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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이야기 - The Story of Modern & Contemporary Art
신일용 지음 / 밥북 / 2023년 11월
평점 :
대부분의 이들에게 현대미술은 불편하다. 신일용은 이 불편함을 덜어주려고 이 만화책을 만들었다.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인상파 그림이라고 하며,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린 사실화보다는 약간 변형한 인상파 그림에 재미와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러나, 극도로 신경질적인 뭉크 그림이나, 소변기를 가져다 놓고 미술이라고 한다든지, 포르말린 어항에 상어를 넣은 것 등을 보면 당황하고, 본심과 다른 얘기를 해야하는 것 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신일용은 이러한 불편함을 이해한다. 그도 우리와 같이 그러한 불편함을 가지고 출발하였던 것 같다.
미술에 관한 만화책이지만, 베토벤이 어느 악보에 써놓았다는 ‘Mus es sein?’(꼭 그래야 하나?)로 시작해서, ‘Mus es sein?’으로 끝난다. 그러고 보면, 신일용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mus es sein인 것 같다. 이 책은 선형적으로 가지 않고 소용돌이형으로 상승하며 범위를 넓혀간다. 역사적인 순서보다는 논리적인 흐름과 인과관계가 중요하다. 미래의 일이 복선으로 깔리기도 한다. 전작인 ‘동남아 이야기’에서처럼 이번에도 겉모습보다는 그 아래에서 흐르는 시대 정신 또는 역사적 배경을 캐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노는 거 같지만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방법인 거 같다. 흥분하지 않고, 휩쓸리지 않고 겉모습에 속지 않으면서, 종합적으로 맥락을 잘 잡아서 한 가닥만 당기면 나머지 것들이 저절로 생각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여러분들도 신일용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기 바란다. 더 이상 현대 미술에 불편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원칙 1은 쉽게 하자, 원칙 2는 군더더기가 없게 하자라고 한다. 그렇게 했다.
미술의 3번의 혁명을 거쳤다고 한다. 1차 혁명은 5백여년전 르네상스와 같이 시작되었다. 신에게서 해방되어 종교적이지 않은 대상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2차 혁명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미메시스(mimesis)에서 해방되었다. 3차 혁명은 아름다움에서 해방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대략 1960년 이후로 본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경제 또는 사회적인 변화와도 때를 같이 한다. 1차 혁명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와 같이 시작되었다. 2차혁명은 대부분의 선진국이 19세기 말 이후 소득이 급속도로 상승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모든 나라의 소득수준은 19세기까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하키 스틱 그래프라고 한다. 골프채 곡선이라고 해도 되는데, 헤드부분에서 갑자기 꺽이는 선이다.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정착되다가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이때 모더니즘이 시작되었다. 또한, 3차혁명인 포스트모던시대가 시작되는 1960년대는 2차대전후 베이비 붐이 끝나는 시기이며, 신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시작되고 공동체 의식이 축소되던 시기이다. 이 책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커머셜리즘으로 나뉜다.
1. 모더니즘(20C 초반)
귀족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사진술의 발달로 사실화가 설 땅이 좁아지고, 그림의 대상에 서민의 삶이 포함되었고, 주석 튜브가 발명되어 야외에서 유화를 그릴 수 있게 된 환경에서 인상파가 등장했다. 인상파는 향후 여러 갈래로 영향을 끼친다. 면의 형체를 중시하는 폴 세잔의 그림은 피카소의 큐비즘을, 원시의 색채를 사랑한 폴 고갱의 그림은 색채 혁명아 마티스의 야수파에 영향을 미쳤다. 그 변화의 순간순간에 우리가 자주 보아오던 그림들이 등장한다. 신일용 책이 주는 재미중에 하나는 그 그림들에 들어간 능청스러운 신일용의 위트를 즐기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ego의 등장이 중요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그런데, 각각의 생각은 다르고, 자기 생각을 크게 외치는 메니페스토의 시대이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의 중심이 미국으로 이동할 때, 미술도 그랬다. ‘아름다운 시대, 라벨르 에포끄’의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무도한 나치에게 밀려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구겐하임이 미술 수집의 중심이 되고, 그린버그가 미술 비평의 거두가 되었다. 그의 판단으로 아방가르드(전위부대, 고급 문화)와 키치(저급 문화, 이발소 그림)가 구분되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이 유럽에 가진 열등감, 미술계가 음악계에 가지던 열등감에 미술의 역사가 영향을 받는 것을 잘 표현하였다. 미술계의 알 카포네라고 할 수 있는 그린버스에게서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것은 잭슨 플록이며, Jack the Dripper(뿌리는 잭)으로 불리웠는데 이는 Jack the ripper(미국 서부시절 총잡이 ‘목 따는 잭’)의 패러디이다. 그린버그는 formalism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연이나 음악과 무관하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형체를 말한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칸트가 말하는 보편적인 감동을 줄 수 있으면 미술이다. 이 책에서 용어의 오역으로 아시아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을 지적한다. 앞서 큐비즘은 입체파의 ‘입체’와 관련이 없고, formalism은 형식주의라고 번역되었지만 형체주의라고 하는게 더 좋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2. 포스트모더니즘(1960~)
언어와 로고스간 위계질서의 파괴, 거대 담론의 파괴 등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을 설명하는데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대 철학이 동원된다. 신화백은 어려운 철학을 차용한 어려운 미술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미있게 풀어간다. 역시 그림은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좋은 거 같다. 남녀의 위계질서를 포커 카드에서 King과 Queen의 한끗 차이 순서로 풀어내는 것을 보고는 무릎을 치게 된다.
수많은 책에서 가장 액기스가 되는 명언들을 뽑아내어 일타강사처럼 설명한다. What you see is what you see, from purity to plurality, 작가주의 없는 minimalism, 모더니즘의 표현주의에서 포스트모던의 개념주의(conceptualism)의 차이 등등. 그런데, 개념미술은 뒷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된다고 하니 이렇게 만화책으로 이야기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백남준과 같이 플럭서스 운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 요셉 보이스의 한 그림은 3페이지를 할애해서 배경을 설명한다. 2차대전때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오지에서 추락했는데, 유목민들이 살려내었다. 이것을 말로 하면 매우 지루했었을 것이다.
3. 커머셜리즘
여기서는 ‘브랜드’가 큰 글자로 다가온다. 장 보들리야드가 폼재며 설명한 ‘기호적 가치’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같은 카르텔에 걸려서, 보통 사람들은 생각도 못 하는 가격으로 그림들이 팔리는 생태계를 조롱한다. 그 카르텔에는 갤러리, Saatchi(사치!)로 대표되는 콜렉터, 딜러, 경매, 아트 페어, 비엔날레, 도큐멘타, 뮤지엄 등이 포함되는데 이는 만화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수사관들이 칠판에 수없이 붙인 포스트잇과 연결된 선과 선으로 사건 개요를 파악하듯이... ‘좋은 미술이 비싼 게 아니라, 비싼 미술이 좋은 것이다’로 요약된다. 루브르나 구겐하임같은 뮤지엄도 유목민의 나라에 프랜차이즈로 생겨난단다. 맥도날드가 각 도시에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그야말로 ‘별 짓’을 다하는 재미있는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벽에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여놓은 작품이 어떻게 1억5천만원에 팔릴 수 있었을까? 그것을 낼름 집어먹은 이는 누구이며,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거대한 생태계를 신화백은 ‘거대한 주가 세력’이라고 일갈한다. 이른바 작전세력이 있고, 작전들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돈과 인기는 있지만 고상함이 필요한 셀럽들도 가담하고, 갖가지 노이즈 마케팅도 등장한다. 마네는 앞치마에 물감자국이 가득했지만, 현대의 미술가는 말끔하게 차린 세일즈 맨 또는 그림 생산을 지휘하는 공장장으로 그려진다.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용해서 여러 번 등장한다. (허울좋은?) 개념이 중요한 시대이므로 대신 그리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지 못 한다. 앞으로 chatGPT로 그린 그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해진다. 벌써 어느 미술전에서는 AI가 그린 그림이 상을 탔다고 하지 않는가?
언젠가 읽은 책 ‘혁명을 팝니다.’가 생각난다. 체 게바라의 파란만장한 스토리의 힘을 스타벅스 홍보에 사용하였다. 미술계에서 뿐만아니라 이제 모든 그럴듯한 스토리(텍스트)는 상품화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신화백이 소개한 일화 중에 얼굴없는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 얘기가 재미있다. 뱅크시가 그린 종이 그림이 경매에 붙여진 적이 있단다. 경매 낙찰 후 분쇄기 동작하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그 분쇄기가 중간에서 멈추어 일부만 분쇄가 되었다. 몇 년 후 그 그림의 가격은 18배로 뛴다. 어디까지가 작전이었을까?
책을 덮고 신화백이 얘기해준 미술의 커머셜리즘이 우리에게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Mus es sein? 내가 읽은 ‘모든 것이 가상이다’ ‘한계비용제로시대’에서는 디지털 시대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한다. 고흐의 해바라기의 진품은 수백억원에 팔리지만, 복제품은 거의 무료로 구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이다. 즉, 음악은 연주되고 사라지므로 소유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미술의 ‘진품 아우라’도 사라진다. ‘디지털 아우라’의 시대에는 소유(to-have)의 의미가 사라지고, 존재(to-be)가 중요해진다는 낙관론을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나아가, 게임을 즐기는 MZ들은 감성(to-feel)과 경험(to-experience)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누구나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기술이 급하게 바뀌고 있다. 메타버스는 이를 도울 것이다. NFT(Non-Fungible Token)는 이를 방해하는 도구일 수도 있고, 이를 도우는 도구가 될 수 도 있다. 미술가들은 시대를 앞서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ego를 감상하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보통 사람들의 ego 하나하나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베토벤이 그랬고, 신화백이 이 책을 쓰면서 그랬듯, 우리도 항상 이 말을 기억하며 힙하게 살아보자. Mus es se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