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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0년 3월
평점 :
읽기에 아까운 책들이 간혹 있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겨 읽으면서, 줄어들고 있는 페이지가 마냥 아쉬운 책, 한 문장 한 문장을 계속 곱씹게 되는 그런 책 말이다. 박연준 작가님의 산문집, 소란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두고 두고 즐기다가 아주 나중에 그 느낀 바를 쓰고 싶은 책, 결국 의도적으로 더디 읽기보다 계속해서 여러 번 읽는 방편을 선택했다. 2회독 즈음 했을까, 이제야 나의 느낀 바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본업이 시인인 저자 박연준 작가님은 이번 개정판 서문에서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라 했다. 노련과 완숙 보다 그녀는 '어림'을 더 사랑하는 작가인 듯 보였다. 나이 들수록 우린 이 '어림'에서 떨어지려고, 피하거나 못본 척 하려들지만 사실 진짜 삶은 이 '어림'에 깃든 시절에 있는 게 아니냐고, 그녀는 말한다. 나 역시 점차 나이 들어가면서, 또 노인이 되어서도 놓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 중에, 이런 '어림'이 있다. 때론 유치하거나 해맑은 모습으로, 때론 괴팍하거나 졸렬한 모습으로 이 '어림'이 튀어나올지라도, 난 이 '어림'을 끝까지 놓고 싶지 않기에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 머리 속에 들어 있어 어떻게 근사하게 표현할까 고민하던 말들이, 그녀의 언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걸 읽는 기분. 책을 통해 엿 본 그녀는 달변가도 아니요,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가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문장에는 감히 흉내내기 힘든 힘이, 담기 힘든 진심이 베어있다. 내가 정의하는 '눈부신 재능'이 담긴 글의 아주 좋은 예시, 그녀의 글에선 범접할 수 없는 '눈부신 재능'의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서 그녀는 사랑과 일상, 시와 슬픔에 대해 노래한다. 특출날 것 없는 보편적 정서임에도, 그녀는 그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여백 없는 꽉 찬 연주를 들려주기도, 혹은 온통 가득한 여백 속 고요한 독주에 가만히 매진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나는 단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그녀의 글에는 그런 힘이 있다.
시를 읽는 이유가 뭘까. 이따금 생각할 때 있었다. 본디 시인인 그녀의 글을 통해 지레짐작해보건데, 구구절절 형용하여 설명하고 싶은 말들 중에 부연하고 싶은 말 몇 줌 덜고, 또 거기서 몇 웅큼 덜고 하다보면 진심을 담을 가장 근사한 단어들만 남게 되는 게 아닐까. 이 책에서도 그녀는 멀리 돌고 돌아 가지 않고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으로 가는 가장 최단거리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갑정을 설명하는 부연 대신, 감정을 담아낸 단어 그 자체를 쓰려 한 게 아닐까. 감히 넘겨짚어 본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 그리고 작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언어를 쉽게 믿지 않는다고 했다. 언어만큼 한계에 부딪히기 쉬운 게 없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무력감을 느낄 때가 많다며. 그런 그녀이기에 그녀의 글엔 특출나고도 비범한 뭔가가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이 가진 도구의 한계를 이미 아는 사람에게 남은 건, 그 한계를 뛰어 넘어야만 하는 부단함과 치열한 사투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어가 이토록 깊은 공감에 이를 수 있는 건, 이런 치열한 고민과 사투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보통 읽은 책에 대해 인상 깊은 몇 구절을 발퀘하곤 하지만, 이 책은 발췌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아예 발췌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 발췌가 아니라 원문 그 자체를 읽기를 바라는 마음과 발췌가 없더라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더 담고자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과 달리 내 문장은 투박하고 거칠며 비문 투성임에도, 하고자 하는 말에 진심을 담아내려는 노력만큼은 그녀와 경주하듯 부끄럽지 않은 독후감을 쓰고자 했다. 그저, 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보길 바란다. 그 마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