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우리 시대 시인 80명이 찾아낸 가치
김남조 외 지음, 박영 그림 / 굿글로벌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물푸레나무를 넘어, 시(時)는 사계를 넘나들었다. 시인들이 찾아낸 두 글자의 키워드를 따라 세상의 작은 시선들을 쫓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시의 매력이었다. 時앗 나눔으로 발간된 ‘우리 시대 시인 80명이 찾아낸 키워드’는 80명의 시인들이 따뜻한 마음을 건네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시 한 토막과 그 시에 키워드를 담아 ‘열정, 사색’ 따위의 무책임한 단어를 보다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에는 시의 함의를 담은 듯한 그림 몇 점으로 온화하게 갤러리를 갖고 있었다. 시작도 끝도 아름다운, 하나의 마음 전시회였다.

 

 



이 시집은 우리 시대의 시인 80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50년대 등단한 시인부터 2000년대 등단한 시인까지 50년 이상의 시인 세대가 모두 모여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는 거침없이 참신한 저만의 문체로 쓰여 있었고 곳곳에 위트도 넘쳤다. 시를 모두 읽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키워드를 보고 시를 읽으면 시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일부나마 은은하게 전해왔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편하게만 가지면 되었다. 시인들의 ‘시’에 대한 열정을 잘 표현한 시로 권주열(2004년 《정신과표현》 등단)의 시가 있다.

 


낚시점을 지나며/권주열

 


한때 시에 미친적이 있다. 정말 미쳤다. 밥 먹다가, 똥누다가,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욱신대는 치통처럼 시만 생각했다. 그 시가 어느 날 강동 바닷가 간판마다 팽팽하게 적혀 있었다. 눈 비비고 다시 봐도 영남낚 시, 강동낚 시, 동해낚 시, 울산낚 시, 정자낚 시, 신명낚 시, 제일낚 시, 그 낚시점 낚싯줄에, 시가 바늘 끝을 물고 투명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키워드 : 몰입(한 가지 생각이나 일에 깊이 빠져듬)

 


그야말로 위트를 물이 통통 튀듯이 숨겨 놓았다. 그리고 시에의 ‘몰입’을 만끽하듯이 표현해 놓았다. 이 시를 보면서 아마 시대의 모든 시인들이 이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꼭 등단한 시인이 아니더라도 여느 누구는 시에 미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꼭 ‘시’가 아니어도 좋다. 이렇게 어떤 것에 몰입 될 수 있을 만큼 그 어떤 것을 좋아한다면 그는 이 시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은 분명하다. 시인의 재치는 이 시뿐만 아니라 다른 시에서도 많이 드러난다. 멋진 시의 바다 사이에서 위트를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새 구두/ 이상호

 


뒤뚱거리는 걸음 탓일까, 빌어먹을

구두점 하나도 제대로 못 찍었는데

어쩌자고 구두만 자꾸 헤어져

이젠 그만 제발 헤어지자고

더는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여기 저기 바람구멍을 낸다 (후략)

 


마치 유행하는 노래의 가사처럼 시인은 말의 재치를 이용했다. 이 시의 구절을 여느 랩 한 구절로 써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시인의 위트는 톡톡 튀었다. 나는 이러한 말의 위트덕분에 시집을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마음에 와 닿았던 시를 두 가지 꼽자면 바로 김남조 시인의 시와 김화순 시인의 시이다.

 


문/ 김남조

 


그들 먼 길을 갑니다


그간에 갖가지 일진과

여러 산하를 넘었습니다

그간에 누에 제 몸 헐어 풀어내는

명주 실타래를 동이 나고

바슥바슥 떨구는

모래시계 억만 모래 낟알도

동이 나고

그간에 크고 작은

출입문을 지났으며

마지막 출입문도 지났습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마지막 출입문도 지났습니다

그들 먼 길을 갑니다

언제 어디엔가 그 다다르는 곳에

다음 세상이 열리는

문 하나 더 있겠지요

*키워드 : 진리(변하지 않는 유일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물음표를 줍다/ 김화순

 

햇고사리 따러 간다

고무장화, 목장갑, 모자까지 눌러 쓰고

복장 꼼꼼히 챙긴다

어유포리 봄 산에 무수히 돋아난 ? 들

풀꽃과 나무들 한쪽으로 기울어

기우뚱, 생각이 골똘하다

? 만나려면 내 몸 한껏 굽어져

? 모양이 되어야 한다

정중하게 허리 구부리자

발치 아래 잡풀 속 푸른 ? 보인다

그래, 어차피 인생은 물음투성이다

햇살 퍼질수록 바구니에 수북이 쌍이는 서늘한 의문들

유난히 크고 작은 ? 들 무덤가에 흩어져있다

생전에 의혹만을 끌어안고 떠난 사람인가보다

? 하나하나 주운 자리에

명쾌한 대답이란 없는 것일까

*키워드 : 사색(이치를 따져 깊이 생각하는 상태)

 


시인의 깊이 있는 생각과 그를 표현한 하나하나의 참신한 어휘 조합 마술에 나는 어질어질한 키워드 여행을 잠시 다녀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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