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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평점 :
카알 가아씨요. 카알 가아씨요.
복천 영감이 시원하게 소리를 쭉 뱉을 때부터 속이 시원했다. 토속적인 단어는 줄을 어찌나 잘 섰는지 맛깔나기 그지 없었고 신이 얼쑤 났다. 복천 영감이 골병이 들어가면서 칼을 갈기 시작했던 내력을 들려주었는데 그 한탄은 시골과 다르게 일일이 값을 매기는 매정한 서울의 세태로부터 시작 되었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옛말처럼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촌뜨기들은 기껏 훔쳐 온 밑천마저 이삼일만에 떼이기 일쑤였고, 복천 영감의 젊은 시절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쌀쌀해진 가을 바람따라 구르는 낙엽처럼 이렇게 저렇게 구르다가 칼갈이로 정착한 복천 영감이었다.
우렁차게 내뱉는 복천 영감의 소리를 듣고 같은 고향씨의 말이구나 반가워 그네를 붙잡은 사람이 바로 금자였다. 씨가 많은 가난한 집안에서 서울로 올 수 밖에 없었던 구구절절한 사연은 한달음에 내놓고 같은 말씨를 지닌 복천 영감을 그렇게 반가워했다. 금자만큼 반가움을 표했던 복천영감이었다. 몇날이 지나고 그 마을을 다시 돌면서 카알 가아씨요, 를 외치던 복천영감은 금자가 일하는 집을 기웃거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나중에 술집에서 일하게 된 금자를 다시 만났을 때 역시 눈 감고 코 베인 금자의 구슬픈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주인집 삼촌에게 성적으로 농락당하고 순결을 빼앗긴 금자가 결혼을 해 달라고 떼를 부리자 소문이 무서웠던 주인집에서는 그녀를 속인 채 결국 빚을 떠민채 술집에 보낸 것이다. 역시 고달픈 인생이었다.
복천 영감에 들러붙은 지독스러운 가난 이야기가 참 많다. 일찍이 아내의 병을 발견하지 못한 의사때문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아내와 가난한 환경 아래에서도 의젓하고 똑똑하게 자라는 딸애와 막내. 시골에 살 때 일찍감치 서울에 상경한다고 집을 떠나버린, 여지껏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큰애. 우연스럽게 도와 줄 수 있었던 며느리 삼고 싶은 복권 처녀. 서울에 상경한지 얼마 안되는 복천 영감네 가족을 도와 주던 떡 팔고 장사하는 내외. 그러다가 결국 연탄가스로 싱겁게 눈물나게 생을 마감한 친철했던 그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복천 영감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온 눈물을 펑펑 쏟으며 달려온 오누이는 이제 비렁뱅이로 살면 된다고. 아비가 비렁뱅이라고 자식까지 비렁뱅이는 아니라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서로의 울음을 나눈다. 조정래가 절절하게 전해준 시대의 아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