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실천이성비판 -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박정하 지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EBS BOOKS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간 : 2024/01/30 ~ 2024/01/31

난 이과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이과이다.

어렸을때부터 적성 테스트나 여러 성적 지표들을 보면 정말 이렇게까지 치우쳐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과 몰빵이였다.

결국 적성과 성적대로 진학하여 응용과학의 끝판왕격이라 할 수 있는 학문을 전공하고 그 이후 쭉 현직에 있는 내가, 적성과 성적과 전공과는 정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인문 기초학의 끝판왕격인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언제였던가.



중고등학교때 윤리 시간에 철학에 대해 조금 배운 이후로, 전혀 이쪽은 접하지 않고 있다가 약 10여년전 어느 소설을 보게 되면서 칸트와 철학에 대해 흥미가 약간(!!) 생겼다. 약간. 아주아주 약간.

그 책에 칸트가 등장하는데 위 내용처럼 쾨니히스베르크 교수 시절, 칸트는 매일 매일 정확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거리를 산책했다.

그러던 중 책의 주인공과 만나게 되는 장면이 너무 인상 깊어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 e-book으로 샀었던 그 소설은 매우 흡입력 있었고 재밌었으나 너무 세계사와 철학 등의 내용들이 많이 나오는 등 매우 덕후스러운 소설이였던지라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 류의 소설을 워낙에나 좋아해서 이 소설도 내 취향에 딱 알맞는 소설이였지만, 방대하고 어려운 내용에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몇번 더 시도를 해보고 세계사 공부를 꽤나 한 뒤에 다시 시도해보고 그랬지만, 항상 결국 칸트와 철학의 벽을 넘지 못하고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때부터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 언제고 꼭 칸트와 철학을 공부한 뒤에 저 책을 기필코 완독하고 말리라.'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못낸다는 핑계로 그동안 미뤄오던중, 이번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겨 고민 끝에 칸트 책을 보게 되었다.

사실은 내심 이 책이 집에 안오길 바라기도 했다.



내심 도착하지 않길 바라던 택배가 결국엔 도착하고야 말았고, 책장에 꽂아 놓은 채 애써 무시하다가 결국엔 남들 축구 볼 시간에 혼자 머리를 쥐어 뜯어 가며 이 책을 읽기 시작해버렸으니.

아니, 원래 EBS 책은 쉽게 나오기로 유명하지 않았나????

혹시 이 정도가 쉽게 쓰여진건가????

난 분명 한글을 읽고 있는데 내가 읽고 있는 이 모국어가 그저 활자로만 느껴질 뿐, 머리속에 들어와 외계어처럼 이해되지는 않는 이러한 생경한 경험은 또 간만인것 같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책에서 보는 것만큼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일수도 있다.

"자~ 이제 어제까지는 중세였고, 오늘부터는 근대야!"

..라고 누가 정해놓은것도 아니고, 어떻게 중세와 근대를 명확하게 구분한단 말인가.

지금에 와서야 세계사를 공부하는 입장이다보니 중세와 근대를 나눠서 공부하게 되고 차이점을 서로 비교해가며 르네상스를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츰 차츰 변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근대라는 세계관에서의 방점을 찍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으니, 철학 분야에서는 바로 이 칸트라 할 수 있다.

신이 중심이고 교회가 중심이던 사회에서 선은 결국 법 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사회적 이득을 위해 개인의 가치관이 축소되는 시기였으니만큼 개인의 자유 의지는 결국에는 신과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이 시기를 이야기할때마다 항상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을 무릎에 안아 슬프게 바라보는 성모 마리아.

아들 잃은 성모 마리아에게 비는 소원이 아침까지 무사히 잠자는 거라는 내용의 아베 마리아.

얼마나 힘든 세상이였으면 그랬을까.

이래도 기독교놈들아 니네가 그걸 종교라고 믿는게 맞는거냐?

아 갑자기 또 기독교 이야기가 나오니 울분이 터진다.

아무튼, 그런 변혁의 시대에 칸트는 기존의 철학론과 윤리론을 뒤집었다.

개인의 자유 의지를 더 이상 신과 종교라는 중세의 법 안에 국한 시키지 않고, 더 넓은 의미로 법을 뛰어 넘어 인간의 선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재료라고 보았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론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대해 설명하며 자신의 철학적 토대를 밝혔다면,

실천이성비판에서는 그러한 토대를 확장시켜 좀 더 당위성 있는 주장들을 펼치며 도덕적 세계에서 필요한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실 이게 내가 맞게 이해한지더 모르겠다. 나름대로 밤새 책도 읽어보고 유튜브들도 보면서 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건데 어떻게 글로 써야할지도 모르겠고, 모호하게 이해한것 같으면서도 막상 다시 생각해보면 뭔 소린지 이해되지 않는것도 같고.

어렵기 짝이 없다.

무언가를 위해서라는 조건을 붙이지 말고, 너의 자유 의지가 향하는 대로 선을 행하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무언가를 위해서, 혹은 어떤 요인으로부터의 특정한 경향에 의해서 선을 행하는 가언 명령은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로운 의지가 아니다.

무조건적인 명령이 바로 그 유명한 정언 명령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보편화의 가능성이 있어야하며,

또한, 인간을 단순한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그 자체의 인격으로 대하라는 소리이다.

신학을 전공했던 칸트가 보기에도 기독교적 중세가 얼마나 거시기했으면 저렇게 자유 의지를 부르짖으며 프랑스 혁명에 열광했을까.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이해했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1%나 될까 싶다.

인문학적 재능과 지식이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이 책도 기존에 내가 읽었던 여러 고전들처럼 곁에 두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다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 좀 더 눈이 틔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도서관에서도 좀 더 쉬운 칸트 해설 책들도 찾아봐야겠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칸트의실천이성비판

#박정하

#EBS한국교육방송공사

#칸트

#임마누엘칸트

#실천이성비판

#철학

#철학서

#북유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