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평점 :
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연암서가(2011. 10. 25)
그를 생각하면 책만 보는 바보(看書痴) 검서관 이덕무가 생각난다. 책 하나를 허투루 읽지 않는달지 세계의 어떤 구석에 있는 저자라도, 그리고 웬만해선 모두가 인정하는 저자의 견해조차도 그의 스펙트럼 앞에서는 갈기갈기 찢겨 버린다.
‘비판적 독서’는 참으로 많이 쓰이는 용어다. 문장에 드러난 겉 의미뿐 아니라 속 내용까지도 속속들이 파헤쳐서,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읽는 지극히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책읽기다.
그는 ‘비판적 독서’의 전형을 보여주는 참된 지식인이었다.
그는 아마도 ‘아르카디아’에 가 있을 것이다. 아르카디아는 자연적 풍요의 개념에 도덕적 의미가 첨가된 이상사회다.(375쪽)
책을 읽는 내내 서문을 대신한 아내의 헌사가 따라다녔다. 눈물을 보이며 시작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책을 읽고 싶었다는 생각이 났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가 그것이다. 이제 그를 알았으니 기회가 되면 꼭 읽어봐야겠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미러 게임 같은 것이 아닐까?
서평을 하기 위해 읽는 책이 책을 읽고 쓴 서평이라니. 거울 속의 실체를 보기 위해 거울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그러나 그 반복되는 수많은 비침은 반복적으로 투영하는 생리를 보여주는 가운데, 알 수도 있을 법한, 도저히 모를 법한, 왔다리 갔다리 하는 속성 속에서 나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에움길’ ‘어섯눈’ ‘헌걸찬’ ‘고갱이’ 같은 단어를 새로 알게 된 것도 작지만 큰 수확이다. 그러니까 같은 서평이라 할지라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멋들어진 표현이 좋다는 것이고, 더 좋은 것은 책을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깊은 분석과 조망일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잘된 안내를 따라 더욱 의미 깊고 폭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득신과 같은 부류가 아님을 고백해야 한다. 아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함을 부끄러워했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과, 좋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의 차이 말고도 엄청나게 나와는 동떨어진 독서의 세계가 존재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읽은 책들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간혹 만나는 몇 권의 책만 가지고는 그의 사고 체계를 줄그어가며 따라가야 하지만, 아직은 김득신의 ‘억만재’ 신화를 믿을 수밖에는 없다. 머리가 나쁘면 억만 번이라도 읽어서 내 것으로 체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책에 투영된 단편적 지식을 따라가기조차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만큼 격차가 느껴지긴 하지만,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103쪽)이랄지, ‘실트’(129쪽) ‘간데라’(231쪽) 를 검색해 보고 싶어진달지,
프라우트 제도는 인도의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사카르가 제시한 대안 모델이다. ‘진보적 활용론’을 뜻하는 프라우트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지양한다. 그렇다고 ‘제3의 길’ 같은 노선은 아니다.(245쪽)
와 같은 글에서 나는 ‘프라우트’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알게 된다. 이렇듯 이 책은 책에 대한 소개뿐 아니라 우리에게 부족한 비타민을 시의 적절하게 투여할 의무가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전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세 권을 들고 그 책 속에 소개된 답사지를 따라 그대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왠지 모방하는 면이 석연치 않은 점도 있었지만 그때로서는 굉장히 많은 걸 배우고 깨달은 적이 있다. 이 책도 나에게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노마드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다. 여기에 소개된 책들만 따라간대도 나는 이미 간서치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와 나의 독서 편력이 거의 맞지 않은 덕분(?)에 공감하는 글도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깊은 끄덕임을 일으킨 문장이 있었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정보의 강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인용한 글이다.
“보다 많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실제의 지식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한다는 슬픈 미신이 널리 퍼져 있다. 산발적이며 서로 상관없는 사실들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주입된다.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는 사실을 보다 많이 주입받기 위해 소비되어 거의 생각할 틈조차 없다. 분명히 사실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허구적이다. 그러나 ‘정보’만으로는 정보가 없는 것만큼이나 사고에 장애가 된다.”(334쪽)
이 책을 읽으면서 감동과 느낌 대신에 늘 따라다닌 깊은 통찰에 대한 주눅이 이 인용구를 통해 조금은 누그러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도서관에 가 있을 저자가 보내 줄 다음 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