나며 연결시켜준 다른 의사와도 상담했다. 실제로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의사가 성의없는 태도로 일관했다며 더이상의 진료나 약복용을 거부했고, 계속 재발하는 증상과 싸우며 일상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의 가족들도 상실로 인해 각자 무력감과 우울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원래 심리학이나 정신과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가벼운 흥미에 불과했음을 그 시절에 깨닫고 반성했다. 책이나 영화에서 다루는 질환은 흥미로웠으나, 실제로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경험하는 이를 옆에서 지켜보니 나는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의사가 아님에도, 그냥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조차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앞서 대학교 4학년 시절 조울증 환자의 acting out이나 망상환자의 프로포즈 역시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그리고 그로부터 또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나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낳은 직후에 오기 쉽다는 산후우울증에 대해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음에도 그건 그냥 단순히 호르몬의 문제겠거니 생각했다. 오히려 내게 우울감은 훨씬 뒤에 찾아왔다. 출산 직후 엉망이 된 컨디션이나 호르몬으로 인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경험한 우울감과 무력감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나의 상황으로 인해서였다.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 없이 워킹맘으로 일과 육아와 집안일(거의 못하지만)을 병행하며 허덕이며 산 지 1년이 조금 넘자 그런 상태가 되었다. 제대로 된 우울증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주 경미한 것이었지만 "우울증"에 대해 그저 관찰자의 입장에서 지켜보기만 했었던 나로서는 조금 충격적이었다. 나도 우울감을 경험할 수 있구나. 이런 감정은 내가 마음먹는다고 바로 벗어날 수 있는게 아니구나. 상황이 그럴수가 없구나.


우울증에 걸린 정신과 의사의 치료 일기, <당신의 특별한 우울>은 그래서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울증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가 우울증 환자라고?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치료를 받아?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임상에는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럴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의료인도 사람이니까. 아플 수 있다. 특히나 쏟아내는 환자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내야하는 직업은 더욱더.


p.18

정신과 의사도 우울증을 겪는다. 다른 과 의사보다 더 많이 겪는다. 우울증 전문가라고 해서 우울증에 안 걸린다는 법은 없다.


p.146

진정한 신뢰와 관심이란 거짓으로 흉내낼 수도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심리치료에서건 인생에서건 마찬가지다.


이 책은 린다 개스크라는 정신과 의사의 우울증 극복에 대한 이야기면서 동시에 상실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상실, 상처, 외로움, 강박, 정신병원, 전이,애도 등의 소주제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우울증과 자신이 상담했던 환자들의 사례를 적절히 섞어 이야기한다. 전문치료 분야가 우울증인 정신과 의사가 자신도 경험하고 버텨낸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우울증에 대해 그저 학습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인 치료자의 권면보다 훨씬 설득력을 가진다. 의사이면서 환자이고 학자인 그녀의 솔직하고 용감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우울증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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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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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4-5개의 서평단을 한꺼번에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날정도로 책 한권 못 읽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에는 매일같이 아이 어린이집 등원 전쟁을 치루고 허겁지겁 지각 일보직전에 회사로 뛰어들어가면 수시로 그날 처리한 일을 카운트해대는 바람에 스트레스 만땅으로 받으며 오후 4시까지 업무. 4시에서 맘편히 5-10분 초과근무를 할 수도 없는 것은 대부분이 전업맘인 이동네 특성상 오후 4시반에 우리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면 혼자 남아 문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원 후 집에 안들어가려는 애와 사투를 벌이며 두시간 동안 털리고 집에 들어오면 저녁 먹이기 전쟁, 그 다음은 목욕전쟁, 그 다음은 안자려는 애와 침대에 들어가 목이 쉬도록 그림책읽어주기 전쟁...그러다보면 나는 어느새 정신줄을 놓고 꼬부려 졸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기고 키즈노트를 쓰고 씻으면 책 읽을 시간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


책 읽고 싶다. 여유롭게 책 읽고 싶다. 지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더 읽고 싶다. 눈앞에 쌓여있는 책더미도 해결 못하고 옆으로 밀어놓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윌북 서포터즈는 너무 하고싶었다. 그래서 서포터즈 4기에 선정되었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정말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아쉽게도 내 주변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게다가 첫 책으로 이 책이 배송된다는 소식은 그동안 쌓였던 육아와 업무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날려주었다. 세상의 모든 책 덕후를 위한 카툰 에세이, <책 좀 빌려줄래?>라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카툰들이 100여 페이지 가량 펼쳐진다. 책 읽기 좋은 장소, 책갈피, 연체되는 도서관 대출자료, 독서를 방해하는 것들, 못다 읽은 책에 바치는 송가 등..부담없이 한 장 한 장 넘기며 킬킬거리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이다. 책을 주제로 한 카툰 중 내가 좋아하는 요시타케 신스케의 <있으려나 서점>에 이어 독서가들에겐 또 하나의 소장 가치 충분한 책덕후 카툰이 탄생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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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미움들 - 김사월 산문집
김사월 지음 / 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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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8

그 사람 영원히 내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을 처음 알았던 나이를 나는 넘고 그 사람은 더 무섭고 높은 나이를 넘는다. 우리는 이어지지 않음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p.190

학생일 때의 감각이 떠오른다. 4월에는 중간고사, 7월에는 기말고사. 여름에는 방학을 보내고 가을엔 축제를 한다. 교과서의 진도가 모두 나가고 한 학년이 끝나갈 즈음이면 학급 TV로 영화를 보고 입김이 나는 겨울에 다음 학년의 반 배정 발표가 난다. 어른이 되어 이 감각을 흐릿하게 기억하며 나는 계절을 즐겁게 보내기도 시간을 너무 빨리 쓰기도 했다. 더 이상 누가 정해주지 않는 인생을 홀로 노를 저어 사랑하는 곳과 미워하는 곳들을 디뎠구나. 마스크와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는다.


p.205

강하게 쥐면 손에 무엇도 남지 않는 모래를 가지려면 가볍게 손을 오므려 넘치지 않게 찰랑찰랑하게 담기. 나의 몫만큼 가지며 오래될 수 있는 내가 되기를 희망하기로 했다.


김사월이 누군지 몰랐다. 한때 늘 이어폰을 끼고 클래식이든 재즈든 가요든 인디음악이든 들으며 살았던 나는 이제 매일같이 상어가족이나 뽀로로, 티라노사우르스나 출동이다를 은총이에게 불러주는 엄마가 되었다. 눈뜨면 아이등원준비와 허겁지겁 출근, 허겁지겁 퇴근하여 집안 정리를 하고 아이 하원을 하고 나면 다시 애가 잠들때까지 헬게이트 오픈인 하루하루에 제대로 음악을 들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내 방 가득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던 적이, 분명히 예전에 있긴 있었는데.


내 병원 진료를 위해 휴가를 낸 날이었다. 두군데 병원을 가고 짬을 내어 만나고픈 사람에게 연락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은행 업무를 보고 청소를 하고 애 하원을 시키고 저녁을 먹이고..분명 휴가를 받았지만 출근한 것보다 더 지치는 하루였다.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인 표지를 한 책을 펼쳐 읽는 내내 나의 20대와 30대가 스쳐지나갔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사람에게 많이 의지한 만큼 상처도 많이 받았으며 어떻게든 무엇에 대한 답을 얻고자 몸부림치고 시행착오에 밤 늦도록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쓰던 날들. 혼자 오롯이 서 보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날들.

책을 다 읽고 그녀가 궁금해졌고 인터넷을 검색해 그녀의 곡 몇개를 들었다. 너무 좋았다. 정말 오랫만에 듣는 이런 음악.

30대의 마지막 12월이 하루 하루 지나가고 있다. 오늘은 내 친구들이 보고싶다. 함께 30대까지 살아오느라 수고한 사랑스러운 내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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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 -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다
금수현.금난새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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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올해부터 회사 내 독서동호회의 총무를 맡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여튼 사내동호회비라는 눈먼돈이 그냥 허공에 뿌려지는 것이 아쉬워 그 돈으로 다같이 읽고 싶은 책이라도 사보자고 나 혼자 애쓰고 있는 상태.

 

다른 동호회는 기껏해야 10명 남짓인데 이놈의 동호회는 아무런 부담없이 분기별로 책을 사 볼 수 있다는 메리트로 너도나도 일단 가입을 하는 바람에 무려 스무명이 넘는다. 은근히 관리도 스트레스 받는다. 내게 어떤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분기별로 각자 책 골라서 구매하시도록 챙겨드려야하고 구매기한 넘기도록 답이 없는 직원들 다시 챙겨서 주문해야 하고 절판된 책 중고서점에서 구해달라는 직원에게 안된다고 말해야하며 발령난 직원들 관리며 지원금 신청서며 결과보고 결재올려야하고.. 책 한권 받자고 내가 이래야하나 싶지만 이미 시작해버린거고 나는 책 한권 받자고 이럴 용의가 있는 사람이기에 어쩔수없이 내 업무시간 할애해가며 동호회 관리중.

 

우리 동호회 회장님이신 실장님이 알고보니 정말 책을 좋아하시는 분인지라 함께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부담도 있었다. 독서모임을 엄청 하고싶어 하셨는데 업무가 많아 독서모임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직원들이 태반이었기에 결국 모임 대신 책을 읽고 쓰신 리뷰를 공유하셨는데(실장님은 내게 글을 보내실뿐이고 직원들에게 공유는 또 내가 알아서 해드린다), 은근히 이 리뷰에 대한 피드백을 매번 원하셨기에...당연히 직접 컨택을 하지 않는 다른 직원들은 소위 "읽씹"이었고 실장님 방을 드나드는 나만 주구장창 실장님의 질문에 시달렸다. 정과장 공유 언제했어? 직원들이 내 글 읽니? 싫어하는건 아닐까? 다들 피드백 좀 해주지 귀찮아서 안하는거니? 부담갖지 말고 안읽어도 된다고 하시면서 매번 이러시면. 그저 웃지요.

 

지휘자 금난새의 아버지 금수현 작곡가가 쓴 글로 대부분이 구성된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을 읽고 있으려니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실장님이 공유해주신 글들이 생각났다. 연배가 비슷해서일까,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드신 분들이 써주시는 글들을 볼때면 뭔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나도 나이를 더 먹어서 쓰는 책 리뷰나 잡문에 그런 분위기를 담게 될까. 먹은 나이 만큼이나 지루해지는 글, 내가 살아본 적도 없는 옛날 옛적 이야기의 향연, 누군가를 은근히 훈계하려 드는 글을 끄적이는 사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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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1
우리가 자식을 기를 때 사랑한다는 것과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은 구별해야 될 줄 안다.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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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4분의 3은 아버지, 뒷부분 4분의 1은 아들이 쓴 글로 구성되어있는 책. 아들이 쓴 글 속에 나오는 아버지는 참 좋은 부모였던 것 같다. 나도 우리 아이한테 좋은 부모로 기억될 수 있을까. 제대로 먹지도 않고 짜증은 오지게 내는 18개월에게 있는대로 화를 내고는 아이가 잠들고 나서야 혼자 골방에서 반성하고 있는 엄마의 소심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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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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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어나 은총이 우유를 데워 먹이고 허겁지겁 아침을 때우며 응가하는 은총이, 짜증내는 은총이, 기저귀 안 갈겠다고 도망다니는 은총이, 내 다리에 달라붙는 은총이, 현관에 나가 신발부터 만지작거리는 은총이 등 버라이어티한 딸내미의 상황에 대처하느라 초겨울에 접어드는 이 시점에 매일 땀을 한바가지씩 흘리며 출근준비와 등원준비를 하고 거의 매일 지각을 눈앞에 두고 단지내 아스팔트길을 유모차와 함께 전력질주하는 나. 겨우 애를 어린이집에 두고 나와 이미 퇴근길의 체력과 정신상태로 출근하여 일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다시 커피를 들이키며 퇴근하여 폭탄맞은 집 정리를 어차피 30분 뒤에 난장판이 될 걸 알면서 의미없이 하고 은총이 하원을 시켜 온갖 진상과 저지레의 한복판에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온몸에 밥풀과 침이 묻어가며 저녁을 먹이고 퇴근한 남편과 함께 설겆이를 하고 애를 씻기고 우유를 먹이고 재우고 나머지 정리를 하고 다음날 어린이집 준비물을 챙기고 빨래를 하고. 


매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듯 이 쳇바퀴를 돌고 도는 나의 일상에는 이런 책이 필요했다. 지극히 비일상적인 책. 이런 책이 너무 읽고싶었다. 분단위로 짜여진 나의 삶을 잊고 여백이 가득한 삶을 읽어보고 싶었다.

프랑스인과 결혼하여 언제나 여름인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사는 삶은 과연 어떨까?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 저녁을 준비하고, 모닥불 옆에 누워 별을 보는, 여름휴가와 같은 삶이 일상이 된다. 그러나 시장도 극장도 서점도 도서관도 아이스 라테를 파는 카페도 없는 것 역시 일상이 된다. 단조로운 생활과 고립감 역시 익숙해져야 한다.


p.118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p.164

요즘 나는 매일같이 해 질 때를 기다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으러 하늘이 물든 날에는 사진을 찍어서 보낸다. 엄마는 그것도 고맙다고 하고, 나는 미안해지고 만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공짜라서, 정말 다행이다.


p.216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엄마를 보고 자라는 아이가 어찌 불행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p.260

내일의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모른다.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어제오늘과 똑같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계속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지루함이 축복이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뭐 그렇다고 별 수 있나. 무너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지루함을 만들 수밖에 없다. 오늘이 언젠가 우리만 아는 농담이 될 날을 기다리며.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_

육퇴 후 지친 눈과 조금은 속상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읽기 시작한 책의 나머지. 무심히 쓴 문장들 하나하나에 왜 그런지 울컥 눈물도 났고 때로는 위로도 받았다. 좀 더 여운을 즐겨보고 싶지만 아기 빨래가 다 되었다는 알람이 울린지 20분이 지났다. 피곤함으로 점철된 오늘도, 은총이의 쿠키처럼 앙증맞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니 또 힘을 내어 보기로 한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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