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귀야행 욜로욜로 시리즈
송경아 지음 / 사계절 / 202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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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이 겹쳐 수많은 글자에 둘러싸여 피로한 나날을 보내다 보니 어떤 글을 봐도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겠거니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불과 몇 주 전일 뿐인데도 글 읽는 것을 좋아하던 것이 아주 오래 전의 일 같았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든 즐겁게 읽고 싶었다. 책을 읽는 동안 완전한 몰입 상태가 되어, 등장인물과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그런 재밌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너무 무겁지도,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그때 내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송경아 작가의 『백귀야행』은 분명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 서평의 제목은 책 뒤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서 빌려온 문장이다. 이번 소설집은 작가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쓰거나 발표한 글을 엮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200쪽이 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20년도 더 된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 개의 단편은 각각 가부장제, 성폭력, 소수자, 가족의 균열 등 절대 가볍지 않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마냥 무겁고 어둡게만 표현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주제가 무겁다고 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까지 무거울 필요는 없다. 때로는 가볍게, 또 때로는 묵직하게, 적재적소에서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이 소설집의 가장 큰 매력이다.


「나의 우렁총각 이야기」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전래동화 '우렁각시'를 모티브 삼은 글이다. 결혼에 회의적인 주인공 소현은 사촌 언니에게서 '우렁총각'을 선물 받는다. 이 우렁이는 평소에는 커다란 수조 안에서 지내지만, 약속 시각을 미리 정해놓으면 아무도 없을 때 사람으로 변해 집안일을 해놓고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신통방통한 우렁이다. 하지만 이 우렁이를 집에 들일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단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렁이가 사람으로 변한 모습을 절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 이야기는 소현이 어쩌다가 우렁총각을 선물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선물 받은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리면서 현대 사회의 결혼 제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표제작이기도 한 「백귀야행」은 국문과 대학원생인 미연의 이야기이다. 대학원 등록금이나 월세 등에 필요한 생활비는 언제나 부족하지만, 미연이 하는 공부는 소위 말하는 것처럼 '돈이 되는 공부'는 아니다. 소설은 "현실에 밀착할 수도 없고 현실을 떠날 수도 없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조금의 미화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예스러운 문체인데, 조선 시대의 한글소설을 보는 것 같은 말투는 자칫 잘못하면 우울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려준다.


「히로시마의 아이들」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던 희주와 성훈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짧은 성장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고통과 상처를 견디며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삶에는 어떻게 새순이 돋을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연대의 힘으로 아픔을 극복한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결말이겠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은 희주와 성훈이 부딪히고 깨지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소설의 질문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열다섯, 서른다섯」, 「하나를 위한 하루」, 「고통의 역사」는 모두 어딘가에 금이 가 있는 가족의 이야기이다. 「열다섯, 서른다섯」은 가족 안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한 두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고, 「하나를 위한 하루」는 아버지와 딸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남자에 관한 이야기, 「고통의 역사」는 행복한 가족을 만들어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아래로 물려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족이거나, 가족이었던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세 작품은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책을 다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섯 개의 단편이 모두 각각의 장편 소설의 도입부 같다는 것이었다. 이는 좋게 말하자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진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야기가 시작하려고 할 때 끝난다는 뜻이다. 이 책에 실린 송경아 작가의 단편은 확실한 답을 내리거나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책을 덮고 나서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글이다. 송경아 작가의 글을 이번에 처음 읽어보았는데 장편 소설이 있다면 찾아서 읽고 싶어졌다.


* 해당 글은 사계절 서평단에 선정되어 단행본을 제공받은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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