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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 ㅣ 푸른사상 산문선 53
권영민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12월
평점 :

벌써 30년 전이지만 국문학을 전공해 전공 과목 수업 특히 현대소설 관련 수업을 들을 때 과제를 준비하며 권영민 교수님의 평론을 많이 참고했었습니다. 그때 느낀 점은 글은 무척 딱딱했지만 예리한 분석으로 작품을 평하여, ‘문학 작품을 저렇게 분석해야 하는구나’라는 경외감 마저 들었습니다.
권영민 교수의 산문집 <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는 그저 문학평론가로만 알았던 그가 원래 소설가를 꿈꾸었으며, 우연한 기회에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입상하여 문학평론가가 되었음이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헐어진 목조 건물의 서까래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 소리가 솔바람에 고즈넉하게 절간 뜰 안에 가득하다. 산길 오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돌계단을 오르는 내 숨소리에 기척을 느낀다. 계단에 오르다가 돌아서 보면, 멀리 서해바다의 포구가 방조제로 막혀 바닷길을 잃었지만, 널다랗게 펼쳐진 호수는 싱싱한 물고기의 푸른 등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댓돌을 지나 감나무 위로 기어오른다. 한적한 절간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뒤꼍으로 둘러쳐 숲을 이룬 산죽(山竹)에 솔바람이 소란하다.”
p. 36 <선림사 가는 길>에서
선림사라는 고향인 충남 보령에 있는 조그마한 절에 어머니와 함께 오르며 본 풍경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입니다. 학창시절 평론을 읽으며 그저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문체가 사실 글의 성격에 따라 그에 적합한 문체였었고, 실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총 4부로 구성된 <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는 1부에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2부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 3부는 학창시절 이야기, 4부는 교수 겸 문학평론가가 된 비교적 최근 이야기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1부였습니다.
권 교수의 어머니는 평생을 일만하다 돌아가신 농촌 아낙이지만 감수성이 무척 풍부한 분이셨나 봅니다. 자식에게 안부전화를 하시면 항상 첫마디가 꽃소식이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얀 목련이 꽃대궐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와 할미꽃 이야기, 모란꽃, 능소화 이야기 등등.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권 교수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학원은커녕 중학교도 이십 리나 떨어졌고,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기차역까지 두 시간을 걷고 또 기차로 한 시간을 가야만 했던 궁벽한 시골마을 출신이 대학을 가고,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서울대학교를 가고 박사 학위까지 따서 모교의 교수로 재직한다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평생의 자랑이었을 것입니다.
“서울로 시험 보러 떠나고 난 뒤에 내가 꿈을 꾸었지. 동산에서 둥근달이 환하게 떠오른 꿈. 너무 달빛이 곱고 환해서 숨죽이고 달을 바라보다가 깨어보니 꿈이잖어. 아하, 이건 길몽이구나 하구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네.”
p. 55 <봄밤> 중에서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박사님’이라 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고향집에 찾아오면 소주와 주전부리를 잔뜩 사가지고 노인정에 아들을 앞세우고 가서 노인들이 ‘박사 아드님’ 치하하는 소리를 듣는 것을 즐기십니다.
권 교수는 어머니와의 추억으로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 어머니가 곱게 지어 입혀주신 한복 바리저고리와 남색 조끼를 입고 학교에 갔다가 ‘꼬마 신랑’이라 불린 이야기, 그리고 작가들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 너무 많아 연구실에 둘 수가 없어 고향집으로 보냈더니 어머니가 그간 모으신 용돈으로 책장 열 개를 사서 아랫방에 작은 서재를 만들어 아들 생각도 하고 가끔 집에 놀러오는 초등학교 선생들에게 책도 빌려주는 것을 낙으로 여기시는 이야기, 대학 4학년 때 자취방에 수북히 쌓인 책들을 꼽아두기 위해 어머니가 직접 목공소에서 맞춰주신 네 칸짜리 책꽂이 두 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여든아홉에 돌아가시는 장면을 담담히 묘사한 부분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제일 어른으로 동네의 ‘호랭이 어르신’으로 불리며 조선시대 양반 노인의 위엄을 지키신 할아버지. 하지만 손자를 위해 고염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여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리면 실컷 따먹으라고 하시고, 언니(형)를 따라 학교에 가고 싶어하는 손자를 서당에 보내주신 할아버지.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따끔하게 회초리를 때리셨지만, 손자가 초등학교에 진학하기도 전에 천자문을 떼자 마을을 업고 다니며 기뻐하신 할아버지. 이런 할아버지 덕에 권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한자 능력을 갖춰 어휘력을 키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의 환갑잔치 장면과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는 장면은 흡사 백석의 시 <여우난곬족>이 연상됩니다. 아직 전통이 남아 있었던 충청도 지방의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이 수필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주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할머니. 초등학교 4학년 때 <백범일지>를 사다주셔서 글읽기의 재미를 가르쳐주신 아버지. 어린 시절 다섯 살 어린 동생을 위해 봉숭아꽃 물을 들여주고 할아버지의 고집으로 중학교 진학을 못 했지만 동생이 빌려온 책을 읽으며 함께 책벌레가 되었고, 권 교수가 중학생 때 한내 한산 이씨 댁으로 시집간 마을에서 가장 이쁜 누님.
중학교 졸업할 무렵, 풍비박산난 집안 형편 때문에 고교 진학을 거의 포기한 권 교수를 설득해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시고, 삼십 년이 지난 후 서울대학교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 고마운 과학 선생님. 권 교수와 깊은 교분을 나눈 김윤식 교수와 그의 마음 속에 깊은 산으로 남은 백담사의 무산 스님 등 권영민 교수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과의 인연과 이에 얽힌 이야기를 읽다보니 권 교수는 인덕이 참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서정적인 수필을 읽게 되었습니다. <수선화 꽃망울이 벌어졌네>를 다 읽고 나니 비록 바깥은 매서운 북극 한파로 무척이나 춥지만 마음은 훈훈해 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정말 지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산문집입니다.
"헐어진 목조 건물의 서까래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 소리가 솔바람에 고즈넉하게 절간 뜰 안에 가득하다. 산길 오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돌계단을 오르는 내 숨소리에 기척을 느낀다. 계단에 오르다가 돌아서 보면, 멀리 서해바다의 포구가 방조제로 막혀 바닷길을 잃었지만, 널다랗게 펼쳐진 호수는 싱싱한 물고기의 푸른 등처럼 햇빛에 반짝인다.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댓돌을 지나 감나무 위로 기어오른다. 한적한 절간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면 뒤꼍으로 둘러쳐 숲을 이룬 산죽(山竹)에 솔바람이 소란하다."
p. 36 <선림사 가는 길>에서 - P36
"서울로 시험 보러 떠나고 난 뒤에 내가 꿈을 꾸었지. 동산에서 둥근달이 환하게 떠오른 꿈. 너무 달빛이 곱고 환해서 숨죽이고 달을 바라보다가 깨어보니 꿈이잖어. 아하, 이건 길몽이구나 하구 아무에게도 말을 못 했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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