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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수필
최민자 지음 / 연암서가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손바닥 수필
최민자/연암서가(2012.3.30)
우리는 가끔 문을 열 때가 있다. 그 문이 눈앞에 보이는 물질로 만들어진 문일 수도 있고 눈 속에 잡혀 있는 문일 수도 있다.
최민자의 <손바닥 수필>은 나에게는 잔잔한 꽃과 나무와 향기로 이루어진 숲으로 난 문이며, 거침없는 바람이 만들어낸 해탈의 문 같기도 하다.
우리는 간혹 곱게 나이가 든 한 여자를 본다. 명동 거리에서건 길을 걷다가든 여행을 하다가. 여기의 작은 수필들은 곱게 늙은 한 여자의 작은 숨소리를 담았다. 곱디고운 목소리로 단장한 곰삭은 여인네의 작은 숨결. 그리고 낮은 목소리와 차분한 서정을.
그리하여 우리는 본다. 바람이 빚어낸 빛깔과 파도소리가 일구어낸 붉은 빛깔을.
제주 바다도 좋고 어디 시선이 가는 작은 골목이어도 좋다.
단지 시선이 머문 곳에는 언어로 변주된 사색의 아름다운 빗줄기가 놓이고, 옴짝달짝 못하게 하진 않지만 잔잔한 감동이 주는 파문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는 참으로 곱고도 도서관에 숨어 있을 만한 예쁜 단어들이 참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 아닐 지라도, 어느 퇴역 수필가의 제자스럽게 그는 한 톨 한 톨을 촘촘히 박아가는 재봉틀 달인 같기도 하다. 물론 언어의 달인이라는 말이다.
우듬지, 사특한, 윤슬, 갈모산방, 옥호, 방퉁이, 째마리, 물꽃, 물테, 집장, 브로슈어, 헝겊별, 메나리조, 발발성, 부름켜, 에움길, 빈지문, 자우룩이, 그루잠, 설환조, 눈새, 아마득하게, 계면조의 울음, 사시랑이 육신, 적바림해 둔 글귀들, 거스러미, 빈탕, 알심이 없는, 풀쐐기, 수크령, 막귀, 한뎃잠, 모노크롬의 비트, 기어의 죄, 중인환시리, 신닥다리의 세상, 슬로빙, 생게망게한, 어리보기도, 영혼의 몸피, 사개, 곰비임비,
정말 와닿은 단어만 해도 무궁무진하며 언어 구사가 엄청 자연스럽다. 따라서 그는 이미 시인이고 언어의 마술사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시인의 경지를 펼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에서 보이는 클래식과 같은 음악에 대한 조예, 라이혼트 메스너의 고비사막 이야기에서 보이는 교양미, 그리고 수많은 풀이름과 꽃이름, 나무이름.......
식물을 모르면 시인이 아닐진저. 비단 풀만 아니라 꽃과 나무까지도. 그것만이 아니다. 바람과 파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물체까지에도 의미를 담아내는 솜씨. 거기에 그녀 특유의 사유의 잔상들을 달아 놓는다.
마느래 얘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드는 느낌을 받고,
물을 볼 때는 가장자리를 먼저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중심으로, 중심으로 몰려들지만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야 동서남북이 몸으로 체감되는 법. 타종이 끝난 뒤 오래오래 그윽한 종소리처럼, 삶도 그렇게 느리게 또 둥글게 저물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117쪽)
에서는 삶의 희열을 등진 고요한 늦깎이의 혜안을,
눈이 아무리 밝아도 귀가 어두우면 윤똑똑이다.
매화 향기 같이 그윽한 것들은 귀로 들어야 제격이라는 말이다. “눈은 리얼리스트고 귀는 시인”이라는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말대로 이목구비 중 가장 정서적인 기관도 귀가 아닐까.(122쪽)
에서는 우리가 쉽게 흘려버릴 수 있는 요소에게 귀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다시 그녀는 트리움비라트의 ‘For You'를 듣고 미샤 마이스키와 클라라 하스킬을 생각한다. 나는 가히 그녀의 음악적 교양에 두 손을 들고 만다. 사실 내가 잘 아는 음악도 나오지만, 내가 모르는 음악에 대해 운운하는 사람을 보면 경이로움과 함께 존경심마저 들곤 한다.
다시 그녀가 시인이 이유,
지푸라기를 먹고 우유를 짜내는 소나, 간선도로 소음 속에서 순노랑 봄빛을 길어 올리는 개나리처럼 목숨의 저 안쪽, 컴컴한 지층을 탐사하여 반짝이는 별가루를 채탄해내는 시인들이야말로 내게는 경이로운 마술사들이다.
한 끼 밥값보다 헐한 시집을 팔아 수줍은 영혼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은 제각각의 언어로 발성하는 새들보다 더 다양한 운지법으로 세상을 클릭한다.(124쪽)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처럼 시인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녀의 내면에는 시의 잔물결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또 그녀가 건드리는 운명론에도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예감하고 계획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나다니엘 호손의 <데이비드 스완>처럼, 운명도 가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저 혼자 슬쩍 다녀가기도 한다.(127쪽)
그녀의 철학에 동감하는 대목은 또 있다.
그대가 먼저 풀어지고 허물어져야 남의 속도 편안하게 풀어줄 수 있다고.(131쪽)
이렇게 죽에 대해 얘기할 때면 ‘죽’이 마치 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나도 참 많이 필자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하여 끝내 나는 형광펜을 찾아 주옥같은 글귀에 대고 긋기 시작한다. 아마도 보석보다도 찬란한 생각의 연줄들을 따라가다 보니 다시금 되새기며 읽고 싶다는 은연중의 모색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아직도 되새김질하고 싶은 문장들이 떠오른다.
지구열차의 좌석은 역방향인가.
강물에 안긴 달이 바람에 들썩인다.
달은 가장 오래된 서버, 눈으로 클릭하는 첨단의 윈도우이다.(145쪽)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
교통사고는 나다녀야 일어나지만 사랑은 앉은 자리에서도 피할 수 없다. 단지 옆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벼락치듯 끌려드는 속수무책의 운명은 접촉사고 아닌 천재지변에 가깝다.(149쪽)
골목도 사람처럼 병들고 늙는다.(154쪽)
하나의 존재가 무너져내리는 소리는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날카롭거나 심오하지 않았고 무슨 울림 같은 것도 남기지 않았다.
꽃잎은 꽃잎의 무게로, 밤송이는 밤송이의 무게로,
존재는 다 제각각의 무게로 허공을 흔들며 내려앉는다.(156쪽)
이것이 시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은 시고 이것은 인생이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교양 덩어리들을 땄다. 하피즈의 <네 개의 단어만 아는 신>을 알게 되었고, ‘인체야말로 최상의 악기’라고 한 클리셰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신영옥과 카틀레야를 알게 되었고, “바다가 천개나 되는 젖가슴으로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라고 니체가 말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백의 <장진주>가 “황하의 근원이 하늘에 있고, 바다에 이르러 다시 오지 못한다.”로 시작함을 알았다. 나의 짧은 교양이 스스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 ‘서리 맞은 가을 잎이 이월 꽃보다 더 붉다’는 말도 있었구나!
스스로 명멸하는 늙은 자는 아무에게도 애원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지는가 보다. 교양도 철학도 문학도 모두 부질없는 것. 그저 제주에 부는 바람 같은 존재, 제주의 둘레길을 돌아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주 바다에 부는 바람만이 그 뜻을 알 듯이, 그녀는 하나의 상징만을 건져, 우리에게 빗대고 있을 뿐이다. 이 물극즉반의 논리를 알기까지 그녀는 무수히 많은 잔바람들을 맞아온 것일까?
나는 어느 새 트리움비라트의 ‘For You'를 검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