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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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물론 이는 내가 사흘에 걸쳐 느릿느릿 읽은 탓도 있겠지만, 이와는 별다른 문제였다. 세자 소현의 이야기는 아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그래서 나도 조심스럽게 그 날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래서 나는 누가 그만 읽어, 라고 한 것도 아닌데 소설을 마치 역사 드라마를 기다리는 양 슬쩍슬쩍 보았다. 그래서 '소현'은 여러 편의 이야기로 나뉘어 띄엄띄엄, 자신의 심정을 읊어나갔다. 나는 매번 소현의 다음 화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루는 세자였다. 구왕이 그걸 알았고, 세자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청의 살을 맞고 지금 볼모로 끌려가고 있으나, 세자는 이미 죽은 노루가 아니라 앞으로 죽어가야 할 노루였다. 그러니깐 아직은 살아 있는 노루인 것이다. … 세자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적의 화살뿐만 아니라, 적에게 살을 맞도록 내몬 조선의 몰이꾼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구왕은 이미 그 때 알고 있었을까."(37p)
 

 이처럼 세자 '소현'은 한 마리의 노루였다. 적의 화살뿐만 아니라, 제 나라의 몰이꾼 또한 조심해야 하는 한없이 불안한 노루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세자의 괴로운 심정과 심란한 마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소현은 어느 곳에서도 편안히 있을 수 없었다. 4년 만에 잠깐 오게 된 조국에서조차, 이미 세자를 세자로서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작가 김인숙은 334쪽에 달하는 이야기 내내, 소현의 안타까운 아픔을 절절히 읊어주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로 말이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언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원래 이 책을 읽고 싶었던 목적도 그것이었다. 작가가 소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솔직히 '소현'이란 인물에 대해 -책에 대한 예의도 없이- 난 아무 것도 모른 체 이 책을 읽어 나갔다. 그래서 처음엔 소현이 어떤 처지에 처했는지, 세자의 마음이 어떠한지,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누군지 파악하는 데 꽤 오래 걸렸다. 그냥, 작가의 문장에 매료되어 소설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난 소설을 읽는 내내 섬뜩하여 쉽게 소현의 이야기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왠지 소현 세자와 조금이라도 관여가 된다면 금세 내 목이 숭강, 하고 달아나 버릴 것 같았다. 섬뜩했다. 내 목숨은 하난데, 소현에겐 수만개의 목숨이 주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임금에 대한 '충'을 잘 모르는 내게도 자신이 고귀한 존재인 것을 힘들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너무 힘들었다. 고귀한 소현은 목숨을 위태롭게 연명하고 있었다.


"내가 쉬어야겠다……내가 이제 쉬어야 할 것이다……."(278p)


홀로된 소현의 간절한 마음을 보였다.
그리고 내 목은 소현의 목이 되었다가, 흔의 목이 되었다가, 막금의 목이 되었다가 하였다. 그렇게 내 목숨 또한 오갔다. 목숨이 오가는 이야기였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는 듯이 흰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260p)
 

그러니깐 나는 '소현'에서 묘사된 역사적 현실에 무작정 겁을 먹었던 것이다. 읽는 내내 내 가슴은 콩닥콩닥 했다. 내가 소현의 마음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그처럼 굳지 못하였다. 이렇게, 나는 작가의 언어로 '소현'을 읽고 있었다. 책의 모든 구절을 여기 옮기고 싶을 정도로 여운이 깊게 남았다. 또한 아직도 몸에 남아있는 이 여운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막 '소현'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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