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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의 마을 ㅣ 걷는사람 소설집 12
이정임 지음 / 걷는사람 / 2024년 1월
평점 :

이정임의 소설집 <도망자의 마을>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소설들을 색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회색이 적절할 것이다. 밝고 희망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고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저 힘겹게 버텨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2024년 지금의 현실을 적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감염병이 전세계를 할퀴고 지나가고 일상을 회복한지 불과 1년 남짓이 되었지만, 극심한 경기 침체와 국제 분쟁, 높은 실업률과 고령화 사회, 저출산, 세대 간 갈등 등 듣기만 해도 우울한 이슈들로 가득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이 소설은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학원강사였지만 코로나로 인한 폐업으로 실업자가 된 상태에서 산동네에 살며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를 돌보는 주인공의 신산한 이야기를 다룬 <오르내리>, 작가의 모습이 가장 많이 투영된 것처럼 보이는 귀가 얇아 여러 번 돈을 날리고 청소를 하며 어렵게 지내는 아버지와 등단한 작가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그래서 도서관 수필 강의에 매달리지만 그속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 특히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은주같은 사람을 보며 학창시절의 친구 지현을 떠올리는 <도망자의 마을>, 오랜 직장 생활에서 일에 치여 안면마비까지 와서 자신과 이름이 같은 동기의 시골집으로 피난하듯 쉬러 온 호양의 이야기를 다룬 <점점 작아지는>, <도망자의 마을>에 나온 작가와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투병하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이수안과 그 친구들이 함께 모여 달고나를 만드는 이야기를 다룬 <뽑기의 달인>, 친구 고무의 할머니가 사시던 집으로 이사들어와 고무와 동거하며 사는 무직자 호양과 그 집에 불쑥 찾아와 고함을 치며 일상을 파괴하는 치매 할머니의 이야기인 <벽, 난로>, 치매걸린 엄마를 돌보는 이선의 이야기인 <비로소, 사람>,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부산의 어느 산동네를 배경으로 세탁소를 하지만 아버지가 도박에 빠져 엄마 혼자 노동에 시달리는 '나'와 의처증이 있어 외지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마누라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를 피해 달리기하는 연희 엄마와 엄마가 안 계실 때면 동생을 돌봐야 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 연희의 이야기를 다룬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등 일곱 편의 이야기 중 <벽, 난로>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를 제외한 나머지 이야기는 부산을 배경으로 결혼 안한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벽, 난로>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를 포함해 어느 주인공도 현실에 만족하거나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헤쳐나가야 하는 현실, 즐기기 보다는 버텨야 하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적인 이야기에 현실이 답답하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이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라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