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 오는 길 - 화가 남궁문의 산티아고 가는 길 - 가을 화가 남궁문의 산티아고 가는 길 계절별 시리즈 4
남궁문 지음 / 하우넥스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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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오는 길

 

남궁문/하우넥스트(2011.9.15)

 

스페인 북쪽을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가는 길’을 화가 남궁문은 네 번을 걸었다. 한 번을 걷는 것도 보통이 아니다. 그 길이 무려 최하 800킬로미터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을 계절 별로 걷고, 나머지 가을만큼은 아껴두었다가 맨 마지막에 걷는다. 그것도 거꾸로.

 

왜 거꾸로 걸으려고 했을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반추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늘상 걷던 길도 거꾸로 걸으면 보이는 게 다르고, 느낌도 다르게 다가온다는 걸. 그도 그랬다. 모두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소심한 마음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더욱 외롭기도 했다. 하지만 걸었던 길을 다시 거꾸로 걷는다는 건 분명 용기이며, 새로운 세계를 덧칠하는 화가의 작업과도 같은 것이다.

 

글을 읽는 내내 그가 부러웠다. 스페인 현지인과의 우정도 그랬고, 길을 걷다가 만나는 한국 사람과의 친분맺기 과정도 그랬다. 물론 고국에 돌아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음에 또 다른 마음의 짐이 되기도 했겠지만, 그에게 있어서 걷는다는 사실은 분명 커다란 깨달음의 연속선상에서의 환희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부러웠다. 왜냐 하면 나도 오래 전부터 그 길을 경외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길과 친해본 사람만이 갖고 있을 포스. 그리고 다르샤나의 품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의 경험들. 전편에 깔려 있는 화가적 시선에서 우러나오는 직관뿐 아니라 성 야곱이 걸었을 길이 주는 의미를 나도 한 번쯤은 느껴보고 싶어졌다. 아주 강렬히!

 

앙드레 부르통은 “걷기 예찬”에서 무수히 많은 자연과의 교감을 쏟아냈다. 내가 볼 때 화가 남궁문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왜 걸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에는 결코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늘 사람과 교감하고 따뜻한 자연, 따뜻한 가슴으로 바라보는 자연을 곁에 두고 있다.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하는 행동들은 오히려 극히 인간적이고 솔직했기에 성직자만큼이나 경건하고 높은 경지에 있는 깨달음 같기도 했다.

 

아침 창문 밖으로 드러난 세상이 어느 새 휘황찬란하게 바뀌어 있었다. 성추의 계절이 벌써 와 있었고, 밭에는 서리마저 앉아 있었다. 나는 또 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길 걷기가, 간혹 다이어트의 한 방법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길이 주는 연속성과 단절성, 그리고 길만이 가지고 있을 비밀스런 구석을 찾아 이 가을을 걷고 싶다. 낙엽을 밟으며 낙엽이 내는 소리와 낙엽이 마찰하며 일으키는 묘한 마른 잎 냄새가, 이 가을을 더욱 풍성하게 하지 않을까? 한 권의 책과 함께 가볍게 떠나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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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둔 천재 페렐만
마샤 게센 지음, 전대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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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둔 천재 페렐만

 

마샤 게센 지음/세종서적(2011. 6. 20)

 

전기문을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일대기를 나열하듯이 써내려가는 방법이 일반적이고, 글쓴이의 평가를 담은 평전, 그리고 이 책처럼 페렐만을 전혀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주변인의 시점으로 다양하게 전개해 나가는 방법 등이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한 천재 수학자를 다루면서도 전혀 그와의 대담이 없다. 오히려 주변 인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천재 페렐만이 어떤 인물인지를 유추 해석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그 점이 독특한 전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렐만을 수학의 세계로 이끌었던 엄마, 그리고 수학클럽의 스승 루크신, 그리고 잘갈레르, 콜모고르프, 알렉산드로프, 239호 학교, 그리고 소련의 체제. 끊임없는 감시와 독재가 있었기에 수학의 영혼은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많은 수호천사들이 페렐만을 도왔다. 루크신은 그를 수학 선수의 길로 인도했고, 리지크는 고등학교에서 그를 돌봤다. 잘갈레르는 대학교에서 그의 문제 풀이 솜시를 키워주면서, 그를 알렉산드로프와 부라고에게 인게하여 페렐만이 방해와 지장 없이 수학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라고는 페렐만을 그로모프에게 보냈고, 그로모프는 그를 세계로 이끌었다.(151쪽)

 

수학의 천재가 되는 길은 없다. 하지만 수학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도록 한 교육은 있었다. 페렐만을 천재로 만든 것은 수학 경시 대회였다고 본다. 어렸을 때부터 수학 경시 대회에 나가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게 훈련을 받았고, 모든 수학 분야를 다 섭렵한 뒤에 택한 위상수학의 길. 공간 개념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기에 그 길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고, 끊임없는 경쟁 구도 속에서 페렐만은 드디어 아무도 풀 것이라 예상 못했던 새천년 문제를 2년 만에 풀어버린다.

 

이러한 성과는 수학계에서는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다. 페렐만은 그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그가 추구하고 하는 바가 생기면 부단 없이 매진하다가도 그 일이 완성되면 이내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 이것이 때로는 이렇게 인류를 새로운 차원의 발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돌연변이 역할을 할 줄이야!

 

기하학의 천재 페렐만. 그가 그토록 파고들었던 위상수학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친절하게도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다.

 

위상수학은 173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수학 분야이다. 그때 그곳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기하학을 거리 측정의 부담에서 해방시켰다. (중략)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는 거리가 아니라 위치가 중요한 문제였고, 그런 문제들을 풀려고 오일러가 개발한 기법들은 새로운 수학 분야의 시초였다. 그는 그 분야를 “위치의 기하학”으로 명명했다.(185쪽)

 

위상수학의 최고 난이도의 문제라 할 수 있는 ‘푸앵카레 추측’에 대한 완벽한 증명을 해냈다면 그는 분명 천재다. 페렐만(애칭은 그리샤다)은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단박에 점령해 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예전에는 레닌그라드라고 불렀다)에서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고 있는 그리샤가 위대하다고 보기 전에 그가 왜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필즈상을 거부했는지, 그가 왜 100만 달러의 상금을 마다했는지, 그리고 그는 왜 수학을 포기하게 되었는지...저자는 상과 관련된 뒷이야기를 마치 취재기자의 긴박한 숨소리를 들려주듯이 빠르게 그리고 아주 정밀하게 내막을 밝혀나가고 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적어도 몇 개 정도의 개념은 맛이라도 보게 되었다. 위상수학이 대체로 어떤 것인가? 푸앵카페 추측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페렐만이 증명해 보인 3차원, 4차원의 공간적 기하학의 세계. 아스퍼거 증후군이란 어떤 것인가?

 

정말 책을 읽는 내내 수학적 긴박감이 계속되었다. 어떤 수학 문제를 풀 때보다도 더 숨막히고 박진감 넘치는 글의 전개가 맛깔스럽다. 뜨거운 태양열이 작열하는 해변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소나기처럼 주변을 맴돌 듯이 빙빙 돌던 고추잠자리가 바로 내 코앞에 앉아 있음을 알게 되기라도 하듯 천재 페렐만의 호흡은 나에게 이미 다가와 있었다.

 

그는 만날 수 없다. 저자나 나나 그 어떤 수학자라도.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샤가 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조그만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조용히 지내고 있는지. 그는 수학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아니 수학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자폐증 환자니까. 하지만 나는 추측할 수 있다. 푸앵카페 추측은 완벽하게 증명이 되었지만 이제 남은 문제는 없었는가? 아마도 그는 또 다른 문제를 놓고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그의 인생이니까.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해변, 바다에 들어가기 싫다면 이 책을 보시라. 한 번 읽지 말고 두 번 세 번을 보시라. 분명 수학이 아닌 다른 세계가 열림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니. 차후에 기회가 된다면 페렐만의 논문을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수학은 미적분에서 끝낸 사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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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 - 문자옥文字獄, 글 한 줄에 발목 잡힌 중국 지식인들의 역사
왕예린 지음, 이지은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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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 문자

왕예린 지음/ 애플북스(2010. 11.19)

문자나 글 때문에 화를 당하는 일을 ‘문자옥(文字獄)’이라 한다. 루쉰은 문자옥의 속성을 시로 표현하였다.

글을 쓰다 글의 덫에 빠지고, 세상에 저항하다 세속 인정과도 멀어지네
계속 헐뜯으면 뼈도 녹으니, 종이 위 소리만 공허하네.

중국에서 문자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 제나라 장공 때의 일이다. 문자옥의 피해자인 문인들은 비록 붓밖에 가진 것 없는 나약한 처지지만 죽음의 공포에 맞선 채 붓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광폭하고 무자비한 문자옥도 역사의 진실과 그것을 지키려는 문인들의 정신을 영원히 가둘 수는 없었다.(7쪽)

이 책은 방대한 중국 역사를 보기 쉽게 정리하고 자칫 어렵게 여겨질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을 재미있게 풀어 쓴 책이다. 또한 통사적 체계 속에서 각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의미 있는 문자옥들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가고 있다.

총 서른 가지의 에피소드 중에서 몇 가지만 간추려 본다. 먼저 진시황 때의 문자옥 사건.
진시황 때의 문자옥인 분서갱유는 악명이 높다. 사실 분서는 이사가 일으켰다. 사마천은 이사에 대한 평을 이렇게 내리고 있다.

이사와 주공, 소공 모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힘을 쓴 중신이다. 하지만 주공과 소공은 모
두 겸손하고 자신보다는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이사는 국록과 관직을 탐했 다.(17쪽)

분서의 목적은 사상의 통제, 갱유의 목적은 왕권 수호였다. 이 끔직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귀중한 자료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분서갱유를 일으킨 자들의 목적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나의 관심을 끈 문자옥은 주원장이 일으킨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일개 한량에 불과했다. 황제에 오른 주원장은 자신이 힘들게 닦은 기반이 오래 갈 수 있도록 네 가지의 조치를 취한다. 중앙집권제도, 지식인 탄압, 공신 제거, 지방 관리 통제 등이다.

뒤늦게 학문을 접한 주원장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자신의 얕은 지식을 척도로 삼아 수많은 인재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주원장의 무지로 인한 오해가 애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사건도 많았다. 그에 대한 칭찬도 그에게는 도전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능멸로 해석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원장의 이런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재능보다는 출신에 연연하던 당시의 지식인들을 향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끝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감옥을 많이 드나든 사람으로 꼽히는 이몽양의 경우를 보자. 그는 혈기 왕성하게도 국구인 장학령의 폭정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무종 때에도 이몽양은 유근의 죄악을 물어야 한다는 상주문을 쓰다가 비밀이 새어나가고 말았는데 강해라는 친구 덕분에 출옥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를 통제하는 기능으로 작용했던 ‘문자옥’의 기록. 황제의 권력과 지식인의 진실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싸움은 그래서 늘 이야깃거리가 된다. 왕예린의 <황제의 영혼을 훔친 금지 문자>는 그래서 중국 지식인들의 역사이자 인문학적 저항의 기록이며 정치 권력 구도를 미리 보여주는 훌륭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거센 빗줄기도 그치자 거친 폭염이 밀려왔다. 역사는 이렇게 왔다가 가는 계절과 같은 것일까? 한때의 권력도, 엄청난 용기도, 죽음도 불사한 정의도 이제는 한풀 꺾인 폭염 아래의 한갓 풀잎에 불과할 뿐인가. 3천 년 전에도 트위터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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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평생을 보낸 그녀들의 내밀한 역사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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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김종성 지음/역사의 아침(2011.6.27)

 

경복궁, 경희궁, 운현궁,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경운궁)... 조선시대의 궁궐에 갈 때마다 느낀 거지만 참으로 검박하고 생각보다는 넓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 칸 방도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면서 이곳에서만 생활하던 여인들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란 궁금증을 가지곤 했었다.

 

김종성의 <왕의 여자>는 이렇게 정해진 범위 내에서 생활해야만 했던 여인의 삶의 현장을 꼼꼼히 더듬고 있다. 그가 머리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들의 삶을 장희빈의 시각과 궤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궁녀-후궁-왕후 순으로 하나씩 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희빈은 누구보다도 이 모든 영역을 체득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격정적이고 역동적으로 궁궐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궁녀는 거의 공노비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사실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 숫자가 실제로는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만큼 왕과 주변의 인물들에 의한 역사의 휘말림 속에서 궁녀의 삶은 왜곡되고 잘못 전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궁녀의 조직과 품계, 궁녀의 역할이 흥미로운 분야였다. 지밀, 침방, 수방, 세수간, 생과방, 소주방, 세답방, 감찰궁녀, 보모상궁, 승은상궁, 색장나인, 본방나인 등에 대해 일일이 자세한 얘기를 전해준다. 더욱 흥미로웠던 부분은, 궁녀와 왕의 만남에 대한 얘기였는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그 만남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는 점이고, 궁녀의 적극적인 노력, 왕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한 만남 등을 다룸으로써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보아 왔던 인식들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궁녀는 동성애자가 많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19쪽에서 얻을 수 있다.

 

극소수의 궁녀들 사이에서만 동성애가 벌어진 것 같지는 않다. 조선 후기의 <영조실록>뿐 아니라 조선 전기의 <연산군일기>에서도 궁녀들의 동성애가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거론된 것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궁녀 중에서도 정치에 개입을 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도 있었다. 김개시는 광해군 때의 막후 실력자였다.

 

그가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이 세자였을 때부터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왕후의 배려 하에 광해군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승은상궁이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후궁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권력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막후에서 조종하는 데에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유사 궁녀에 대한 얘기도 흥미로웠다. 무수리, 비자, 방자, 의녀가 그들인데, 특히 방자는 방아이, 각방서리, 각심이로도 불렸는데 ‘방아이’를 뜻하며, ‘말단 일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136쪽)

 

후궁에 대해서도 매우 흥미로운 통계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역대 후궁의 총 수는 몇 명이었을까? 이것에 대한 답은 101명이다. 그러니까 왕 한 명당 3.7명의 후궁을 둔 셈이다.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임금은 성종이었다. 후궁이 전혀 없었던 왕도 있었는데 단종, 현종, 경종, 순종이 그들이다. 최초의 후궁은 태조 때 정경옹주였던 류준이었고, 최후의 후궁은 덕혜옹주를 낳은 고종 때의 양귀인이다. 왕후로 승격한 후궁도 있었는데,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성종 때의 정현왕후 윤씨, 중종의 첫 번째 왕후인 장경왕후, 그리고 숙종 때의 장희빈.

 

후궁의 성씨로는 김씨, 이씨, 박씨 순서로 많았는데, 김씨는 절대로 왕후가 될 수 없었다니 참으로 신기하다. 김씨의 금(金)과 왕의 성인 이(李)에 있는 나무 목(木)이 서로 상극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가 후궁이 됐다는 사실도 의아하다.

 

후궁 선발 과정에서 미모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새롭다.

 

미모는 후궁 선정에서 그다지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다. 왕들 중 몇몇이 여인의 미모에 반해 후궁을 선발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내면이나 능력 등을 보고 후궁을 선발했다. 장희빈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지나치게 예쁜 여성은 왕실 여인들은 물론 조정 관료들의 견제 때문에 후궁의 반열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188쪽)

 

왕후에 대한 통계도 참 재미있었다. 왕후를 많이 둔 왕은 누구였을까? 역대 왕후의 총 수는? 왕후를 한 명도 안 둔 왕도 있었다. 누굴까? 최초 및 최후의 왕후는? 쫓겨난 왕후는? 왕후의 성씨는? 등등 정말 알고 싶지 않은가?

 

왕후가 되는 길도 네 가지였다. 외부선정, 내부승진, 자동승격, 복합형 등. 그리고 왕후가 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예상을 깨고 금혼령이 내려지면, 사가에서는 오히려 왕후가 되는 걸 꺼려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얼마나 힘들고 걷기 어려운 길이었으면 그랬을까?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역시 왕후도 외모는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는 항목이 아니었다. 그만큼 왕후의 정치적 역할이 요즘의 영부인보다도 훨씬 크고 막강했다는 점이 놀라웠고, 얼마나 힘든 길이었는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침실에서의 생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하고 공적이었던 공간이라는 점이다.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는 공감을 가지게 하는 부분이다. 왕과 왕후는 그들만의 공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279쪽)

 

김종성의 <왕의 여자>는 참으로 많은 앎을 선사해 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을 깨기도 하고, 때로는 공감하게도 만든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전개는 다분히 엄청난 자료 수집의 노력 덕이 아닌가 싶다. 지은이 덕분에 나도 한때나마 궁궐 속을 함께 누볐다는 행복감에 젖기도 했지만, 이제는 사라진 궁궐의 삶을, 여유롭게 더듬어가며 그냥 빈 궁궐을 걷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왕의 여자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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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백동수 - 조선 최고의
이수광 지음 / 미루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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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무사 백동수








이수광 지음/ 미루북스(2011. 7. 4)



무사 백동수의 닉네임은 야뇌(野餒)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이덕무가 붙여준 이름이다. 뇌(餒)란 굶주린다는 뜻이므로 야뇌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들판에서 굶주린다’는 뜻이다.

백동수의 추천으로 입시를 한 이덕무에게 백동수에 대해 묻자,



“그는 속세 사람과 다릅니다. 천하를 주유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가 야뇌입니다.”

정조가 재차 야뇌가 무슨 말이냐고 묻자,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야인이라고, 말투가 질박하고 성실하며 행동거지가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뇌인이라고 합니다.”

라고 이덕무는 대답한다. (이하 270쪽)



이 닉네임은 백동수의 삶과 삶에 임하는 자세를 그대로 나타낸다.

포천 출생으로서 비인 현감과 박천 군수를 지낸 백동수는 서자 출신이다. 그의 자는 영숙이며, 성대중에 의할 것 같으면 그는 정조 시대의 ‘기남자’였다. 참된 우정과 의리를 보여준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과 교유하였으며, 사나이로서의 의리와 진한 우정을 보여준 무인이었다. 그만큼 그는 품성이 호방하였다. 아호도 잠재(천천히 나아간다), 야뇌, 인재(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등 몇 개가 있지만 그는 인재로 불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덕무와는 처남 매부지간이었고, 이덕무와 박제가를 박지원에게 소개한 이도 그였다. 그는 1771년 무과에 급제한 후 박지원과 함께 묘향산에서부터 가야산에 이르는 대장정에 오르고, 박지원에게 연암골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박지원의 호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박지원은 노론 출신 집안으로서 당시의 집권층이었지만 서얼출신들과의 교유를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백동수와도 상당한 교유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동수가 활동했던 시대는 정조의 시대였다. 이 점은 백동수가 ‘백탑파’의 일원으로서 많은 지식인들과 교유할 수 있는 최고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각사지 10층석탑(백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던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박지원 등은 홍대용을 만나 더욱 학문적 외연이 확장될 수 있었고, 홍국영, 정약용, 김정희를 만나 실제로 활발하게 ‘앙가주망’적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서자 출신의 꿈은 1800년의 정조 붕어와 함께 그 세를 잃고 말았다. 정조 집권 시기는 조선 후기의 역사 속에서 가장 커다란 기회와 아쉬움의 영역으로 남고 말았다.



백동수는 정조에 의해 장용영의 창검 초관으로 임명되었고, 장용위는 창덕궁 춘당대에 있는 정조의 최정예부대였던 것이므로, 그가 얼마나 정조의 신임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 정조의 명에 의해 이덕무와 유득공, 백동수는 함께 그림으로 설명한 군사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게 된다. 일,중,조선의 지상 무예 18가지와 마상 무예 6가지 등 무예 24반을 총망라한 이 책은 그간의 무술, 무예를 통합한 귀중한 사료이다.








백동수의 사랑방은 ‘초어정’(나무꾼과 어부처럼 살겠다는 뜻)이라 부른다. 이는 박제가가 15세 때 쓴 현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 무사의 계보는 김체건, 김광택, 백동수로 이어진다. 김체건은 조선 무예의 조사라 할 수 있는 인물이고, 김광택은 그의 아들로 금위영 교련관이었다. 김광택의 제자 백동수는 정조의 상무정신, 탕평책과 함께 정조를 가까이에서 보필한 무인이었다.



백동수에 대해서는 그간 김탁환의 소설들에서 간혹 보였었다. 방각본 살인사건,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같은 책에서 ‘백탑파’를 다루면서 백동수도 함께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백동수를 다룬 창작물은 이재헌이 쓰고 홍기우가 그린 만화 “야뇌 백동수”가 최초가 아닌가 한다.

물론 만화와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 다루는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만화가 무협의 날카로운 칼자국에 초점을 맞춘다면, 소설은 허구적 장치 속에 흥미가 될 만한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하여 보여준다. 따라서 이수광의 “무사 백동수”는 최초 여부를 떠나 그 나름대로의 작품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3인칭 객관적 시점의 완벽한 구사랄지 빠른 사건 전개에 따른 숨막히는 혈전은 아직도 선혈이 낭자한 살상 현장에 서 있는 듯한 간지럼을 남겨 놓고 있다.



게다가 팩션으로서의 호방한 터치는 생소한 무협 용어와 함께 더욱 그 맛깔스러움을 더한다. 백동수의 가는 길과 영조-사도세자-정조가 가는 길, 그리고 노론이 가는 길, 그 속에 수많은 갈등과 질곡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서얼 출신들, 그들의 이상과 야망, 그리고 현실이 빠른만큼 숨막이고 어지럽게 펼쳐진다.



드라마도 따라잡지 못할 사랑이야기는 더한층 나의 취기를 북돋은 듯했다. 일본 여무사 하향과의 비무, 그리고 그녀의 패배가 주는 의미, 매화계 나모란의 쌍검, 그리고 월도의 여인 유지연 등 출연하는 여자들마다 각기 다른 모습과 개성으로 그들만의 무기를 들고 그들은 화합하여 춤을 추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절대적 경지의 무예였다. 승부가 나든 안 나든 그것은 칼을 쥔 자만의 세계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료 수집과 해박한 역사 지식의 끝모를 경지를 계속 펼치는 이수광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청파계의 살의도, 수표교 아래의 거지 광문도 비록 지금은 조연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조의 개혁에의 꿈 프로젝트 범주 안에서 놀았던 주류였고 꽤 괜찮은 출연자였다.



서슬 퍼런 칼자국이 매 페이지마다 그어져 있는 걸 보면서 이젠 놀라지 않는다. 매운 더위도 야뇌 백동수와 함께 샤샤샥 소리없이 스러졌으면 좋겠다.

어디선가 백동수의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야마모토 무사시, 자네도 나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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