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르르 시인의 삶이 쏟아졌다. 나는 어느 것부터 정성들여 받아야 할지 몰라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그러다가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종이와 안 붙은 종이로 시인의 이야기가 나뉘었다. 감동 받은 이야기. 아닌 이야기. 시인이 떠돌이 길에서 주웠던 많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쪼개졌다. 내 마음에 들어온 허수경 시인은 아마도 그녀 그 자체와는 조금 다른 사람일 것 같다. 내 속에 있는 허수경 시인은 내가 공감한 이야기를 주워든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사람이다.

 

한 달 생활비(214쪽)
일단, 그녀는 부자다. 독일에서 한 달을 만 마르크가 넘는 돈으로 생활하는 학생이다.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녀는 세상의 참 많은 구석을 보았고 자기만의 세상을 축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그 많은 생각보따리를 어떻게 지고 다녔을지. 이 산문집을 통해서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그녀는 지금까지 또 수많은 생각을 차곡차곡 쌓았으리라. 이번에 나오는 신간 시집에도 그녀의 나머지 시간이 아름답게 담겨 있을 것이다. 묵직한 보따리를 그녀는 대학 도서관에서도 쌓아갔다. 독일의 대학 도서관에는 한 달에 만 마르크가 넘는 금액으로 책을 구비한다고 하는데, 그녀의 삶에선 도서관이 자신을 대신에서 책을 사고 그녀는 책을 읽으면 된다. 그녀의 한 달 생활비는 오래도록 풍족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76쪽) 우린 모두 사실은 신화적인 존재지요.
그녀는 태몽을, 즉 우리의 탄생을 알려준 것이 아름다운 짐승이거나 풀이나 열매이거나 오래된 우물이라는,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모두 신화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꿈으로부터 태어났다. 거기에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더하고 분명히 있을 누군가의 축복 속에 태어난 하나의 울음일 뿐이다. 허수경 시인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부터 태어났던 우리의 삶 자체를 곱게 서술했다. 덕분에 우리는 모두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하마 이야기(114쪽)
속삭이는 새들로부터 들었는지 그녀는 이따끔 자연세계에 놓인 이야기를 주워든다. 세상이 흘러가는 사이에 가끔씩 자연에 눈에 띄는 것처럼 갑작스런 그녀의 동물, 식물 등지의 이야기도 값지게 들린다. 대개 사람 사는 이야기보다 더 솔직하고 단선적인데 하마 이야기도 그랬다. 나도 하마는 헤엄을 무척 잘 치는 줄로 알았는데 아니란다. 먹이를 구하려고 깊은 물까지 들어가긴 하지만 하마는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걸어들어가고 걸어나온다고 했다. 즉, 물길보다는 땅길을 찾는 것이다. 그 뒤로 애처롭게 홍수가 났을 때 땅길을 찾지 못해 죽은 하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마에게까지 감정이입을 하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날틀(75쪽)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이야기까지 내 사유 주머니에 구멍이 났다. 구멍 너머에 있는 세상에 시인의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폭폭 쌓고 있었는데 그 세상이 생각보다 어마어마 했던 것.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은 다른 시인들의 산문집과 다르다. 간단하고 짧은 생각에도 오만가지 사건,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무릎을 탁 치게 되는 한마디로 정리된다. 날틀의 마지막 구절이 와닿았다. 삶의 조건을 넓히는 일은 죽음의 조건을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고.

 

죽음을 맞이하는 힘(119쪽)
그녀는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그녀가 이야기꾼이니 그녀에게로 세상의 이야기들이 찾아오는 것 같다. 죽음을 맞이하는 힘에서는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한 편의 에피소드를 전해준다. 사는 힘도 힘이지만 죽음으로 가는 힘도 힘인 것을. 할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바라는대로 돌아가셨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연히 많은 시인들의 산문집 몇 권을 보게 되었다. 손이 갔던 것도 아니고 책이 내게로 찾아온 것이 계기였다. 대개의 산문집이 하나의 어휘로부터 연상되는 시인의 단편적인 사유가 담겨 있었다. 일상이 담겨있기도 했고 내가 보기엔 조금 특별한 작가로서의 삶도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너무 재미있었고 도리어 작가의 사유로부터 나의 생각까지 솔직하게 살필 수 있어 좋았다. 모든 산문집이 그렇기에 특별했고, 허수경 시인의 ’길 모퉁이의 중국식당’은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고 더 넓은 작가의 생각과 깨달음을 배울 수 있었기에 더 값졌다.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어보지 못하고 산문집부터 보게되어 도리어 편견없이 책을 읽게 되었다 좋아했었는데, 산문집을 읽고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 편견에 사로잡힐까 걱정이 들었다. 허수경 시인이 글이라면 무조건 반해버릴 것 같기 때문.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말은, 글 드문드문 유쾌했던

그래서 어쩔건데?
시인의 넓은 세계관이 너무 풍요로웠다.     




덧.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앞뒤로 이병률 시집 '찬란'(문학과지성사, 2010)을 읽었다. 본 시집에 대해 해설을 하였던 허수경 시인의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고 색다르게 읽히는 마법에 걸린 순간 나는 이 기막힌 우연에 껌뻑 놀라고 말았다. 너무 반가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