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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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는 몇 년 전부터 재개발에 들어간 터라 언제나 공사 중이다. 3층, 5층짜리 주공아파트가 나란히 서 있던 자리에는 단지 내에 헬스장과 사우나 등을 구비한 브랜드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20년 넘게 한동네에 살면서 그렇게 높은 건물이 들어오는 것은 처음 봤다. 당장 서울로만 나가도 더 넓고 좋은 신축 아파트 단지가 많지만, 내 눈에는 이 정도도 마천루처럼 보인다.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 각종 편의시설이 줄줄이 늘어나고, 결론적으로는 동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골목이, 야간 자율 학습 도중 몰래 빠져나와 걷곤 했던 벚꽃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 한쪽이 허하다. 허물어져 가는 철제 울타리 틈에, 비스듬히 삐져나온 보도블록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던 주민들의 생활이 지워지는 것 같아 괜히 섭섭하기도 했다.

사라져가는 예전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청년 네트워크에서는 재개발 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사진집을 판매해 얻은 수익은 노인복지회관에 기부했다. 전시는 성황리에 마무리됐고, 사진집도 전시 첫날 매진되었다. 그 와중에도 아파트는 점점 높이 올라갔고, 시청 앞에서는 부당 해고 철회를 위한 농성이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그 모든 광경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다는 것』은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공전의 히트를 친 김중미 작가가 약 20년 만에 발표한 신작 장편 소설로,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이슈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민, 여성 차별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면밀히 다뤄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이후에는 진한 여운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 '할머니-엄마-딸' 삼 대에 걸친 '은강'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부당 해고에 대한 투쟁을 몇십 년째 이어가고 있는 은강방직의 노동자들,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는 빈부 격차, 주민들과 일체의 상의 없이 결정된 동네 개발 사업, 여전히 그곳에서 살며 꿈을 키워나가는 청년들까지. 우리 사회의 면면을 아주 가까이에서 다룬 이 작품은 마치 잘 만들어진 르포르타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인 지우, 강이, 여울이 뿐만 아니라 은강방직의 해고 노동자인 옥자, 불법 다단계 때문에 거액을 사기당한 은혜, 자퇴 후 배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수찬 등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실제로 우리 가까이에 사는 이웃의 모습을 닮았다. 그동안 성공과 개발에 집중하느라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우리 사회의 소시민들은 작가의 이야기 안에서 누구보다 활짝 피어난다. '은강'에 사는 이들은 '쪽방 체험관'의 운영을 막기 위해 발로 뛰며 설문지를 돌리거나 인터넷 신문에 기사를 올리기도 하고, 다 함께 광화문 광장으로 가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김여울, 너 그거 알아? 별은 정면으로 볼 때보다 곁눈질로 볼 때 더 반짝인다. 이렇게 별 하나를 골라서 똑바로 보다가 곁눈질을 해 봐. 그럼 별이 정면으로 볼 때보다 더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여. 한번 해 봐.” ─ p.241


『곁에 있다는 것』에 담긴 이야기가 더 묵직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소설이 우리 사회가 가진 어두운 단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별은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밝게 빛난다. 곁눈질로 볼 때야 더 환히 빛나는 별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 가장 변두리에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독자의 다짐에 불을 지펴준다.


* 해당 글은 창비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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