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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신학과 인문학이 만나다
오형국 지음 / 글과길 / 2022년 4월
평점 :
르네상스가 먼저일까? 종교개혁이 먼저일까? 이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사이에서 요즘으로 말하면 인기 최고의 유튜버 또는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는 칼뱅에 대한 얘기이다. 오형국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였다고 하는만큼 오목사가 오랜 시간을 두고 숙성시켜온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목사가 최근에 벌이고 있는 일을 보면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지난 2년간, 그가 활동하는 청년신학아카데미에서 매학기 여는 강의를 들었다. ‘일의 영성’ ‘공공선과 희년’, ‘한국사와 신학’, ‘기후위기와 일반은총’ 등등 기존의 교회에서는 가까이 하지 않는 주제들을 심도있게 다룬다. 그냥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토론도 한다. 약 500년전 칼뱅이 제네바에서 했던 일이다. 그 칼뱅이 교회사에 남는 큰 일을 해내었고, 아직도 그 영향력이 식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르네상스가 종교개혁보다 먼저였다. 이 책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 내가 전자공학과 교수라는 것으로 나의 무지를 이해해주기 바란다. 그런데, 내가 전공하고 있는 분야에서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심상치 않다. 인터넷 혁명, 제 4차 산업혁명, 메타버스의 시대 등등으로 불리우고 있는 일들은 14세기 이탈리아의 문학가나 교육자들이 시작한 르네상스를 닮았다. 르네상스는 예술에 영향을 미쳤을뿐아니라 사회제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것을 신학자들과 신부들이 이어받아 종교개혁을 이루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을텐데 로마 카톨릭 입장에서는 이단이었다. 이것을 청년신학아카데미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대형 교회에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심지어는 위험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뜬금없지만 메타버스와 관련된 글을 한번 읽어보자. “본캐(실제 자아) 중심의 심리적 위계질서가 사라짐에 따라 부캐(가상의 자아)는 더는 부차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메타버스에는 부캐가 필요하다.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준 새로운 인간관은 인간의 존재를 육체적이고 물리적 차원의 범위로 국한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인간의 정념과 창의성 역시 부캐 창조의 원천으로서 긍정적인 가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사실 위 글은 이 책에서 나온 다음 문장에서 명사만 몇 개 바꾼 것이다. “이성 중심의 심리적 위계질서가 사라짐에 따라 몸은 더는 비천한 경멸의 대상이 아니었다. 행동에는 몸이 필요하다. 새로운 전인적 인간관은 인간이 가진 악의 성향을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의 탓으로 돌리지 않을 가능성을 제공해 주었다. 인간의 정념 역시 행동의 원천으로서 긍정적인 가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나온 키케로의 얘기에서 몇 단어만 바꾸면, BTS의 얘기가 된다. “우리는 고백한다. 우리가 무슨 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대중음악가로서 그것은 음악 작업실에서 온 것이 아니라 아미(ARMY)들의 넓은 마당에서 온 것이다.” 나의 평행이론이 너무 억지스러운가?
마가복음 5장 13절을 보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소금은 음식재료들이 어우러져 맛을 낼 수 있게 하는 조미료이다. 설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칼뱅은 신학의 교리라는 재료들을 가지고, 인문학이라는 소금(intellectual solvent)으로 요리하여,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래서, 캘빈은 신학적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이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자와 뉘앙스가 다르다. 둘다 하나님의 형상을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런데,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들은 윤리나 덕성과 같이 비교적 말랑말랑한 주제를 다루는 반면에, 신학적 인문주의자들은 먹기에 단단한(히브리서 5:14) 신학적인 교리를 포함한다. 단단한 음식에 영양소가 고루고루 들어있고 오랫동안 건강을 지켜준다.
기후 위기 또는 메타버스 시대가 가져 올 충격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는 장성한 자라만 먹을 수 있는 단단한 음식을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칼뱅은 어려운 신학 교리라는 단단한 음식을 사람들에게 먹이기 위해, 그 시대의 메타버스였던 수사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원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었을텐데 예술가가 가지는 선지자적 열정으로 고도의 문학적 텍스트로 신학을 설명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다원주의와 비슷한 환경에서 당시 경쟁자들과 ‘수사학적 전투’를 벌이는데 사용되는 무기이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이 가지는 간결함, 설득력, 문학성과 닮았다.
이쯤되면 뉴노멀이 필요한 지금, 오목사가 이 책을 내는 이유가 짐작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더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이해하면, 인간을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속한 환경은 급속하게 바뀌고 있다. ‘부캐’의 정체성을 인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이를 어떻게 신학적 교리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인문학을 시녀가 아니라, 기사(cavalry)로 삼아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인류를 구출해야 한다. 그 기사에게 입혀줄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다. 이 시대의 패션으로...
르네상스 뒤엔 종교개혁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