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 죽지 마, 사랑할 거야 - 지상에서 보낸 딸과의 마지막 시간
김효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아, 이렇게 온종일 서연의 곁을 지켰던 적이 언제였던가. 단단히 걸치고 있는 사회적 외피를 다 벗어던지고 오로지 딸과 엄마라는 원형질로 다시 만났던 시간은. 어쩌면 영아기 이후 처음인지도 몰랐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우린 다시 그렇게 만난 것이다. (55p.)

딸과 어머니는, 그렇게 만났다. 이 때  오롯히 마주잡은 손만이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갑작스런 백혈병 진단으로 이제까지 해왔던 삶의 짐을 놓고 외롭게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서연과, 드라마 작가에서 한 딸의, 서연만을 위한 어머니가 되어야만 했던 김효선 작가는 외롭지만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하루조차 너무 소중하게 흘러갔다.  

 

내게도, 그들의 마주잡은 두 손이 아찔하게 공감이 될 뻔한 적이 있다. 불과 반년 전의 일이다. 언젠가 어머니가 내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밥은 할 줄 알지. 반찬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어. 응? 엄마 왜그래. 아니. 이제 한두 개쯤은 할 줄 알아야지. 휙하고 고개를 돌리는 어머니가 수상했던 순간이었다. 자꾸 무슨 일이냐고 캐묻는 나를 보고, 아니, 이모들이랑 잠시 여행 좀 다녀오려구. 정말? 얼마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을 얼버무리며 이어갔지만, 나는 걱정은 커녕 삶에 지친 어머니께서 이모들과 잠깐 여행을 다녀오신다는 점에 도리어 즐거웠다. 가끔은 어머니도 삶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깐.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여행이 어머니께 어떤 의미의 여행이 될지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어머니께선 방학을 맞아 알바를 구하려했던 내게, 알바를 하지 말라고 넌지시 일렀다. 왜? 아, 엄마가 오늘 오후 5시 쯤 누가 좋은 알바자리 소개시켜준다고 했거든. 기다려봐. 그 때 난 왜 몰랐을까. 오후 5시가, 그 시간이 어머니가 병원(두 번째로 건강검진을 가신다고 하셨을 때. 나라에서 나오는 건강검진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건강검진이 원래 두어번 쯤 가야하는 줄로만 알았다.)에 갔다가 나올 즈음이라는 것을. 마침 그날따라 어머니는 꽤나 수상했다. 학교가는 길에 어머니가 갈 병원이 있어 나도 태워줘, 하고 부탁을 하니 평소같으면 일부로라도 타고가 했을 어머니께서 미안해, 오늘은 버스타고가, 라고. 한동안 외갓집에 가 있을래. 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내게 던지기도 했다. 또, 한동안 집에 못 올 사람처럼 저녁에 빨래는 걷어놓고, 좀 개어서 넣어 놓아. 이건 어쩌구 저건 어쩌구. 그래도 난 어머니께서 아프다거나 이런 것은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그날 밤 어머니는 나갈 때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셨다. 함께 갔던 아버지의 표정도 굳어 있지 않았다. 평소에 모습과 다름 없어 바보같은 나는 엄마가 지난 날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눈을 뜨고 한참 엄마의 통화 소리를 듣고 나니,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한순간 몸이 뜨끈뜨끈한게 미열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난 사건의 전말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덜컥, 진짜로 그랬다면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나는 엄마 몰래 내내 늦잠 자는 척하면서 훌쩍 울음을 살짝 훔쳤다. 그 때 아줌마들의 긴 통화시간이 조금은 도움되었다.

 

그러니깐, 어머니는 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배 근처에서 암과 비슷한 무언가가 발견되어 정밀 검사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게 알바를 하지 말라고 했던 그날은, 정밀 검사를 다시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오후 5시면 바로 입원 치료를 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시간이었다. 다행히(정밀 검사 결과) 그 자국은 예전 엄마도 기억하지 못했던 어린날의 맹장 수술에 의해 피가 뭉쳤기(?) 때문인 것으로 판정되었고, 엄마의 홀로 마음고생은 조금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그 때 그 '싱거움'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예전에도 두 달 정도 병원에 입원을 하여, 외갓집에 맡겨진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엄마가 아프다는 건 아직도 어린애마냥 울음이 나는 일이었다.

 

그 때의 울음이 서연의 어머니가 울컥, 하고 말을 잊지 못할 때나, 너무나 울고 싶지만 그 울음을 홀로 꾹 참고 있을 때 대신 내 눈물로 펑펑 나왔다. 때문에 내 얼굴은 못난 눈물로 조금 밉상맞게 변해버렸다. 그래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이 닿았는지(어찌 닿을 수 있겠냐마는) 책의 한 쪽, 한 쪽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후 눈 앞의 거울과 눈을 닿았을 땐 나는 이 책을 나 홀로 그리고 집에서 읽기 시작하여 끝마쳤다는 데 무척 감사했다. 목이 따가울 정도로 울음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참을성이 없는 나는 서서로 앉아서도, 그리고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도 책을 읽었다. 가만히 누워서 책을 읽었을 땐 눈 앞에 창 밖으로 보이는 빛나는 파란 하늘이 그렇게 슬퍼보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녹색 잎 사이로 반짝이는 하얀 하늘이 병실에서 보이는 허무한 희망과 같아 보였다. 마지막 잎새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이렇게 아프던지 나 홀로가 되던지 하며 혼자만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무지막지하고도 나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책을 읽는 순간 나는 서연이 되어 창 밖을 바라보다가도, 서연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삶은 이토록 소중한 것인데. 문득, 이 소설을 읽고 흘린 나의 눈물을 조심스레 모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과연 서연이 참고 또 참아 마음속으로만 흘러내린 눈물의 강보다 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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