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노아 >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기아의 진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가 만약 100명의 마을이라면... 63억 지구인을 100명으로 축약해서 비교해 본다면....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평균치가 나온다.

20명이 영양상태가 충분하지 않고, 그중 한사람은 아사직전입니다. 하지만 15명은 비만 상태입니다.


6명이 모든 부(富)의 59%를 독점하고 있고, 전부 미국인입니다.

74명이 39%를 갖고 있으며 20명은 겨우 2%를 나눠 갖고 있습니다.


75명이 먹을 것을 비축하고 있고,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5명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중 17명은 안전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합니다.

마을에서 한 사람이 대학을 나왔고, 두 사람이 컴퓨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했는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아니 그랬는데 현대로 오면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불공평'의 역사였을 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사는 것,  누구는 거느리고 살고 누구는 굽신거리며 살았던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불합리한 체제에 불만을 품어왔고, 또 그것을 깨부수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시민들은 역사의 주체가 되어갔고, 제 손으로 쟁취한 자유를 누리는 황홀함도 맛보게 되었다.  그런데, 권력과 부의 단맛을 맛본 사람은 자신이 내몰고자 했던 기득권의 그 행태를 답습해 가며 새로운 귀족으로 거듭났다.  인간은 원래 욕심 사나운 존재였고, 욕심이 욕심을 낳고, 죄가 죄를 낳아 사망에 이르렀다.  이렇게 결론지으면 되는 걸까?  그러면 끝인 걸까?


책을 읽는 동안 답답함에 한숨이 나왔다.  2005년 기준으로 10세 미안의 아동이 5초에 1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세상... 비타민 A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3분에 1명 꼴이라는 것... 세계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8억 5천만 명이 심각한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는 것... 이게 과연 정상적인 삶의 모습인가.

심지어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1/4은 부유한 나라의 소가 먹고 있다는 사실... 이젠 경악하기에도 지친다. 


자연환경에 의한 절대적 빈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빈곤한 국가의 가난한 이유는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적인 불합리성이 더 많으며 강대국의 착취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고, 자국 내의 독재자와 소수 부유계층의 착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제구호단체가 힘을 쓰고는 있다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없으며, 그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보내주는 구호물품이 현지에서 제대로 쓰여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고 굶어 죽어가고 있는 이웃을 그들의 독재자만 손가락질하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정일이 아무리 미워도 우리가 북한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배불리 먹으며 풍요를 자랑하며 사는 나라들도 그 풍요가 선택받은 축복이라는 오만 속에서 살아서는 아니 된다.  또, 지금 당장 굶어 죽지 않는다 하여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일을 남의 일로만 여기는 우둔함을 보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  당장 직면한 우리나라의 실정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한미FTA를 체결하면서 정부는 자유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처럼 국민을 현혹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서 힘없고 가난한 국민이 ‘더불어’ 잘 살게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멀게 느껴지고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온 이상한파로 전 미국과 유럽은 꽁꽁 얼어붙는다.  미국의 수많은 피난민들이 멕시코 국경을 넘으려고 하지만 멕시코 정부는 허락하지 않고, 결국 정부 부채를 탕감하는 조건으로 그들은 국경의 문을 연다.  미국은 그 동안의 오만함을 버리고 전 세계와 함께 공존을 추구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대통령을 통해서 전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은 감독의 성향을 생각할 때 꽤 뜻밖이었으며 인상적이기도 했는데, 그 정도의 극한의 순간을 맞보지 않고는 인간은 겸손함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엄습했었다. 


더 이상,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이며 세상은 아름답고 따뜻한 곳이라는 얘기는 하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인간은 원래부터 악한 존재라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인간은 다만, 약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유혹에 약하고 도전에 약하고 고난에 약한 것이라고.  인류의 역사가 투쟁의 역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아와의 싸움도 인간이 극복해내야 할 투쟁이라고 여긴다.  그 투쟁은 가난하고 굶주리는 나라만의 몫이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이다.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부, 행복의 대가로 다수가 억눌리고 굶주리고 불행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사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사회가 과연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혹여 그런 사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를 거부하고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고,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아주 미약할 수 있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는 힘, 함께 아파하는 마음, 이웃을 향해 내미는 작은 손길 하나가 결국엔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바꾸어나갈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가정 안에서, 우리의 학교 내에서, 이 사회에서, 이 지구상에서 말이다.


감상에 빠진 덕분에 책 이야기를 거의 못했다.  심각한 주제를 쉽게 표현해 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꽤 강점을 가지는데, 유엔 식량 특별 조사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아의 진실을 들려주는 대화 형식으로 책은 이어진다.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 있고, 꼭 대답해 주어야 할 마땅한 질문들이 다양하게 녹아 있다.  책을 통해 얻게 된 진실과, 깨달아야 할 많은 부분들은 밑줄 긋기를 통해서 고스란히 옮겨 보련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두고 깊이 읽어야 할 책이다.  처음 출간된 것이 2000년이었는데 한국엔 늦게 도착한 감이 있다.  어린이를 지나쳐버린 청소년들에게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기꺼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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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시난테 > <오 하느님>, 제자리에 놓기.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오 하느님>의 작가 조정래. 태백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민족의 회한'의 문학이 여전히 계속됐다. <오 하느님>이라는 탄념은 그 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지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이란 말입니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가 뒤이어 떠오른 이유다. 안타깝게도 <오 하느님>의 비극은 '배타적 쇼비니즘'으로, <이것이 인간인가>의 비극은 '시오니즘의 폐쇄성'으로 돌변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러나 노란 얼굴의 독일군 포로는 그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던 미군 병사의 사무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어는 물론, 그가 속해 있던 동방대대 795부대의 웬만한 다른 병사들처럼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군이었지만 일본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누구도 모르는 언어, 일찌감치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모국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동북아시아 변방의 조그만 반도 출신의 소작농 아들이었다.”(p.219*<오 하느님>에 실린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평론<노르망디의 실종자> 중에서)

 To. 신길만 선생께.

 생전 한 순간도 편안한 적 없었던 당신, 저승에선 안녕하신지요. 당신은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고, ‘개 같은’ 죽음을 당하셨더군요. 당신의 실제 모델이던 양경종 씨는 92년까지 미국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설이 있다는데, 조정래 씨가 그린 당신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개 같았어요.’ 저속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라 화내지 마세요. <오 하느님>의 마지막 장, 그러니까 당신의 죽음을 그린 지면을 덮고, 전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개 같은 죽음이구나…’ ‘비참한’, ‘얄궂은’, ‘비루한’ 등등의 형용사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너무 미약한 단어라고 전 생각했던 거예요. 
 
 당신은 피식민 국가 조선에서 살았던 미천한 존재였어요. 당신이 일본군에 “강압적인 ‘지명’”(p.27)당했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지요. 장가를 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찍 장가가 입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또 아버지와 똑같이 평생 가난 속에서 허덕일 것”이 분명해 “논 한마지기라도 장만할 때까지 장가를 미루고, 뼈 휘도록 일하기로 했”었다지요. 그런데 “덜컥 지원병 지명을 당하고 말”(p.13)았던 거고요.

 당신은 몽골에서 있었던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소련군의 포로로 있던 도중 당신은 소련군으로 복무할 것을 제안 받았지요. 말이 제안이지,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요. “길은 외길이었다. 소련군이 되지 않으면,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야 했다.”(p.83) 이후 당신은 소련인 신 미하일이 돼, 독일군을 상대했어요. “독일군이 일제히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p.94)함에 따라 혹독한 시베리아를 횡단하였고요. 그리고 모스크바를 사십 킬러미터 뒤에 둔 소련의 한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당신은 독일군에게 잡혔어요.

 독일군 포로가 된 이후의 생활은 예전 소련군 포로였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지요. 조금 더 고역스러운 잡일에 시달렸고 쓰레기보다 못한 음식을 집어삼켜야 했지만, 그 신세의 얄궂음이란 똑같은 것이었다고요. 게다가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당신에게 명령을 했다지요. “좋아. 그럼 우리 독일군으로 근무하도록 하라!”(p.165) 당신은 별다른 주저 없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p.166)라고 대답했어요. “여기서 살아나가야” 했으니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죠. “대답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 생각만을 꽉 붙들고 있었”(p.166)다지요.

 당신은 노르망디에 갔어요. “덴마크라는 나라에서부터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해안까지 몇천리에 걸쳐 ‘대서양 방벽’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p.179)던 독일군에 합류한 것이예요. 쇠기둥을 박고, 벙커를 만들던 도중 노르망디전투에 투입된 미군에 의해 또 다시 포로가 됐어요. 미군 포로 때의 생활은 예전과는 달랐다지요. “아무런 통제나 간섭없이 자유로웠다”(p.187)고 해요. 그래서 당신은 “언젠부턴가, 다른 나라에 비해 포로를 월등하게 사람 대접 해주는 미국에 강한 기대를 품”(p.187)게 됐고요. “이런 나라라면,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바로 우리나라로 보내줄 것 같았”(p.188)다고 여겼다지요. 당신과 동료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습니다. “우리는 쏘련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우리의 국적을 고쳐달라!” 그렇지만 당신의 요구는 쇠고랑은 묵살됐어요. “유감스럽지만 국적을 고칠 수 없다. 그건 쏘련의 권한이지 우리 미국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에 의해 말이죠.

 "독일의 패색이 짙은 가운데 얄타 회담이 열렸”고 “스탈린은 미국에 수용되어 있는 독일군 포로들 중에서 국적이 소련인 자들을 전부 소련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해요. “미국 대통령은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고요. “독일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들이 동유럽의 여러 수용소에 칠만오천 명쯤 갇혀 있었는데, 이제 그 지역이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던” 까닭이지요. “미국은 자국민 포로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였”(p.207)던 거예요. 당신은 배를 다시 소련으로 갔어요.

 “(중략)“여기서 삼십 분 쉬어 간다. 모두 내려 트럭선(線) 안에서 소변도 보고 자유롭게 쉬어라”
   장교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포로들에게 일렀다. 사병들은 트럭 사이사이에 서서 포로들을 분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나무들 많은 야산으로 에워싸인 그 분지는 수많은 포로들이 용변을 보면서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지막 트럭에서 포로들이 다 내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타당탕탕탕탕……
  타당타타타타……
  드득드드드드……
  야산 숲 속 여기저기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쉬고 있던 수많은 포로들은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나뒹굴고 뒤엉키고 있었다."(p.213)

 작가 조정래는 당신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하며 끝냈어요. 당신의 운명처럼 기구하게, 허망하게 말이죠. 


 "이 남자는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 국경 분쟁 당시 소련군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붙잡혔을 당시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신길만 선생님. 작가 조정래를 통해 당신의 이야기를 접한 후 전 '민족주의'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의 행로 중간 중간 강력히 자리매김하고 있던 '민족의 끈'을 봤어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놀랄 일이 벌어졌다. 조선말을 듣고 온 것은 강명수만이 아니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길만과 천일호가 따로 찾으러 나서고 어쩌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모두 열한명이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는 순간에 십년지기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p.70) "신길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해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그렇게 반갑고도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음 환해지고, 가슴이 뜨겁게 울렁거리도록 반가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고마운지 모르면서도 그저 고맙고, 고마웠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이 곤궁에서 구해줄 것만 같은, 그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이 고마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었다."(p.56)

 그렇습니다. 당신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조선'이라는 '민족의 끈' 때문에 말이죠. 실제로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고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그야말로 강력한 '상상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책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세기 말경에 이 민족주의라는 문화적 조형물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역사적 동력들이 복잡하게 '교차해서' 나온 우발적인 증류물로 창조되었지만 일단 창조되자 그것은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 다양하게 의식적으로 이식될 수 있는 '조립물'이 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정치적*이념적 유형들을 통합하고 이 유형들에 흡수될 수 있었다."(p.23)

 앤더슨의 말처럼 민족, 민족성, 혹은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p.24)는 게 사실입니다. 즉 민족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이념적 유형'들과 통합됐을 때 매우 강력한 행위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당신의 행동은 피식민지배 상황의 특수한 정치적 유형이 '민족의 끈'을 공고히 한 셈이지요. 실제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쇼비니즘'의 광기로, 피식민국가의 해방의식과 결합해서는 민족자결주의로 탈바꿈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진 않으나 우리나라의 해방에 '민족주의'가 준 함의는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제 '민족주의는 반역'이 됐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듯 합니다. 혹자는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지혜롭게 구분하자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공허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군 아래 일치단결을 강요하는 한민족 이데올로기는 국가에 의해 '밑으로부터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제로, 다른 한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를 폄훼하는 기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혹자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통일의 당위성 때문에 '민족의 가치'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일견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엔 민족이라는 관념만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통일담론에 있어 왕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조직인 '민족좌파'는 북한의 핵실험을 묵인하고, 민족주의의 긍정성을 보수해 나가야 할 우파는 북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에게서 공히 '민족주의'가 걸림돌이 된 셈이지요.

박지성의 손을 꼭 부여잡은 이영표의 손. 이 때의 상황은 이렇다. 박지성이 '토트넘'의 진영에서 이영표가 가지고 있던 공을 가로챈다. 박지성이 소속팀의 동료인 웨인 루니에게 그 공을 연결하고, 웨인 루니가 득점에 성공한다. 웨인 루니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사이 박지성이 이영표에게 다가가 미안한 듯 엉덩이를 두들긴다. 이영표는 괜찮다며 박지성의 손을 맞잡는다.

 가슴 찡한 장면이다, 라고 한다. 글쎄. 난 그리 이들의 행동이 그리 가슴 '찡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이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서로에게 '미안하거나 괜찮다며 두드리거나'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미안했다면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의한 감정이어야 맞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풀 장소는 그라운드가 아니라 각자의 방에 있는 '전화기'여야 맞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면을 보고 '울컥' 하는 국민들에 있다. 한민족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두 사람의 '우정'에 감격하는 우리 국민들. 이들과 우리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은 '한민족'이라는 사실 하나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랑스런 우정에 '한민족의 긍지'를 자위하는 것이다. 아무런 '우정'에나 감격하는 건 아니다. 이들의 '프리미어'함이 가미돼야 한다.  이게 무슨 대수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저 '우리끼리 만족하며 살면 되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다음을 보자.

 



 "태극전사를 응원하는 마음, 배타적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 한민족은 9천년 역사동안 한 핏줄 속에 흐르는 홍익인간, 선민사상으로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 외환을 극복해낸 민족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보면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민족도 보살필 줄 아는 이미 세계화 마인드를 가진 민족이다." - 'SUNDANCE D.SIGN, 웰빙코스님 블로그 중에서.

'선민사상'이 대처 뭔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다른 민족보다 깨어있다는 '선민의식'이 배타성을 불러오는 것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느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어디서 많이 봐온 홍보문구 아닌가? '힘들수록 뭉쳐야 한다'는 밑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붉은 악마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건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신남'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국가'와 결합해 '국가주의적 도구'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 국가주의는 종종 우리에게 국가 아래 단결할 것을 강요한다. 국가를 정점으로 한 '종적 단결'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흐리게 만들어 이건희와 전태일을 같은 층위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종적 단결' 아니라 '횡적 연대'다. 

민족주의에 관한 가장 큰 문제점은 앤더슨이 지적한 다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앤더슨이 이 지적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경우를 상정한 듯 보이지만 현재는 전쟁의 자리를 '국가경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IMF를 불러오게 한 원인의 분석 없이 국민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세요.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상투적인 선전구를 동원해서 말이지요.

최근엔 한-미 FTA가 타결됐습니다. 또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국민을 무한경쟁의 사지로 몰아넣고, '민족의 힘'을 믿겠다니요.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한 것이며, 이는 자기 책임으로 귀결된다지요. 임지현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아포리즘은 그래서, 맞는 말이 됐습니다.

물론, 선생님. 당신이 살았던 시대의 민족주의를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제 그 시기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야지, 현재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피식민지를 견뎌내게 해 주었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제 자리'에 돌려놓을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위안부 문제' 등 여전히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굳이 여기에 민족주의가 투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위안부 조사 위원회'는 민족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그 시기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근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기록으로 남아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 당신의 비루함을 기록한 조정래의 <오 하느님>은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는 강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짙어, 삶의 밑바닥에 있었던 당신의 삶은 '한 줄' 따위로 정리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조정래의 다음과 같은 말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 역사는 그 안에 포함된다. 인간을 응시할 수록 거듭하여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마주 서게 된다." 조정래의 민족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건 '역사 속에서 희생당했던 인간에 대한' 탐구 정신을 놓치고 있지 때문인 듯 보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묘사하던 대목에서 코끝이 매워질 정도로 찡했습니다. "니 이름을 왜 길만이라고 지었는지 아냐? 길할 길(吉)자, 일만 만(萬)자, 니 평생 좋은 일만 있으라고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름 덕도 보는 것잉게, 이름 믿고 무슨 일이고 열성으로 해야 혀." 억울하게도 당신의 이름은 이승에서 단 한번도 당신의 삶이 돼주지 못했다지요. 지금 계신 그 곳에선 이름 덕 보며 사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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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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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 하느님>의 작가 조정래. 태백산맥에서부터 시작된 '민족의 회한'의 문학이 여전히 계속됐다. <오 하느님>이라는 탄념은 그 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어지게 만든다. <이것이  인간이란 말입니까>.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가 뒤이어 떠오른 이유다. 안타깝게도 <오 하느님>의 비극은 '배타적 쇼비니즘'으로, <이것이 인간인가>의 비극은 '시오니즘의 폐쇄성'으로 돌변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러나 노란 얼굴의 독일군 포로는 그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던 미군 병사의 사무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질문에 단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그는 히틀러의 독일어는 물론, 그가 속해 있던 동방대대 795부대의 웬만한 다른 병사들처럼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군이었지만 일본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누구도 모르는 언어, 일찌감치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모국어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동북아시아 변방의 조그만 반도 출신의 소작농 아들이었다.”(p.219*<오 하느님>에 실린 문학평론가 복도훈의 평론<노르망디의 실종자> 중에서)

 To. 신길만 선생께.

 생전 한 순간도 편안한 적 없었던 당신, 저승에선 안녕하신지요. 당신은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고, ‘개 같은’ 죽음을 당하셨더군요. 당신의 실제 모델이던 양경종 씨는 92년까지 미국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설이 있다는데, 조정래 씨가 그린 당신의 마지막은 그야말로 ‘개 같았어요.’ 저속하기 그지없는 표현이라 화내지 마세요. <오 하느님>의 마지막 장, 그러니까 당신의 죽음을 그린 지면을 덮고, 전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개 같은 죽음이구나…’ ‘비참한’, ‘얄궂은’, ‘비루한’ 등등의 형용사는 당신의 죽음 앞에서 너무 미약한 단어라고 전 생각했던 거예요. 
 
 당신은 피식민 국가 조선에서 살았던 미천한 존재였어요. 당신이 일본군에 “강압적인 ‘지명’”(p.27)당했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지요. 장가를 갈 수 있는 나이였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일찍 장가가 입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또 아버지와 똑같이 평생 가난 속에서 허덕일 것”이 분명해 “논 한마지기라도 장만할 때까지 장가를 미루고, 뼈 휘도록 일하기로 했”었다지요. 그런데 “덜컥 지원병 지명을 당하고 말”(p.13)았던 거고요.

 당신은 몽골에서 있었던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잡히고 말았어요. 소련군의 포로로 있던 도중 당신은 소련군으로 복무할 것을 제안 받았지요. 말이 제안이지,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요. “길은 외길이었다. 소련군이 되지 않으면,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야 했다.”(p.83) 이후 당신은 소련인 신 미하일이 돼, 독일군을 상대했어요. “독일군이 일제히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p.94)함에 따라 혹독한 시베리아를 횡단하였고요. 그리고 모스크바를 사십 킬러미터 뒤에 둔 소련의 한 지역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당신은 독일군에게 잡혔어요.

 독일군 포로가 된 이후의 생활은 예전 소련군 포로였을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지요. 조금 더 고역스러운 잡일에 시달렸고 쓰레기보다 못한 음식을 집어삼켜야 했지만, 그 신세의 얄궂음이란 똑같은 것이었다고요. 게다가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당신에게 명령을 했다지요. “좋아. 그럼 우리 독일군으로 근무하도록 하라!”(p.165) 당신은 별다른 주저 없이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p.166)라고 대답했어요. “여기서 살아나가야” 했으니까.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말이죠. “대답을 하는 순간” 당신은 “이 생각만을 꽉 붙들고 있었”(p.166)다지요.

 당신은 노르망디에 갔어요. “덴마크라는 나라에서부터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해안까지 몇천리에 걸쳐 ‘대서양 방벽’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p.179)던 독일군에 합류한 것이예요. 쇠기둥을 박고, 벙커를 만들던 도중 노르망디전투에 투입된 미군에 의해 또 다시 포로가 됐어요. 미군 포로 때의 생활은 예전과는 달랐다지요. “아무런 통제나 간섭없이 자유로웠다”(p.187)고 해요. 그래서 당신은 “언젠부턴가, 다른 나라에 비해 포로를 월등하게 사람 대접 해주는 미국에 강한 기대를 품”(p.187)게 됐고요. “이런 나라라면,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바로 우리나라로 보내줄 것 같았”(p.188)다고 여겼다지요. 당신과 동료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썼습니다. “우리는 쏘련인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우리의 국적을 고쳐달라!” 그렇지만 당신의 요구는 쇠고랑은 묵살됐어요. “유감스럽지만 국적을 고칠 수 없다. 그건 쏘련의 권한이지 우리 미국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간결한 말 한마디에 의해 말이죠.

 "독일의 패색이 짙은 가운데 얄타 회담이 열렸”고 “스탈린은 미국에 수용되어 있는 독일군 포로들 중에서 국적이 소련인 자들을 전부 소련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해요. “미국 대통령은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고요. “독일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들이 동유럽의 여러 수용소에 칠만오천 명쯤 갇혀 있었는데, 이제 그 지역이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던” 까닭이지요. “미국은 자국민 포로들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급선무였”(p.207)던 거예요. 당신은 배를 다시 소련으로 갔어요.

 “(중략)“여기서 삼십 분 쉬어 간다. 모두 내려 트럭선(線) 안에서 소변도 보고 자유롭게 쉬어라”
   장교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포로들에게 일렀다. 사병들은 트럭 사이사이에 서서 포로들을 분지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나무들 많은 야산으로 에워싸인 그 분지는 수많은 포로들이 용변을 보면서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지막 트럭에서 포로들이 다 내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타당탕탕탕탕……
  타당타타타타……
  드득드드드드……
  야산 숲 속 여기저기서 기관총 난사가 시작되었다. 한가롭게 쉬고 있던 수많은 포로들은 아우성과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나뒹굴고 뒤엉키고 있었다."(p.213)

 작가 조정래는 당신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하며 끝냈어요. 당신의 운명처럼 기구하게, 허망하게 말이죠. 


 "이 남자는 일본군으로 징집되었다. 1939년 만주 국경 분쟁 당시 소련군에 붙잡혀 붉은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는 다시 독일군 포로가 되어 대서양 방어선을 건설하는 데 강제 투입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다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붙잡혔을 당시 당시 아무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며, 미 정보부대에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신길만 선생님. 작가 조정래를 통해 당신의 이야기를 접한 후 전 '민족주의'에 대해 생각했어요. 당신의 행로 중간 중간 강력히 자리매김하고 있던 '민족의 끈'을 봤어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놀랄 일이 벌어졌다. 조선말을 듣고 온 것은 강명수만이 아니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길만과 천일호가 따로 찾으러 나서고 어쩌고 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모두 열한명이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손을 마주 잡는 순간에 십년지기가 되고, 한 덩어리가 되었다."(p.70) "신길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해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그렇게 반갑고도 고마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음 환해지고, 가슴이 뜨겁게 울렁거리도록 반가운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고마운지 모르면서도 그저 고맙고, 고마웠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이 곤궁에서 구해줄 것만 같은, 그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는 믿음이 고마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었다."(p.56)

 그렇습니다. 당신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조선'이라는 '민족의 끈' 때문에 말이죠. 실제로 비슷한 습관을 공유하고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그야말로 강력한 '상상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책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8세기 말경에 이 민족주의라는 문화적 조형물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역사적 동력들이 복잡하게 '교차해서' 나온 우발적인 증류물로 창조되었지만 일단 창조되자 그것은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 다양하게 의식적으로 이식될 수 있는 '조립물'이 되었으며, 여러 종류의 정치적*이념적 유형들을 통합하고 이 유형들에 흡수될 수 있었다."(p.23)

 앤더슨의 말처럼 민족, 민족성, 혹은 민족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위력이 있는 반면 철학적으로는 그 내용이 빈곤하고 일관성마저 결여하고 있"(p.24)는 게 사실입니다. 즉 민족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어떠한 '정치적, 이념적 유형'들과 통합됐을 때 매우 강력한 행위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당신의 행동은 피식민지배 상황의 특수한 정치적 유형이 '민족의 끈'을 공고히 한 셈이지요. 실제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쇼비니즘'의 광기로, 피식민국가의 해방의식과 결합해서는 민족자결주의로 탈바꿈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진 않으나 우리나라의 해방에 '민족주의'가 준 함의는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이제 '민족주의는 반역'이 됐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 할 듯 합니다. 혹자는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를 지혜롭게 구분하자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공허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민족주의'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군 아래 일치단결을 강요하는 한민족 이데올로기는 국가에 의해 '밑으로부터의 희생'을 강요하는 기제로, 다른 한편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를 폄훼하는 기제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혹자는 북한의 존재 때문에, 통일의 당위성 때문에 '민족의 가치'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일견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엔 민족이라는 관념만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통일담론에 있어 왕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조직인 '민족좌파'는 북한의 핵실험을 묵인하고, 민족주의의 긍정성을 보수해 나가야 할 우파는 북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둘 모두에게서 공히 '민족주의'가 걸림돌이 된 셈이지요.

박지성의 손을 꼭 부여잡은 이영표의 손. 이 때의 상황은 이렇다. 박지성이 '토트넘'의 진영에서 이영표가 가지고 있던 공을 가로챈다. 박지성이 소속팀의 동료인 웨인 루니에게 그 공을 연결하고, 웨인 루니가 득점에 성공한다. 웨인 루니에게 포커스가 맞춰진 사이 박지성이 이영표에게 다가가 미안한 듯 엉덩이를 두들긴다. 이영표는 괜찮다며 박지성의 손을 맞잡는다.

 가슴 찡한 장면이다, 라고 한다. 글쎄. 난 그리 이들의 행동이 그리 가슴 '찡하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이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 서로에게 '미안하거나 괜찮다며 두드리거나'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박지성이 미안했다면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의한 감정이어야 맞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풀 장소는 그라운드가 아니라 각자의 방에 있는 '전화기'여야 맞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장면을 보고 '울컥' 하는 국민들에 있다. 한민족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의 리그인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두 사람의 '우정'에 감격하는 우리 국민들. 이들과 우리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은 '한민족'이라는 사실 하나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랑스런 우정에 '한민족의 긍지'를 자위하는 것이다. 아무런 '우정'에나 감격하는 건 아니다. 이들의 '프리미어'함이 가미돼야 한다.  이게 무슨 대수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저 '우리끼리 만족하며 살면 되지'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다음을 보자.

 



 "태극전사를 응원하는 마음, 배타적 민족주의를 선동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 한민족은 9천년 역사동안 한 핏줄 속에 흐르는 홍익인간, 선민사상으로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 외환을 극복해낸 민족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를 통해 보면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 민족도 보살필 줄 아는 이미 세계화 마인드를 가진 민족이다." - 'SUNDANCE D.SIGN, 웰빙코스님 블로그 중에서.

'선민사상'이 대처 뭔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다른 민족보다 깨어있다는 '선민의식'이 배타성을 불러오는 것 아니냔 말이다. 게다가 '나라가 어려우면 하나로 똘똘뭉쳐'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느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어디서 많이 봐온 홍보문구 아닌가? '힘들수록 뭉쳐야 한다'는 밑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붉은 악마의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건 신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 '신남'은 '놀이'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국가'와 결합해 '국가주의적 도구'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 국가주의는 종종 우리에게 국가 아래 단결할 것을 강요한다. 국가를 정점으로 한 '종적 단결'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흐리게 만들어 이건희와 전태일을 같은 층위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종적 단결' 아니라 '횡적 연대'다. 

민족주의에 관한 가장 큰 문제점은 앤더슨이 지적한 다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지난 2세기 동안 수백만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한된 상상체들을 위해 남을 죽이기보다 스스로 기꺼이 죽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형제애이다." 앤더슨이 이 지적은 민족의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된 경우를 상정한 듯 보이지만 현재는 전쟁의 자리를 '국가경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IMF를 불러오게 한 원인의 분석 없이 국민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세요.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상투적인 선전구를 동원해서 말이지요.

최근엔 한-미 FTA가 타결됐습니다. 또 '민족의 힘을 믿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국민을 무한경쟁의 사지로 몰아넣고, '민족의 힘'을 믿겠다니요.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은 스스로의 힘이 부족한 것이며, 이는 자기 책임으로 귀결된다지요. 임지현의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는 아포리즘은 그래서, 맞는 말이 됐습니다.

물론, 선생님. 당신이 살았던 시대의 민족주의를 간과해선 안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이제 그 시기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야지, 현재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피식민지를 견뎌내게 해 주었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제 자리'에 돌려놓을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위안부 문제' 등 여전히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굳이 여기에 민족주의가 투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위안부 조사 위원회'는 민족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그 시기의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근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민족주의는 이제 기록으로 남아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 당신의 비루함을 기록한 조정래의 <오 하느님>은 가치가 있습니다. 역사는 강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향이 짙어, 삶의 밑바닥에 있었던 당신의 삶은 '한 줄' 따위로 정리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조정래의 다음과 같은 말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입니다. "언제 어느 때나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다. 역사는 그 안에 포함된다. 인간을 응시할 수록 거듭하여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마주 서게 된다." 조정래의 민족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건 '역사 속에서 희생당했던 인간에 대한' 탐구 정신을 놓치고 있지 때문인 듯 보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를 묘사하던 대목에서 코끝이 매워질 정도로 찡했습니다. "니 이름을 왜 길만이라고 지었는지 아냐? 길할 길(吉)자, 일만 만(萬)자, 니 평생 좋은 일만 있으라고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이름 덕도 보는 것잉게, 이름 믿고 무슨 일이고 열성으로 해야 혀." 억울하게도 당신의 이름은 이승에서 단 한번도 당신의 삶이 돼주지 못했다지요. 지금 계신 그 곳에선 이름 덕 보며 사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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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3월의 사회적 독서

새해 들어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반)강제는 매달 '사회적 독서'의 목록을 올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몇몇 이들의 책읽기를 꼬드기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나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매달 같이 책을 읽거나 적어도 책을 서가에 꽂아두는 분이 몇 분 계시기 때문에(땡스투 추천으로 보자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아주 헛일은 아니다 싶다.

지난 2월에 꼽은 네 권의 책들 가운데 나는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를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고 '톰 크루즈와의 인터뷰' 같은 몇몇 꼭지를 전철에서 읽었다. "이 책으로 인해 성경은 인류 사상 두번째 위대한 책으로 밀려났다"는 밴 애플렉의 허풍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건질 만한 대목이 없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책들, 니스벳의 <보수주의>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책장을 많이 넘기진 못했으나 언제나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다. 그리고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도 여러 꼭지를 읽었으니 과락은 면할 만하다.

내 경우 자랑할 만한 습관은 아니지만 한두 권의 책을 완독해가면서 보통 20여 권의 책을 같이 뒤적이기 때문에 막상 '실적'으로 남는 책은 많지 않다. 최근에 완독한 책은 박이문의 <예술철학>(재판 2006) 정도이다(별첨으로 덧붙여진 번역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는 부분적인 오역에다 오타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읽거나 참조하는 식이다(그렇게 건드리는 책들이 한달에 50권은 훌쩍 넘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여러 종류의 강의를 해야 하고 한편으론 원고/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남독의 습관도 딴은 강제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사회적 독서'의 목록에 올려놓는 책들은 그런 가운데에서 매달 좀더 신경을 쓰기로 작정한 책들이다. 나름대로 '특혜'를 부여하는 셈이다. 이유는 함께 읽어봅시다, 라는 것이고.   

 

 

 

 

3월에 읽을 첫번째 책은 '한국문학 읽기'로 올해 발표 90주년을 맞는 이광수의 <무정>(1917)이다. 나로선 20년만에 다시 읽게 되는 작품인데, 사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라고 새로운 '정본'이 나온 게 불과 몇년 전이다(<'국민'이라는 노예>(삼인, 2005)에도 편자의 후기 등이 재수록돼 있다). 편자인 김철 교수가 다시 책임편집을 맡아서 낸 <무정>(문학과지성사, 2005)도 불과 재작년에 나왔을 뿐이고. 그러니까 20년의 세월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읽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된 건 비교적 최근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광수를 읽을 때 옆에 두고서 필독해야 하는, 김윤식 교수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2>(솔출판사, 1999)의 재판이 나온 건 좀 오래 됐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은 건 아마도 80년대 후반쯤이었을 걸 같고, 그때 판본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1,2,3>(한길사, 1986)이었다(나는 2/3쯤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는 나중에 절판되고 나서 구입해두지 않은 걸 후회했었는데, 솔출판사판의 재판이 나왔을 때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읽어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보관해둘 만한 장소가 여의치 않은 탓이다(이러다 또 절판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도서관에서 같이 대출한 책은 젊은 이광수 연구자 최주한 박사의 <제국 권력에의 야망과 반감 사이에서>(소명출판, 2005). 학위논문을 손질한 것이기도 한데 이광수 연구서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재미있다(주로 다루는 건 <무정>이 아니라 <유정>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권의 참고문헌을 꼽을 수 있지만 사설을 여기까지만. 참고로, 절판된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건 김현 편, <이광수>(문학과지성사, 1977). 김동인의 '<무정> 분석' 등이 포함된 유익한 자료집이다.  

 

 

 

 

두번째 책은 '한국사회 읽기'란 핑계로, 얼마전에 출간된 고종석의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을 꼽는다. 책은 이미 구입해두었는데, 사실 '잡다함'이란 뜻의 프랑스어 '바리에떼'를 제목으로 삼은 건 내 취향이 아니다(내가 저자인가?). 기억에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프랑스문학을 찾아서>의 한 부에 그런 제목을 붙였고, 연원을 따지자면 프랑스 시인 발레리가 그런 책인가 에세이 묶음을 또 썼다(발레리만 그런 제목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발레리 따라하기'를 거쳐서 '김현 따라하기'의 연장이 아닌가도 싶다(얼마전 연재를 끝낸 '말들의 풍경'이 알다시피 김현 평론집의 제목을 훔쳐온 것이었다). '따라하기'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바리데기'도 아닌) '바리에떼'란 말이 우리말에 아무런 소속을 갖고 있지 않은 '겉멋'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잡다함'을 빙지한 그런 '겉멋부림'에도 불구하고(사실 저자가 프랑스 포도주 마니아라고 하니까 '바리에떼' 정도의 멋을 부리는 건 이해할 만하다) 책은 여느 고종석의 책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재미있다(목차를 보니 내가 이미 읽어본 글들도 여럿된다. 잡지에 실린 에세이나 단행본에 실린 발문들이 그런 종류이다). '군소리'라고 붙여놓은 서문을 보면 그가 이 책에서 제일 자신하는 글은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알음, 2003)를 다룬 '식민주의적 상상력'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저자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으나,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런 '자화자찬'이 본래 고종석스러운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고종석은 허튼 소리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같이 움켜쥐어보도록 하자.

덧붙이자면 '1970년대를 사는 백수의 잡감'이란 부제를 단 그의 자기세대론 '우리 세대를 위하여' 같은 글을 읽으면 저자와 포도주라도 같이 한잔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왜 포도주인가는 읽어보면 안다). 고종석도 거의 '아줌마' 다 됐다는 걸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안쪽 책갈피에는 '저자의 다른 책들'이라고 16권의 책 목록이 적혀 있는데, 훑어보니 내가 안 갖고 있는 건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과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2006), 그리고 <고종석의 영어이야기>(마음산책, 2006) 세 권이다. 앞의 두 권은 주로 신문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고 짐작엔 그 대부분을 나는 지면에서 읽었다. 그리고 기억에 고종석의 '영어공부' 책은 그 한권이 아니지만 나는 모두 안 갖고 있다. 그런 책들은 그가 '코리아타임스'의 기자였다는 전력을 떠올리게 해주지만 내가 좋아하는 고종석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에 대한 애정과 아는 체를 늘어놓는 고종석이다. 그 영어책을 사둘 만한 여력이 된다면 그보다 먼저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 2007)을 사서 읽고 싶다. 사실은 이 책을 '3월의 책'으로 올리려고도 했지만 그건 나중 생각이었다. 뭐 결과적으론 엎어치나 메치나 두 권 모두를 꼽아놓은 셈이 되는군.  

 

 

 

 

세번째 책은 '미국을 알자'는 취지로 좀 '뒤늦은' 화두이면서 아직 진행중인 사안인 한미 FTA 관련서들을 목록에 올려둔다.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를 먼저 꼽아두긴 했는데 관련서들은 더 많이 나와있으며 적절히 참조하면 되겠다. 협상마감 시한인 4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지라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더 늦기 전에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눈뜨고 코 베이는 일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론을 읽자' 범주에서 꼽은 책은 지젝의 신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이다. 번역본 상으론 450여쪽에 이르니까(원저는 280여쪽 분량이다) 다소 부담스럽긴 한데, 대신에 맨마지막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먼저 읽을 예정이다. 지젝의 '민주주의론'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계획한 것이고, <삐딱하게 보기>와 <혁명의 다가온다>를 다시 참조할 생각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박종철출판사, 1999)와 위너 본펠드의 <무엇을 할 것인가>(갈무리, 2004)를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서. 더불어 같이 읽기 위해 엊그제 꺼내놓은 책은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레닌'이 3월의 이론적 화두가 될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목표는 목표이다. 일정으로 보아 몇 페이지 건드리지도 못하고 3월 한달이 후딱 지나갈 가능성이 농후하지만(벌써 봄이라니!) '사회적 독서'의 의의라는 게 따로 있겠는가. 읽다가 다 못 읽으면 옆에서 이어서 읽어주고 뒤에서 마저 읽어주는 게 사회적 독서다. 당신이 그 옆사람, 뒷사람이 되어주면 좋지 아니한가!..

07. 0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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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짱꿀라 > 국내 소장학자들 뚝딱… ‘지식인 마을’ 섰다

 

 

 

 

 

 

 

 

 

 

 

 

 

 

국내 소장학자들 뚝딱… ‘지식인 마을’ 섰다

 

인문 자연 사회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동서양 대표 지식인 100명이 촌장과 일꾼으로 등장하는 ‘지식인 마을’이 문을 열었다. 그림 제공 김영사, 기사제공 : 동아일보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열정과 열광을 보이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성공을 위한 최상의 공식임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열정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 신경과학자 라마찬드란 씨의 말을 따른다면, 지식을 쌓는 최상의 방법 역시 위대한 지식인들의 곁에서 그들의 호기심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 아닐까. 김영사가 21일 펴낸 ‘지식인 마을’은 그렇게 열정과 호기심의 바이러스를 나눠 줄 동서양의 지식인 100명을 한곳에 모으고 국내 소장학자 36명이 가이드를 맡은 방대한 규모의 대중교양 시리즈다. 모두 50권 중 이날 1차분 15권이 먼저 나왔다.》

   ■ 대중교양서 시리즈 ‘지식인 마을’ 출간

   시리즈 전체 디렉터를 맡은 장대익(미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연구원) 박사는 “일단 입학 승진의 문턱만 뛰어넘으면 모든 걸 잊어버리는 한국의 문턱 증후군을 퇴치할 백신 프로그램”이라고 시리즈 취지를 설명했다. 이 시리즈는 우선 지식인의 삶과 생애, 사상을 평이하게 나열하는 개론서 대신 논쟁의 형식을 취했다. 권마다 ‘다윈 & 페일리’ ‘장자 & 노자’처럼 서로 앙숙이거나 영향을 주고받은 지식인 2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이 던진 위대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서로 어떻게 대립, 계승하거나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가이드를 맡은 국내 학자들은 100명의 동서양 대표지식인을 지식인 마을의 촌장(개척자)과 일꾼(계승자)으로 나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처럼 수많은 분야를 개척한 학문의 대가는 촌장, 촘스키나 아인슈타인처럼 촌장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만의 분야를 새로 개척한 20세기 지식인들은 일꾼으로 분류됐다. 여기에는 서양인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정약용, 최한기, 신채호, 함석헌, 우장춘, 석주명 등 한국 사상가 8명도 포함됐다. 권마다 앞에는 전체 마을 지도가 나오고 끝에는 해당 책의 주제에 해당되는 지식인들을 계승하거나 대립한 지식인, 영향을 받은 분야 등을 표시한 지도가 나온다. 지식에는 뿌리가 있으며 또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지적 겁쟁이들의 코드’인 ‘한 우물만 파기’를 뛰어 넘어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통합하는 ‘잡종적 지식인’의 면모에 주목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예컨대 데카르트는 2권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데카르트 & 버클리’에 철학자로 등장하지만, 10권 ‘거인의 어깨에 선 거인-뉴턴 & 데카르트’에서는 자연과학자로 나온다. 1권 ‘진화론도 진화한다-다윈 & 페일리’는 생물학이라는 분야를 뛰어넘어 문학과 철학 경제학 등에 응용되는 진화론의 현 주소를 보여 준다. ‘고급 대중교양서’를 표방하는 시리즈답게 톡톡 튀는 서술방식도 눈에 띈다.

   책마다 ‘지식인 마을로의 초대’ ‘지식인과의 만남’ ‘지식토크 테마토크’ ‘이슈@지식’ ‘징검다리’ 등의 장으로 구성됐다. 이 중 ‘지식토크 테마토크’는 저자가 내용 왜곡에 대한 걱정 없이 자유롭게 가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이다. 데카르트와 버클리가 메신저로 채팅을 하거나 정약용 최한기 주희가 현대 한국에 나타나 선거 유세를 하는 식이다. 신은영 김영사 편집장은 “학계가 대중적 저술을 폄훼하는 풍토에서 양산되는 번역서나 짜깁기 책 대신 우리 저자가 직접 쓴 고급 지식 교양 시리즈라는 점에 중점을 둬 기획했다”며 “국내 학계와 출판계에서 36명의 저자가 한 시리즈를 위해 1년 이상 동시에 작업한 것도 전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쉽게 읽는 인문학’ 지식인마을로 오세요
  지식인마을(전50권 중 1차분 16권) 
  
  ▲ 지식인마을에 가다

   ‘인문학의 위기’ ‘출판시장의 붕괴’가 운위되는 요즘이다. 모두 50권으로 기획된 이 시리즈는 우리 학자들이 학문과 대중의 ‘다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인문학 부흥’ 프로젝트다. 30~40대 젊은 학자 36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1차로 16권이 먼저 출간됐다. ‘지식인마을’은 대립·보완·경쟁·창조적 계승 관계에 있는 두 사상가를 내세워 그들이 논쟁하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 따라서 모두 100명의 사상가가 등장한다. 데카르트와 버클리, 랑케와 카, 아인슈타인과 보어, 세이건과 호킹, 공자와 맹자, 장자와 노자 등이 한 권의 책에서 함께 논의된다. 이황과 이이, 정약용과 최한기, 신채호와 함석헌, 우장춘과 석주명 등 한국사상가 8명도 포함됐다.

  책의 차례는 일반 독자들의 눈길을 잡기 위해 독특한 방식으로 구성했다. 먼저 모든 책의 첫 장에는 가상 지도가 그려져 있다. 아고라(광장)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개척자[촌장]들이 모여 사는 ‘다윈가(家)’와 ‘플라톤가’가 자리잡고, 오른쪽에는 이들을 이어받은 20세기 대표적 지식인들[일꾼]이 모여 사는 ‘촘스키가’(인문)와 ‘아인슈타인가’(자연과학)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학자들을 기다린다는 뜻에서 ‘분양’중인 ‘새싹마을’도 설정했다.
 
  책의 장도 ‘1st Street(1번가)’부터 ‘5th Street(5번가)’까지로 구분했다. 1번가(지식인마을로의 초대)에서는 책의 독서 포인트를 제시한다. 2번가(지식인과의 만남)에서 본격적인 두 사상가의 논의를 설명하고, 3번가(지식토크, 테마토크)에선 이들의 논쟁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제시한다. 4번가(
이슈@지식)는 과거의 문제가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다루고, 5번가(징검다리)에서는 사상가들의 연보와 참고문헌, 짧은 원문 읽기 등을 덧붙였다. 언뜻 장난스러워 보이는 시도 같지만 책의 수준은 녹록하지 않다. 주 독자층을 고교생이 아닌 대학생 이상 일반인들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1권 ‘다윈&페일리’ 편은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과 창조론을 펼친 신학자 페일리의 논의를 대립시켜 설명한다.

   페일리는 정교한 시계를 만든 시계공처럼 신(神)이 복잡한 생명체를 만들었다고 상정했다. 반면 다윈은 1831년 남아메리카를 항해한 비글호를 타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탐험하면서 진화론을 주창하게 된다. 책에는 이들의 논의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다룬다. 기획의 총디렉터를 맡은 장대익 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연구원은 “우리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면 갑자기 호기심을 잃어버리는 ‘문턱 증후군’에 걸려 있다”며 “이 시리즈는 대학생과 일반인들이 ‘문턱’을 넘어 더 깊은 독서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수기자

자료출처 : 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611/200611240542.html(조선일보)

[행복한책읽기Review] 통합 학술 시리즈 `지식인 마을` 총괄 장대익 교수 [중앙일보]
`소장파 학자들이 꾸린 대중 눈높이 지식 보따리`  
 
   꼭 논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누구나 통합적 사고와 통섭(학문간의 넘나듦)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책을 폭넓게, 많이 읽으라는 권고도 그래서 나온다. 그러나 독서로 종합적 이해력을 키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배경지식 없이는 100% 소화가 불가능한 번역서가 교양서 시장의 주류인 데다, 국내 권위자들이 대중 눈높이에 맞춰 쓴 책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국내 소장파 학자 26명이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동서양 지식인 100명의 상호교류를 시도한 '지식인 마을'시리즈(전 50권, 김영사, 각 9500원)의 등장은 신선하다.

   총괄 디렉터를 맡은 장대익(사진.미국 터프츠대 인지연구소 방문연구원)교수는 이 시리즈를 "지식이라는 물고기를 잡는 방법뿐 아니라 왜 잡는가,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고민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오늘날 지식은 명문대를 가거나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등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내가 잡은 물고기가 정작 무엇인지, 대체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모른다면 물고기 잡기는 무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배운 지식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참다운 지식이 아닐까요?"

   이같은 문제의식 아래 지난해 초 필자 선정에 들어갔다. '나의 배움과 앎이 대중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소장파 학자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우리 학자들이 우리 생각으로 씹어 소화한 고급 지식교양서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지요. 거의 예외없이 저희 뜻에 공감하시더군요."

   지나치게 대중에 영합한 논술지침서도, 그렇다고 전문가끼리만 알아듣는 논문집도 아닌, 딱 그 중간의 책.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갈증이 '인문학의 위기'를 고민하던 학자들한테도 분명 있었던 것. 장 교수가 "'지식인 마을'은 독자뿐 아니라 저자를 위한 시리즈"라고 표현한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책은 서로 대립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은 두 지식인이 나와 팽팽한 논쟁을 벌이는 식으로 구성됐다. 1차분(15권)에는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주장한 다윈과 페일리, 동양사상의 주류인 공자와 맹자, 우주탄생의 수수께끼를 탐구한 세이건과 호킹, 세계화를 사이에 두고 논리싸움을 펼치는 부르디외와 기든스 등이 포함됐다. 특히 데카르트는 철학자로서 버클리와, 과학기술자로서 뉴튼과 짝을 지어 두 번이나 나온다. "오늘날의 학문분류법으로는 도저히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통합적 지식인이기 때문"이란다. 대상 독자는 대학생 이상. 내년 상반기에 완간된다.

기선민 기자

자료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517902(중앙일보)

 

동서양의 석학 100명 한마을에 산다?
지식인마을 / 장대익 등 지음 / 김영사발행

                                     
                                         아인슈타인 등 ‘지식인 마을’
 
  세계의 석학이 한 집에 두 명씩 산다. 또 그들이 사는 집 50채가 한 마을을 이룬다. 이름은 ‘지식인마을’. 그런데 마을 주민은 나라도, 살았던 시기도 다르다. 시간, 공간의 벽을 넘어 함께 사는 마을.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집도, 마을도 모두 가상의 공간이다. 실제로는 책, 바로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다. 인문, 사회, 과학기술의 지식인 100명을 골라, 권당 2명씩 모두 50권에 실었다. 이 가운데 1차분 15권이 먼저 나왔다. 저자는 국내의 소장학자 36명. 한 시리즈를 위해 이 정도 저자가 1년 이상 매달린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한 책에 담은 지식인 둘의 관계가 특이하다. 다윈과 페일리, 공자와 맹자, 뉴턴과 데카르트처럼 대립하거나 영향을 주고 받았다. 두 지식인의 대립, 보완, 경쟁, 창조적 계승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책이 선정한 동서양의 대표 지식인 100명은 다시 촌장과 일꾼으로 나눠진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처럼 학문의 개척자가 촌장이고 아인슈타인 하버마스 푸코처럼 그들의 뒤를 이어 자신의 분야를 일군 지식인이 일꾼이다. 한국 사상가 8명도 포함됐는데, 이황 이이 정약용 최한기는 촌장이고 신채호 함석헌 우장춘 석주명은 일꾼이다.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여러 학문의 종합적 이해를 시도한 점이다. 학문 영역의 장벽을 깨고 수렴, 통합, 통섭을 꾀했다. 2권에서 철학자로 나온 데카르트가 10권에서 자연과학자로 다시 등장하고 11권에서 인지심리학이 경제학의 패러다임 전환에 끼친 성과를 담은 것은 그런 의도에서다.

  1권 <진화론도 진화한다-다윈&페일리>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속에서 인간이 생명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보여주고, 문학, 철학, 경제학에서 응용되는 진화론의 현주소를 소개한다. 3권 <유학의 변신은 무죄-공자&맹자>에는 예(禮)를 통해 혼란을 극복하려 한 공자와, 내면의 인(仁)을 발견하라고 역설한 맹자가 나와 유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식정보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미래학자 토플러는 4권 <현대기술의 빛과 그림자-토플러&엘륄>에서 변화의 물결을 어서 타라고 주문하지만, 엘륄은 인간이 현대 기술의 하인으로 전락했다고 걱정한다.

  6권 <도(道)에 딴지 걸기-장자&노자>는 노자의 사상을 지배자를 위한 통치철학으로, 장자의 사상을 타인을 받아들이는 소통의 철학으로 구별한다. 8권 <우주의 대변인-세이건&호킹>에서 천재 과학자 호킹은 우주 탄생의 수수께끼를 풀어주고, 세이건은 대중의 눈높이로 우주 현상을 설명한다. 12권 <세계화의 두 얼굴-부르디외&기든스>에서는 적극적으로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한 부르디외와, 세계화가 가져오는 경제적 기회 및 능동적 복지를 확신하는 기든스가 논리 대결을 편다.

  13권 <아시아에서 과학하기-나가오카&유카와>는, 일본인은 기술자는 될지언정 과학자는 될 수 없다는 편견을 딛고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한 나가오카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를 등장시켜 세계 과학의 중심으로 진입한 일본의 사례를 보여준다. 15권 에는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생명공학 혁명의 출발점을 마련한 왓슨과 크릭의 성과가 들어있다. 최훈 강신주 손화철 박민아 조지형 등 저자들의 경쾌하고 깔끔한 문체가 책 읽기를 돕는다. 출판사와 함께 시리즈를 기획한 장대익 미국 터프츠대 방문연구원은 “지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호기심과 열정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머지 35권은 내년 6월말까지 출판된다.

박광희 기자

자료출처 : http://nadri.hankooki.com/lpage/weekzine/200611/wz2006112417292073280.htm(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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