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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망자의 고백
야쿠마루 가쿠 지음, 이정민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7월
평점 :
누가 기미코와 후미코를 죽였는지 잊지 말 것
독서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은 책의 제목과 소재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머릿속으로 유추를 하곤 한다. 만약 자신의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는다면 짜릿함을 느끼며 그동안 투자해왔던 독서 깜냥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허영에 찬 자신의 추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색다르게 전개된다면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도망을 소재를 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대충이라도 줄거리를 유추하려면, 전제조건이 하나 충족되어야 한다. 부정적 문장에 주로 사용되는 '도망'이란 단어가 문맥 속에서 서로 톱니바퀴처럼 제대로 맞물려 유연해지기 위해선 '죄'가 있어야 한다.
죄.
죄의 성립요건은 다양하다. 먼저 집단이 정한 내부 규칙에 반하는 행동인 상대방 실체에 유무형의 충격을 가하는 경우, 규격화된 틀에 흠집을 내진 않았지만 비자발적 폭력 및 자해 등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육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힌 경우를 말한다.
자격요건의 충족으로 도망자가 되어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진 상처를 치유하려 하는 사람, 도망자.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1969년 일본 효고현 출신의 야쿠마루 가쿠 씨다. 그는 에도가와 란포상과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일본 추리작가협회 상 단편 부문상을 수상한 실력 있는 작가다. 특히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은 일본 아마존과 안국 전국 서점 베스트셀러를 석권하며 신드롬을 일으킨 전적이 있다.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이 책 '어느 도망자의 고백'의 영감을 얻었다. 야쿠마루 가쿠는 침대에 들려는 순간, 이 소설의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책을 쓰기 시작했다.
옮긴이는 일본의 주재원 전속 통역으로 근무하는 이정민 씨가 맡았다.
내 예측은 틀렸다. 그렇다 해서 작가에게 무한한 찬사를 보내지도 않았다.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명문 게이호쿠대생 마가키 쇼타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리와 기미코, 81세 할머니를 음주 뺑소니로 사망하게 한다. 그리고 경찰 조사 후 혐의가 입증되어 재판으로 4년 10개월의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이어 4년 10개월 형기를 마치고 마가키 쇼타는 출소하게 된다.
마가키 쇼타는 우리나라의 인서울을 노리는 입시생들처럼 명문 게이호쿠대를 가기 위해 공부에만 몰두한, 문제아라기보단 오히려 우등생 그리고 장차 엘리트가 될 예정인 인물이었다. 평범하고 소심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청년이었다. 하지만 과도하게 섭취한 알코올로 호르몬이 과욕을 부렸고, 우연과 필연이 겹친 사고가 준 두렵고 사나운 소름 끼치는 감각에 이성이란 브레이크는 고장 나 버렸다.
인간의 이성은 때론 멈춰버린다. 생각지도 않았던 낯선 대상과의 조우 시, 이전에 학습한 적이 없을 때 원활하던 프로그램은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 만약 마가키 쇼타가 이전에 유사한 경험을 겪었다면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겠지만 낯선 감정과 육감이 주는 소름 끼치는 쇼크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다시는 돌릴 수 없는 후회로 점철된 선택을.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에서 출소한 쇼타는 사회에 편입되려 노력하지만, 이미 자신의 위치를 절실히 깨닫고 있어서 자신이 지닌 카드조차 내밀지 못한다. 그는 예전에 그리던 미래의 선택지에 포함되지 못하던 밑바닥에 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된다. 이곳 악취나는 세계에서 자신은 영원한 이방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속했던 주소는 이미 말소되어 버렸다.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가족까지, 그리고 피해자 가족에게까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공허와 상실에서 고통받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이야기다. 이들 중 누군가는 친구와 가족, 연인에게 외면받아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기에 그들은 사랑과 보살핌으로 가족과 자신을 돌본다.

'어느 도망자의 고백'을 읽으면서 생각해 봤다. 과연 나라면, 내가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저런 생각과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그 안에는 사과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회피할 수 없을까, 이렇게 하면 내 혐의는 줄어들지 않을까...
누구나 사납고 무정한 돌풍이 불현듯 자신을 덮칠 수 있다. 피해자가 될 수도, 아니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뒤늦은 후회와 끝없는 자책으로 뒤를 향한 채 살아갈까 아니면 나로 인해 상처 입은 그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을까?
야쿠마루 가쿠의 '어느 도망자의 고백'은 아드레날린 결핍을 불러오는 스릴러나 액션은 없다. '도망'이란 단어는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린다. 다만 돌이킬 수 없는 그날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악몽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주인공과 주변 가족과 친구,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모습을 아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일본 사회의 특유의 선 긋기 문화와 끈끈한 가족애를 엿볼 수 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제 주관대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