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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 동물원부터 생츄어리까지, 사람과 동물이 마주 선 십 년의 기록
왕민철 지음 / 문예출판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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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을 따라 세상을 보면

가장 진실된 사실이 보이겠지만,

동시에 그의 시선에 담긴 의도대로 세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무엇을 더 미워하게 되거나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될까봐 두려워진다.

나에게 다큐멘터리의 매력은 그런 것이었다.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불편함도 같은 데 있었다.

감독의 시선, 감독의 의도, 감독의 가치관과 신념이

곧 나의 마음이 된다는 부담감.

 

왕민철 감독의 글은 그런 부담감을 떠넘기지 않는 신기한 글이다.

내가 처음 ‘생츄어리’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판단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슬프지만은 않은 기분과 비슷했다.

 

동물을 안타깝게, 불쌍히 여기거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이기에 언제든 가질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이기에 언제든 그 마음을 차순위로 미루고 미루다

‘중요한 것’에서 제외할 수도 있다.

 

나는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을 읽으면서

내 인생에서 함께하고, 고민하고, 살아가고, 고민했던

동물의 역사를 떠올려 볼 수 있었다.

 

*

 

나에게는 계절마다 다른 곤충이 튀어나오는 시골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이 있다. 산동네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밤에 우는 동물 소리가 달라지고,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달라지고, 풀벌레 소리가 바뀌고, 바람 소리, 풀과 나무의 소리가 달라진다. 계절마다 새로 나타나는 곤충을 잡으며 놀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나비나 잠자리 같은 곤충은 손으로 잡지 않게 된다. 손가락 땀에 젖은 곤충의 날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 가는 길에는 도롱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뱀허물을 발견하기도 했다. 완전 탈피한 뱀허물을 나뭇가지로 들어 길 한가운데 놓고 다음 친구가 놀라는 것을 보는 재미로 지각을 하기도 했다. 다리를 다치거나 날개를 다친 새를 발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둥지에서 떨어졌는지 어미가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아기새를 주운 적은 꽤 있었다. 근처 나무 둥치에 옮겨놓고, 어미새가 오는지 안 오는지 지켜보다가 아카시아 나무 냄새를 맡았다. 어미새가 오면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친구들과 서로의 입을 막았다.

아버지는 동물 다큐멘터리나 우주 다큐멘터리를 보다 잠들었다. 자기도 재미없어서 보다 잠들 거면서 왜 항상 다큐멘터리 채널을 틀어놓는 거지…… 어린 마음에 투정부리듯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빠져들어 화면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거대한 동물부터 미세한 포자의 세계까지 자연은 늘 경이로웠다. 새로운 동물 이름을 알게 되거나 귀여운 동물을 발견하면 꼭 이름을 외워두려고 했는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 이름은 전부 꿈속으로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우리 집엔 늘 강아지나 고양이가 있었는데(심지어는 오리가 와있던 적도 있다), 반려동물보다는 보호소의 입소한 외국인 병사 같은 느낌의 동물들이었다. 누군가가 못 키울 사정이 있다며 맡기거나 길에 버려졌던 것을 구하거나 길에서 사는 어미 동물이 버린 꼴찌를 데려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름을 지어주고, 좋아하는 사료나 과일을 먹이고, 수명대로 살다 갈 때까지 곁에 있었을 뿐. 그래서 반려동물이나 애완동물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귀여운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와는 달랐다. 우리 집에서 살다 간 동물들은 옷은 없었지만, 털이 예쁘고, 발톱이 단정한 친구들이었다.

어머니는 어릴 때 소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70을 앞두고 있는 어머니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육류(?)는 달걀이다. 나는 그런 어머니 손에 자랐기 때문에 ‘비건’의 개념이 낯설지 않았고, 내게 익숙한 음식은 ‘비건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건’이나 ‘동물 보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땐 내가 모르는 인간의 이면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물론... 반대로 동물 복지나 비건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기이한 세상이었다.

나는 양계장의 닭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안다. 병아리가 얼마나 귀여운지, 성체가 되기 전 닭의 청소년기가 얼마나 우스운지도 안다. 축산 및 도축의 방식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템플 그랜딘의 운동과 그의 책 읽기를 좋아한다.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펫로스 이후 10년 만에 키우는 강아지다. 여전히 육식을 하고, 몇 년에 한 번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 가기도 한다. 동물원이나 아쿠아리움에 다녀온 날은 죄책감 때문에 잠을 뒤척인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곰, 나뭇가지를 줍는 비버, 초원을 달리는 말, 정원의 물그릇에 모여든 새, 빙하 위의 북극곰 같은 동물을 떠올린다.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거리에 있으나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거리에 사는 동물. 나에게는 그것이 동물과 함께 사는 삶 같고, 자연 같다. 타고난 모습대로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사는 生. 동물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관여하지 않으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너무 많이 그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의 삶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 끼어들어 동물을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까.

우리 삶으로 연장되는 생각들을 잘 정돈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 삶도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동물들의 생활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살아있는 것들이 덜 상처 받고, 조금 더 편안히 살 수 있기를 비는 것뿐이지만.

 

동물원 안팎에서 왕민철 감독이 발견한 장면들은 ‘삶’ 그 자체다.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 또한 인간과 동물과 동물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이들과 카메라 바깥의 자신과 아버지와…… 모두를 포함한다.

부담스럽고 막연한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타자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저자의 글솜씨는 어마어마하다.

다큐멘터리와 별개로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머물렀던 2부 <동물원의 안>의 일부 내용과

메모를 옮겨 적으며 리뷰를 마친다.

 

*

 

“우리는 반순이의 죽음을 추모해야 하는 시대에 살게 됐습니다. 반순이는 그 시대까지 버텨 살아냈습니다. 이 추모는 이미 죽은 반순이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우리에게만 의미를 갖는 독백입니다. 지금 이 곰은 죽지만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반순이의 이십 년과 같은 삶을 이 공간에서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 전에 더 살 만한 이 삶을 살고, 더 아프기 전에 죽을 수 있는, 반순이가 누린 이 행운이 단지 시민단체의 사육곰 구조와 환경부가 던져준 일 억이 안겨준 행운이어서는 안 됩니다. 반순이는 의도치 않게 갇혀 있는 삶과 싸워왔습니다. 우리는 그 싸움을 함께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습니다. 반순이에게 여전히 남은 미안한 마음을 전합니다.”

-최태규 수의사의 반순이 추도사 中

 

“애초에 농장으로 오게 된 너의 어미는 어쩌면 새끼를 놓고 혼자 도망가지 못했을 수도 있고, 너의 아비는 알량한 한 줌 먹이에 자유를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잠시 코로나로 갇혀 있던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제야 조금은 너희들을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동안 동물원의 좁은 시멘트 바닥에서 무료한 삶을 살게 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발바닥이 조금은 덜 아린 흙바닥을 걷고 네가 만든 잠자리에서 고단한 하루를 위로했길 바란다. 잘 가라 반순아.”

-김정호 수의사의 반순이 추도사

 

“동물원에서 다루는 공식적인 서류에는 개체의 이름이 적히는 곳이 어디에도 없다. 종의 이름과 숫자가 적힐 뿐이다. 물범 두 마리가 죽고 두 마리가 새로 들어와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동물원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동물원의 동물은 항상 대체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물원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은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하니 물을 수도 없었다.

게르 지붕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소리만 요란했지, 비는 한 두 방울 떨어지는 정도다. 우리는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물범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수달사가 보였다. 수달사의 연못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범돌이, 범순이가 제주로 떠나던 날도 비가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책 본문 pp.156-167

 

+

우리가

동물원의 동물이 죽으면 슬프고 미안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갇혀 살게 한 것 때문일까

이름붙여 키웠기 때문일까

동물은 죽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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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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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르르 무너질 만큼 감정적인 글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많이 슬프지도 않을 것이며,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라고

내 멋대로 재단하며(실은 조금 겁을 먹었던 게 아닐까) 책을 폈다.

슬픔은 모두 제각각이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보다 내 슬픔이 더 클까 싶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지난여름에 세상을 떠난 가족과 남겨진 가족이 떠올라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음은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사실보다 더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로 뱉어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죽은 사람은 과거에 남아있고, 나머지 가족들은 자꾸 반대쪽으로 멀어진다.

 

그래서 ‘죽은’ 가족이, 저기 저쪽에 있다고.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것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말하지 못할수록 괴로움은 조용히 무거워진다.

 

죽음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며,

흐릿하고 기이한 현상이나 환상도 아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분명하고 명확한 사실이어서

오히려 뚜렷한 사실의 세계에서

내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애쓰게 되는 것,

그래서 현실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고통이다.

 

...

 

“그 어떤 삶의 극한에도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가게 된다”

 

작가는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랄 뿐이라는 사실을 예로 들어,

두 아들의 죽음과 남겨진 어머니(인 자신)의 살아감을 설명하고자 한다.

정원은 희망이나 재생의 비유가 아니고, 식물은 그저 자란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명징한 사실이자 현실인 ‘죽음’을 대할 때에는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살아가야 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완벽한’ ‘종결’이나 ‘종착점’으로 연결될 수 없다.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라듯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살아갈 뿐이다.

그리하여 ‘죽음’이란

산 자들의 삶 속에서 떠올려지고, 슬퍼하고, 기억하게 되는 ‘존재’ 같은 것.

 

커다란 슬픔 뒤에 애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저 우리는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았기에 살아지는 삶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서식지인 심연 속에 부러 슬픔의 자리를 배정하고 싶지 않다. 만약 슬픔이 그곳에서 자라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마치 제멋대로 피어나는 장미동자꽃이나 향기로운 제비꽃 또는 매발톱꽃처럼 자라날 것이다.” (pp.112-113)

 

 

(♧) 출판사로부터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은 서평단 참여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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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을 잇는 바다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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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의 도서 제공, 블라인드 서평단 참여 리뷰입니다.

 

이요하라 신의 작품집은 ‘처음’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되었는데,

도교 대학 대학원에서 이학 박사까지 수료한 과학자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특히 기대가 되었다.

『파랑을 잇는 바다』는 172회 나오키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소설집이다.

작가의 배경 때문인지 너무나 자연스럽게 SF소설이려나? 했던 나의 편협한 생각을 깨부수는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집.

 

읽는 내내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이야기인데, 왜 지루하거나 지겹지 않을까?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하고 있지만, 왜 어렵거나 불편하지 않을까? 같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바다의 물결에 몸을 내맡긴 듯 잔잔하게 흘러 흘러 마지막 작품까지 읽을 수 있는 독서 경험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문장력이 훌륭한 것일까 이야기가 아름다워서일까 궁금해졌다.

 

소설집에는 다섯 편의 작품이 있는데, 공통적으로 눈에 띈 것은 ‘지방’의 감각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모든 작품이 지역(지방)의 풍경과 환경, 삶의 방식과 역사/문화 등을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무대로 잘 녹여내고 있는데, 애정을 가지고 자료를 조사했다는 게 느껴진다. 덕분에 사건은 단순하지만, 이야기는 풍성하게 느껴진다. 지방의 역사적 사료를 활용함으로써 특색을 가지는데, 이 지점에서 최근 한국 단편 소설에서 느꼈던 아쉬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더 다양한 우리네 이야기를,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서울이나 도시나 청년/노년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계층적 위치만이 아니라 각자의 물리적 위치를 진심으로 감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역사적 사료/지역 특색/세분야의 전문 지식 등은 소설을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요하라 신의 작품집에서는 기본적으로 사건들이 소박한 미스테리~추리 소설처럼 흘러가기 때문에 흥미롭다. 아주 놀랍거나 충격적인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 밖의 발견을 통해 삶의 중요한 본질을 발견한다는 식의 이야기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 ‘발견’을 말하는 방식 또한 부담스럽지 않다. 마치 ‘갑자기 비가 왔다. 비가 그치고 나니 초록 식물들의 냄새가 평소보다 진하게 퍼져나갔다. 냄새를 따라 걷다 보니 어린 시절의 숲에 도착해 있었다.’ 같은 발견이다.

 

나는 한국 독자로서 일본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막연한 답답함이 있었는데, (느리고 집요하고 묵직하고 처연한 분위기 같은 것) 이 작품집은 어찌나 환하고 산뜻하던지! ‘さわやか’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관련된 요소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포인트.

 

개인적으로는 첫 작품 <꿈 빛깔 섬>과 표제작 <파랑을 잇는 바다>가 재미있고,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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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페페페
짐리원 지음 / 아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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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단 참여 리뷰입다.

우리에게는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시절과 장면이 있다.
요즘은 자꾸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면 무작정 들로 산으로
계곡으로 뛰쳐나갔던 10세 전후의 시절이 그립다.
그 산골마을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경험이었는지 깨닫는다.
유년의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 또한
나이듦의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짐리원의 첫 소설집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세계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흔한 sf와는 뭔가 다르다.
단순히 도시 생태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어울리는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가 사랑한 세계, 그래서 영영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세계.
2000년대와 2020년대의 서울....
외국어로 이름붙인 고층 아파트와 재개발로 버려진 동네,
오래된 아파트와 상가, 경비실, 초록옥상, 아기자기한 놀이터,
작은 운동장과 오리가 있는 학교 뒷마당,
밤이면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새벽이면 쓰레기차가 다니는,
자연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한강 옆 산책로가 이어지는...
그러니까 짐리원 작가의 첫 소설집은
'21세기 서울을 향한 세레나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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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의 진료실 - 소년원에서 만난 경계선 지능 장애 아이들의 진실
미야구치 코지 지음 / 그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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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인 화자는 의료 소년원에서 ‘가해자’로 처벌을 받은 소년범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그가 관심을 쏟는 대상은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동그란 케이크를 셋 혹은 다섯이 나눠 먹을 방법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의 진료실』은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 그리하여 세상에서 밀려나 범죄를 저지르게 된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이 아이들은 범죄를 저지른 나쁜 아이가 아니며, 이들에게도 기회는 있었을 수 있지 않냐는 시선. 작가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 우리를 순식간에 사건 현장 속으로 끌어들인다. 카메라로 찍은 화면을 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 묘사는 화자의 목소리를 날카롭게 벼려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무엇보다, 곁에서 도와줄 어른이 있냐”고.

이 사회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분노는 나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가 지나온 시간과 상관없이 앞으로 누군가가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되는 세상은 싫다.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방치하여 망가뜨리는 삶을 모르는 척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결국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도, 아르바이트를 해 가족을 돕는 아이들도,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도, 꿈을 꾸는 아이들도 모두 하나의 세상에서 살아간다. 나는 아이들에게 진료실이나 의사가 되어줄 수는 없지만, 너희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안다고, 그래서 기쁘고 기대한다고 말해줄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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