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지 않는 생활 - 정리, 절약, 낭비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후데코 지음, 노경아 옮김 / 스노우폭스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랫동안 맥시멈라이프로 살았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고 싶어 했고 한번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을 놓지 못했다. 매년 이사를 해야 했던 시기에도 나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들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음에도 꾸역꾸역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그 모든 것들을 다 짊어지고 힘겹게 다녔던 게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현재 내 잔고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사고 봐야 했다. 특히 여행이라도 가게 되면 그때 가지고 있는 모든 현금을 다 기념품이라는 명목으로 다 사 왔었는데 사 와서 보면 내가 이런 걸 왜 샀을까 하며 결국에는 박스에 처박아두거나 안 쓰다가 썩거나 망가져 버리게 됐다.



그러다가 우연히 '미니멀라이프'를 만나게 됐다.

'미니멀라이프' 책들을 읽으면서 그동안의 나의 소비패턴부터 생활습관까지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많이 좋아진 지금까지도 대량 구매와 1+1, 다양한 할인 이벤트의 늪에서는 자유롭지 않다. 그래도 매번 정신 차리고 좀 더 냉정하게 구매할 때 사 두었을 때 수납공간과 사용 여부를 따지게 되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현명하게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다 싶이 쇼핑을 할 때 선택지도 다양해지고 무엇보다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이 참 쉽다. 몇 번의 검색과 클릭만으로도 빠르면 당일, 늦어도 2~3일 안에 집까지 빠르고 편리하게 배달까지 된다. 자신만의 확고한 쇼핑 습관과 규칙이 없다면 잠깐 정신을 놓는 사이에 내 통장을 위협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쇼핑 습관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예전부터 오프라인 쇼핑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유 없는 아이쇼핑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체력적으로 힘들어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온라인 쇼핑이 생겨났고 클릭 몇 번으로 너무나 쉽게 구매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도 자유로울 수 없는 배송료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쉽지 않다.



하루 한 개씩 버리기와 쓰레기 버리기는 항상 마음에 새겨놓고 있는 목표이지만 쉽지 않다. 오랫동안 버리기보다는 쌓아놓고 보관하는 거에 습관이 길들여져 있어서 이걸 과연 버려도 될지 매번 고민이 되고 매번 이렇게 고민을 하니 은근히 스트레스가 되어 자꾸 회피하려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래도 정리 정돈의 기본은 버리기라고 생각하면 열심히 나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선별해서 버리고 있다.




이 책 [사지 않는 생활]은 '사는' 습관에 중독된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무심코 물건을 사들이는 행동에서부터 물건에 대한 그릇된 소유욕까지 개인의 소비습관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으며 일렬의 과정을 통해 보다 더 '가벼워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준다. 평소 절제가 되지 않는 소비습관과 맥시멈라이프를 탈피해 심플라이프로 전향하고 싶은 분들께 추천하고픈 책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소비패턴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가계부 작성과 버리기에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어본 후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화채
대풍괄과 지음, 강은혜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장르를 안 가리고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편독을 하는 편이라서 만날 읽고 싶은 거만 읽으려고 하는 게 좀 있어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 쉽지 않은데 그래도 이런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누군가가 추천 제목이나 표지, 소개 글에 흥미를 느끼며 다양하게 읽으려 한다.

천추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은 나는 울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옥황상제가 날 속계로 내려보낸 건 나보고 천추를 괴롭히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천추가 날 괴롭히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예를 들면 지금 천추는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약을 한 모금도 삼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약사발을 들고 약을 한입 머금은 다음 선기를 넣을 때처럼 입에서 입으로 넣어줬다. 까놓고 말해서 이건 천추가 손해 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손해 보는 걸까?

명격성군 이 망할 노인네, 천추가 죽지 않는다는 건 말이야 쉽지!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했을 것이다. 관짝을 구해다가 묻어버리면 끝이니까. 그런데 죽는 대신 기절하고 침상에서 시름시름 앓으니 시중을 들어줘야 했다. 망할 영감, 능력 있으면 직접 와서 시중 한번 들어보든가.

감히 옥황상제를 욕할 수는 없어서 명격성군을 욕하며 분풀이를 했다. 망할 영감 욕 한마디하고, 천추에게 한입 먹이고, 곁눈질로 보니 방문 틈새와 창문 뒤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녀와 머슴 아이들이 훔쳐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왕부 사람들은 모두 날 불길한 별로 여겼지만, 오늘부터는 날 바라보는 아랫것들의 눈빛이 크게 달라졌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꾼인 나에 대한 탄복의 눈빛이었다.

-p.043

비릿한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짙어졌고 방 앞에는 요기가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어,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숨을 죽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붉은 빛 속에서 누군가 형문을 안고 서서 조그맣게 말했다. "선군을 본 후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밤낮으로 그리워했습니다. 저 같은 요괴가 선군을 만나면 죽음뿐이라는 걸 알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목숨을 구걸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바라옵건대……," 그러더니 혀끝으로 형문의 귓가를 가볍게 핥았다. "선군께서 제게 하룻밤 허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군께선 아시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묘하다는 그 일은 대체 어떤 즐거움일지요……."

이렇게 구구절절 듣는 동안 나는 잠자코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멍하니 놓아서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 양 끝이 비스듬히 올라간 아름다운 눈. 흰여우요괴였다.

몸에 걸친 하얀 도포는 앞섶이 활짝 열려 군살 없는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야말로 죽여줬다.

더 골 때리는 건 그게 수컷 여우라는 거였다.

-p.084~085

이번에 읽게 된 [도화채]는 선협 중국소설로, 일반 선협이 아닌 BL 선협이라는 장르였다.

선협소설은 201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장르소설로 동양 판타지인 무협소설을 기반으로 신선들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몇 년 전에 [삼생삼세 십리도화]와 중국 드라마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면서 신세계가 열렸다.

 

여우는 바람이 되어 사라졌고, 나의 끝나지 않은 말은 야경에 잠겼다.

본 선군이 도리를 논하는데도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형문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맨날 거저주워 신선이 된 거라고 나불거리더니 수행 방법에 대해서는 맞는 말만 한다?"

나는 우쭐해서 대꾸했다. "하늘에서 몇천 년을 지내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아. 털뭉치가 오늘 청군을 희롱하고 내게 한바탕 훈계를 들었으니 백팔십 년은 효과가 있을 거야." 모약언의 수발을 드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나는 여우가 흩트려 놓은 형문의 앞섶을 보고는 손을 뻗어 옷깃을 여며줬다. "난 청군의 곁에 수천 년을 있었고 요 며칠간 한 침상에서 자기까지 했는데,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 걸 털뭉치가 해버리다니 마음이 너무 아파."

형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럼 너랑 나랑 그 여우가 못 한 걸 해보면 어떨까?" 그러더니 옆에 바싹 다가와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댔다. 부드럽고도 따스한 입술이 갑자기 덮쳐와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얌전히 있자. 옥황상제와 명격성군이 지금 하늘 위에서 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어떤 일은 정신을 차린다 한들 마치 호수에 빠진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고 마는 법이다.

이런 행동에 익숙지 않은지 제멋대로 살짝 핥고 깨무는 형문이 갈수록 유혹적이었다. 참지 못한 나는 그의 몸을 꽉 껴안고 기선을 제압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은 깊은 못의 물 같아서 기꺼이 그 속에 빠지고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자 형문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불빛 아래서 윤기 나는 붉은 입술에 웃음기를 떠올리더니 갑자기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알고 보니 이런 즐거움이 있었네."

정말 죽여주는 한마디였다. 마음속에 그 여우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어 나는 혀로 그의 귓가를 살짝 핥았다. 품에 안은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다행히 바로 이때 다년간의 수련이 빛을 발했다.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 형문의 어깨를 잡고 손가락 세 마디쯤 밀어냈다.

형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이대로 가다간 주선대에 오를 거야."

형문은 뒤로 물러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네가 천추에게 그렇게 많이 선기를 불어넣었으니 진작 주선대로 끌려가 여덟 조각으로 잘렸겠지."

나는 묵묵히 냉차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p.088~089

천추의 두 눈은 가까이서 보면 가을 물처럼 맑았고, 남명의 두 눈은 멀리서 보면 민둥산처럼 보였다. 말할 수 없는 애처로움과 슬픔과 그리움과 기쁨, 사랑이 담긴 눈. 그리고 묵직한 그리움과 적나라한 정이 담긴 눈.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딱 그렇게 한 번. 선성릉은 변기통을 들고 무표정하게 뜰을 나섰다. 모약언은 침착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졌고 발걸음을 옮길 때는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형문이 말했다. "한 쌍의 원앙이 생이별을 당했으니 확실히 불쌍하긴 해."

내가 덧붙였다. "생이별시킨 장본인도 무척 악랄하고 말이지?"

형문이 하품을 했다. "남명제군은 널 탓할 자격 없어. 예전에 남명제군은 그 누구보다 악랄하게 생이별을 시켰으니까." 그러더니 곁눈질로 나를 흘끗거렸다. "청동과 지란의 일로 아직까지 앙금이 남은 거지?"

난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잊겠어."

-p.101~102

게다가 BL이라는 장르가 보편적인 장르가 아닌 마이너였는데 요즘 중국 선협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고 요 근래 제작되는 중국 드라마도 브로맨스라는 말로 살짝 바꿔서 나오곤 해서 막 낯설지는 않는다.

내가 알기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 BL선협소설이라 신기했다.

           

                                          

광운자, 나이는 아마 쉰을 넘지는 않고 마흔 줄일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쉰내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심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굉장히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턱 밑에 수염이 나 있었다. 아주 길고 살짝 끈적거렸다. 들어 올려서 살펴보려는데 마침 벌레 한 마리가 먹을거리를 찾는 듯 무성한 수염 사이를 누비는 모습이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꼴이었다.

형문이 허공에서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구린내 나는 더러운 도사라니 나보고 옆에 오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네가 깨끗이 씻으면 다시 올게." 그러더니 자취를 감췄다. 정말 이러기냐. 이 도사가 설마 이사명의 시체보다 훨씬 더러울까? 저번엔 관 옆에서 노래까지 할 기세더니, 지금은 또 왜 이래?

온몸이 근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목 뒤를 긁었더니 잿빛 때가 볼만하게 밀려나왔다. 튕기고, 뭉치고, 다시 튕기고, 아주 재밌었다.

-p.123

말하다 보니 목이 메었다. 그때 난 일곱 살이었고 많은 걸 알 나이였다. 당시 허 관사의 땅 방랑이 열두세 살의 어린 아가씨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그 누이를 무척 좋아해서 아버지에게 나중에 크면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늙은 도사의 몽둥이 한 대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그 도사의 불길한 입은 확실히 영험했다. 방랑은 열네 살에 상인 집안 아들과 혼인했고, 잔뜩 화가 난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어떻게 예전에 내가 계화꽃 떡과 천층병千層餠(얇은 반죽을 여러 겹으로 쌓아 만든 빵), 호두과자를 줬던 정을 저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방랑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게다가 제가 어찌 감히 도련님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나는 방랑을 태운 붉은 가마가 떠들썩하게 멀어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주도로 약혼을 한 적도 있었다. 상서의 딸이었는데, 매파는 여인의 외모가 꽃처럼 아름다운 데다 사주팔자와 관상이 나와 딱 맞아떨어진다며 하늘이 맺어준 한 쌍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녀는 셋째 왕야의 세자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어느 날 밤 보란 듯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

나는 다시 약혼했다. 이번에는 국구國舅(황후나 귀비의 남자 형제)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사촌오라비와 사통하여 도망쳤다. 그다음 약혼한 여인은 군왕가의 군주郡主(친왕의 딸)였는데 그녀는 황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보상으로 여동생을 나와 짝지어주려 했다. 하지만 그 여동생은 젊은 시랑侍郞(육부(六部)의 차관(次官))과 사사로이 정을 통해 회임까지 한 상태였다.

실망한 나는 기루를 전전하다가 한 기생에게 첫눈에 반했고, 하늘과 땅을 감동시킬 정도로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결국 가난뱅이 서생과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우연히 신선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할 복을 누리게 되었다.

늙은 도사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운명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문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알지, 알지. 네가 얼마나 힘들고 슬픈지 다 안다고. 수천 년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아. 단어라도 바꿔보지 그래? '영원히 외로운 난새'라는 말에 꽂혀서 내내 붙잡고 있잖아. 하늘의 신선인데도 사는 게 즐겁지 않아?"

"즐겁지. 다만 넌 태어날 때부터 신선이라 사랑이란 것의 대단함을 모를 뿐이야.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가 없어. 그게 아니라면 옆방의 천추와 남명이 어떻게 그 대단한 상군이란 자리도 버리고 지금 이 지경이 됐겠어."

형문은 찻잔을 돌리며 말했다. "어, 일리는 있네. 재미있네, 재미있어. 그 말을 옥황상제가 들었으면 분명 너한테 속세의 뿌리가 남아 있다며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냈을 거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또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살짝 후회하며 형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옥황상제가 듣는 건 둘째 치고, 그냥 아무렇게나 한 말이니까 너도 너무 재미 들리지 마. 시험해볼 사람을 찾을 생각도 말고."

형문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걱정 마. 옆에 있는 사람한테는 시험하지 않을 테니까."

-p.163~165

[도화채]에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신선들이 많이 나온다.

금지된 사랑을 나눈 벌로 속인으로 환생한 천추와 남명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둘을 힘들게 하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선계의 한량 중의 한량 신선인 주인공 송요가 인계로 내려오게 된다.

인계에 내려온 송요는 이미 인생이 꼬인 미인박명 춘추를 납치해 나름 열심히 옥황상제의 명을 이행하는데 처음에 쌀쌀맞기만 하고 벽만 치던 춘추가 송요를 대하는 게 미묘해지면서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긴 도끼 하나가 선성릉의 어깨를 힘껏 내리찍었다. 선혈이 모약언의 저택 담장에 튀었다. 담장 위에는 몸을 웅크린 스라소니의 조그만 그림자가 있었다.

순간 눈부신 번개가 담장 전체를 뒤덮었다. 구름 위에 서 있는 나는 하늘을 뚫고 올라오는 세찬 울부짖음을 들었다.

담장 위에 있던 스라소니의 형태가 점점 팽창하는 것처럼 보였다. 번개가 선성릉의 몸을 감싸더니 선성릉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으아악 하며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새까맣게 탄 시체가 우수수 땅으로 쓰러졌다.

울부짖는 소리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나는 거대한 짐승이 번개 속에서 선성릉 앞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짐승이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내가 구름 위에 멍하니 있을 때 형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산예雪狻猊…… 설산예였어!"

전설로 전해지는 그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영수靈獸 설산예?

천추를 붙잡고 있던 왼쪽 팔에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형문을 보며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모약언이 이미 구름 밑으로 몸을 날린 뒤였다.

갑작스러운 광풍이 몰아쳐 모약언은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나는 다급히 구름에서 뛰어내렸다가 느닷없이 선장에 부딪혀 세계 튕겨나갔다.

구름이 살포시 내 발밑을 받치더니 그림자 하나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네 법력으로는 설산예를 당해낼 수 없을 테니 내가 갈게." 그림자는 그 말을 남기고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형문을 외쳐 부르며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p.234~235

형문을 풀어주자 과연 얌전히 내 옆에 서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천추에게 말했다. "난 송요라고 한다. 옥황상제께서 광허원군이라는 봉호를 내려주셨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널 이쪽 형문 소선과 함께 속세를 경험시켜줄 것이다. 그 이유는 며칠 후 천궁으로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일단 지금은 나와 속세에 머무르자꾸나."

천추는 쌀쌀맞긴 해도 아이 때는 수려한 외모에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의 형문보다 다루기가 훨씬 쉬웠다. 천추는 그저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었다. 형문은 어릴 때부터 옥황상제와 서왕모의 손에 자랐고, 삼백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청군으로 봉해져 문서 업무를 담당하는 문사전을 주관하게 되었다. 천추는 태어날 때부터 천추성군이었으며 북두궁 중에서 품계가 가장 존귀했다. 그런데 천추가 어릴 때 이렇게나 온순했다니. 이렇게 얌전한 아이가 어떻게 커서는 찬바람이 쌩쌩 도는 천추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천추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속세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라 얼굴에 경련이 날 정도였다.

형문은 싱글싱글 웃으며 천추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난 형문이라고 해. 천추라고 불러도 돼? 너도 속세는 처음이야?" 천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북두궁에 살아? 천궁으로 돌아가면 놀러갈게."

천추는 기쁘게 대답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에 나이 든 나는 한쪽에 쭈그려 앉아, 파릇파릇한 형문과 천추가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제군이 내 앞에서 소매를 너풀거리며 춤추는 걸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후 나는 두 아이에게 속인들 앞에서는 신선의 흔적을 드러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아이들과 함께 머물 만한 마을로 갈 채비를 했다. 거기 머물러 있다가 천궁의 선사가 오면 천추는 윤회하러 가고, 형문은 계속해서 청군으로 살고, 나는 주선대에 오를 것이다.

구름을 띄우려는데 형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옆에 있는 풀숲을 보고 물었다. "저건 뭐예요?"

형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풀숲에 하얀 털뭉치가 쓰러져 있었다. 여우였다.

형문과 천추만 살피느라 여우는 신경 쓰지 못했는데, 벽화령군의 치료로 여우는 정신을 차렸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한 동안 어떻게든 일어나 도망가려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풀숲에 쓰러져버린 것이다.

형문이 풀숲으로 뛰어가 쪼그리고 앉아 풀을 헤쳤다. "하얀 여우예요. 왜 다쳤지?" 형문은 손을 뻗어 여우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우는 머리를 털 속에 파묻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천추도 옆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상처가 심하네." 형문이 풀숲에서 여우를 안아 들었다. 털뭉치는 잘 먹어서 통통했기에 어린아이가 안기에는 약간 버거웠다. 형문이 여우를 안고 말했다. "착하지, 착하지. 내가 데려가서 치료해줄게." 여우는 형문의 작은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감긴 눈에서 눈물이 스며 나왔다.

나는 털뭉치를 보며 길게 한숨을 토했다.

-p.242~244

얼떨결에 운발 게임에서 기가 막히게 당첨돼서 신선이 된 송요답게 그의 행보가 남다르다.

이런 송요의 임무를 돕기 위해 선계에서 능력 있고 인물 좋은 엄친아(?!) 신선이자 송요의 절친인 형문까지 내려와 송요의 곁에 함께하는데 분명 이미 점지되어 있는 운명이고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데 송요의 말처럼 알고 보니 천추와 남명의 벌이 아닌 송요의 몰래카메라 내지는 엿 먹이기인 듯, 근데 난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남 몰래 옥황상제를 씹으며(?!) 속으로 투덜거리는 송요 너무 귀엽다.

 

빚을 진 건 반드시 갚아야 했다. 나와 천추는 선계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명격성군은 천추가 두완명으로 살았던 생에서 내게 빚을 졌다고 했다. 그래서 천궁에 있을 때 날 보호하느라 갖은 고생을 했던 것이다. 형문에게 일편단심이었던 여우는 자신의 목숨과 천 년의 법력을 바쳤다. 형문은 여우에게 빚을 졌고, 지금 나는 또 천추에게 빚을 졌다.

알고 보니 내 모든 인연이 갚아야 할 빚에 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형문의 정해진 운명은 여우였다.

나는 으슥한 오솔길에서 휘청거리며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천궁에서 신선 노릇을 하며 수많은 신선들을 만나봤는데, 그해 속세에서 내게 점을 쳐준 사람이야말로 진짜 신선이었다.

나는 역시나 영원히 외로운 난새의 운명이었다.

내가 끼어들어 천명을 어지럽혔을 뿐 천추성군과 남명제군이야말로 서로 짝이 되어 빛날 운명이었다.

형문청군은 여우와 함께 정겁을 겪어야 할 숙명이었으며 결국 나로 인해 형문과 여우가 빚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각자에겐 각자의 인연이 있다. 나만 아무와도 인연이 없을 뿐.

나는 그저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속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할 숙명이었다. 연인을 갈라놓는 몽둥이가 아니라 강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였다.

-p.330~331

나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았다. "털뭉치, 좀 괜찮아?"

여우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옥황상제가 널 핍박하면서 형문청군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여우의 귀가 살짝 떨렸다.

"옥황상제가 네 가죽을 벗기고 뼈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형문을 좋아하지 못하게 만들면?"

여우의 얼굴에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또다시 귀만 살짝 떨었다.

아주 좋네.

"그럼 오늘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도록 해. 형문은 차를 연하게 마시는 걸 좋아해. 글을 쓸 때는 종종 붓을 필세筆洗(붓을 씻는 그릇)에 놓아두고 잊어버리곤 해. 술을 마실 때는 취할 때까지 마시니까 마음껏 마시도록 두지 마. 잠버릇은 딱히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어린잎으로 처음 우린 차를 꼭 마셔야해. 일단 공문을 보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니까 종종 밖으로 이끌어서 이곳저곳 거닐며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그의 책상 앞에는 육경이라는 신선이 있는데, 수시로 그에게 공문을 한 무더기씩 갖다주니까 절대로 상대하지마. 만약 동화제군, 벽화령군, 태백성군이 술 마시자고 찾아오면 주의하도록 해. 형문은 이것저것 잘 잃어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술자리가 끝나면 자리 주변에 깜빡 잊고 놓고 간 부채 같은 것이 있나 살펴봐. 형문은 단 음식은 잘 먹지 않아. 견과류도 소금에 구운 것만 먹지, 설탕절임은 안 먹어. 베개는 낮아야 하고 이불은 부드러워야 해. 찻물은 적당히 따뜻해야 하고."

여우는 앉아서 곤혹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봤다.

나는 여우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네가 형문의 곁을 잘 따라다녀야 해."

여우는 손바닥 밑에서 몸서리를 쳤다.

-p.335~336

인간이었을 때부터 누구와도 사랑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운명을 점지 받아 인연에 대해서 포기한 인간적인 신선 송요와 그의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형문, 그리고 남명과 천추의 인연까지.

이들의 얽히고 엮인 인연과 운명들을 따라가게 되는 [도화채]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대륙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원조 중의 원조 선협BL로 조회수 4억, 150만 부의 인기작이었다고 하는데 읽다 보니 그 인기의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형문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털을 털어낸 후 베개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봤다.

형문, 형문. 이거 알아? 수천 년 전 내가 처음 천궁에 올라가 널 봤을 때 넌 미원궁에서 막 나오던 길이었지. 비록 멀리서 뒷모습만 봤지만, 난 그때부터 널 좋아했어. 그때 넌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어서 나는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나중에 연못가에서 다시 만나자 넌 내 처소에 놀러 왔지. 그 후로 수천 년 동안 너랑 나는 친하게 지냈어. 하지만 난 네 곁에 있는데도 무척 멀게만 느껴졌고, 여전히 네게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속세에 있을 때 요상이 했던 말이 맞을 거야. 그때 난 사랑이 뭔지 전혀 몰랐으니까. 천궁에 올라오고 나서야 마침내 그 단어가 뜻하는 바를 알았지만 이미 쓸 수 없는 단어가 돼버렸어.

속세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난 충분히 얻었어. 수천 년 신선 생활은 이미 본전을 찾고도 남았지. 그저 다를 놓아주는 역할에 불과했다 해도 수지 타산이 잘 맞는 역할이었어.

난 내가 본분을 지키는 신선이 되어 천궁에 머물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 신선의 세월은 끝없이 길잖아. 서로 맞닿을 수 없다 해도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 있던 것만으로도 만족해.

지금 이렇게 널 보고 있어. 난 남에게 빚지지 않았고 너도 남에게 빚진 거 없어. 난 심지어 네 곁에 남을 인연조차도 없지만, 지금 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숙여 형문의 입술을 핥은 후 그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침상에서 뛰어내려 방을 빠져나갔다.

-p.339~340

읽으면서 매력쟁이 넘버원 캐릭터는 작가님의 최애 캐릭터이긴도 한 엄친아(?!) 신선 형문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정이 가고 세상 둘도 없이 짠하면서 착하고 귀여운 볼매는 역시 주인공인 송요였다.

진짜 읽으면서 계속 옥황상제의 빅 피처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건 송요구나 싶어 짠한데 꿋꿋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애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송요원군와 형문청군, 천추성군, 남명제군 이렇게 중요한 주조연 이외에도 천명부 기록을 담당하고 천명을 관장하는 신선 명격 성군과 송요들과 오랜 친분이 있는 희한한 동물들을 기르는 걸 좋아하는 벽화령군, 그리고 형문을 짝사랑하며 송요에게 털뭉치라고 불리는 신선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인 흰여우 요괴인 선리까지 여기 나오는 캐릭터들은 밉상(?!) 옥황상제 빼고는 하나같이 다 개성 있고 매력 있어서 한 권으로 보내기가 너무 아쉽다.

이런 선협물을 드라마 제작 잘 하는 중국에서 이 [도화채]도 꼭 드라마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끌리는 말투 호감 가는 말투 - 어떤 상황에서든 원하는 것을 얻는 말하기 법칙
리우난 지음, 박나영 옮김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나 그렇지만 '말 잘하는 법'은 나에게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한 바람 중 하나였다.

옛날에도 뼈저리게 느꼈던 거지만 자라서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진짜 말 한마디, 말 한마디가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게 하는지를 보게 되니 말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들을 한다.

같은 말이라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그리고 선조의 지혜처럼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어릴 때는 그냥 막연하게만 말이 그만큼 중요한 거구나 느꼈던 것이 여러 다양한 사람과 상황 속에 노출되면서 더욱더 와닿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관계는 쉬운 것 같지만 너무 어렵다. 특히 친분이 두터운 사이에서 거절하고 거절당하는 일은 서로를 난처하게 만들고 오해와 갈등의 축이 되곤 한다. 그래서 거절은 난이도가 높은 소통 방식이다. 직설적으로 거절하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를 사기 쉽다. 거절당한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불쾌감을 느껴 관계를 단절하기도 한다. 거절도 어려운데 이런 상황에서는 코너에 몰린 쥐 꼴로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 뒤 후회를 껴안기도 한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교묘하면서도 영리한 말하기 기술인 '완곡한 거절'법을 사용해보자. 상대의 이해를 구하면서 실망과 불쾌감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어렵게 거절하지만,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상대도 이 거절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해준다. 결과적으로 인간관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도록 만든다.

-p.17 '영리한 방법으로 거절하자'中

타고나길 이야기꾼으로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평범한 말하기를 구사할 것이다.

이 책의 작가님께서는 말하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닌 실생활에서 단련된 능력이라고 하셨다.

나 또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아 이렇게 열심히 말하는 법 책을 읽고 한 번에 고치긴 힘들지만 내가 모르는 법을 배우고 열심해 나가면서 말하는 법이 점차 나아지길 바라고 있다.

 

 

 

"좋은 말 한마디는 엄동설한에도 사람을 따스하게 하고, 나쁜 말은 삼복더위에도 사람을 춥게 만든다."

이 말은 언어가 인간관계에서 작용하는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저속하고 강한 말은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를 냉각시키지만, 부드러운 어조는 봄바람처럼 마음을 흔들어 조화롭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게 돕는다는 의미이다. 좋은 언어는 마음의 통로가 되어 굳게 닫힌 마음을 연다. 좋은 말의 사회적 역할은 이외에도 무궁무진하다.

-p.39 '좋은 말이 추위를 녹인다'中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그냥 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 직설적으로 말투나 단어를 고르지 않고 그대로 말해서 사람들을 상처 주곤 해서 말이라고 다 뱉고 보는 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말을 멈추던 게 이제는 버릇처럼 남았다.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해야 할 말조차 상대방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까 봐 머뭇거리게 되는 데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하면 같은 말이라도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고 내가 하고픈 말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뭐든 괜찮아요."라는 말은 상대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인적 선호나 취향을 물어올 때 "아무거나 다 괜찮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 예의 바른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결정을 상대에게 넘겨 상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며 상대의 어떤 결정이든지 따르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하지만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는 그 일이 오히려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상대가 당신 몫까지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자. 괜찮다는 말로 결정을 상대에게 넘기면 당신을 개성과 주관이 없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p.50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 않다'中

'제1장 교제 편'부터 다 내 얘기가 쏙쏙 들어있어서 이 책이 내 맞춤형인가 싶을 정도였다.

어떠한 의사결정 상황에서 나는 정말 안되는 거를 제외하곤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넘기곤 했다.

"뭐든 괜찮다"라는 말이 이 책에서처럼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며,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나를 주관 없는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됐다.

 

 

누구든지 실수를 범한다. 그 실수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과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체면과 자존심 문제로 먼저 사과하지 않는다. 민망하기에 변명이나 핑계로 일관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사과하면 상대에게 준 피해가 더 커지지 않게 막을 수 있다. 관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도 한다.

사과는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변명으로 모면하려 한다면 잘못을 바로잡는 기회와 상대에게 이해를 구하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반대로 체면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잘못을 성실하게 인정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 상대는 당신을 존중한다. 사과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사과는 결렬된 관계를 보완하고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관계가 개선된다. 사과는 인간관계의 슬기로운 보완조치인 것이다. 그러나 사과를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명심하자. 사과하는 법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사과의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다.

-p.53~54 '사과는 대인관계의 보완 조치이다'中

나는 우리 할머니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 할머니는 감사와 사과를 적절하게 나이가 어리든 많든 본인께서 생각하시기에 해야 할 때는 잘 해주시는 어른이시기 때문이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면서 나도 그렇지만 주위 어른들이 감사와 사과에 많이 인색하구나를 느낄 때가 많다.

특히 본인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을 상대로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자존심 때문인지 고집 때문인지 어물쩍 넘어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반면교사 삼곤 한다.

 

 

고집이 센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목적을 직설적으로 펴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최대한 충족하도록 상대가 이야기할 때 끼어들지 않아야 한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 그의 성격이나 관심사를 파악할 기회가 생긴다. 이는 설득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그가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설득에 성공할 수 있다.

-p.143 '비위를 맞추고 설득을 취하라'中

세상에 자기 생각이나 고집이 아예 없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싶다.

유독 더 자기만의 아집이나 편견 등에 휩싸여 고집불통으로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다른 때는 그냥 그런 사람들과 말을 안 섞으면 된다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꼭 그런 사람과 울며 겨자 먹기로 의견을 조율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결코 쉽지도 않고 말 한마디 섞고 나면 괜히 기분만 찝찝해지곤 한다.

이런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챕터인 '비위를 맞추고 설득을 취하라'라는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해 주는데 쉽지 않은 일들이지만 하나씩 가슴에 새기고 그런 분들과 대화할 때 시도해 보면 좋겠다.

 

사람을 설득하려면 반드시 감정 요소를 사용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얼마나 논리정연한지, 얼마나 많은 근거가 뒷받침되었는지 상관없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 어떤 의견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결정의 90% 이상이 감정에 좌우된다. 감정으로 먼저 잠재적 결정을 내린 후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행동을 취한다. 논리로만 사람을 설득하려면 당신이 이길 확률은 높지 않다. 위험한 사랑을 말릴 때 감정을 공유할 수 없기에 그 사랑의 무모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설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p.156 '감정에 호소하지 말고 감정을 나눠라'中

우리가 대화를 나누거나 말을 전달하는 상대, 혹은 상대들은 로봇이 아닌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로봇에게 무언가를 전달한다면 그에 맞는 팩트,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것들만 입력하면 되겠지만 감정이 있는 사람은 사실적이고 논리적인 것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다.

특히 상대방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논리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이 필요하다.

 

 

 

당신이 한 일에 대한 공격이 질문 형식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없으면 어쩔 뻔했어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신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을 했네요."

이런 논리도 없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당신은 침묵해서는 안 된다.

"지금 한 당신의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지 않나요?"

"이건 최상의 결과예요. 바보 같다는 생각을 어떤 근거로 한 거죠?"

이렇게 묻고 상대가 자기 말을 변론하면 그의 논리가 타당한지 따져야 한다. 당신이 어떠한 변호의 행동을 보여도 상대가 억지를 쓰면 곧바로 방어하며 화를 내자.

"말도 안 돼요. 당신은 편협한 생각에 빠져 있어요."

-p.60 '초점을 상대에게 옮겨라'中

 

불합리하고 부당한 상황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할 때가 많고 나중에 뒤돌아서 아, 그때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워하면서 후회한 적도 많다.

가족과의 대화에서, 친구와의 대화에서, 지인과 회사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거다.

말 섞어봤자 내 입만 아프지 하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뒤돌아 서곤 하는데 나중에 생각하면 그때 한 마디도 못하고, 또는 안 한 게 분해서 씩씩거릴 때도 많은데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이 챕터를 읽으면서 하게 됐다.

 

나는 말을 썩 조리 있거나 재치 있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이런 말 하는 법이나 스피치에 관한 책들을 읽곤 한다.

책을 읽는다고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이 유용하다.

내 말하는 방법을 점검하고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다양한 말하기 법을 당장 습득해서 바로 써 먹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변화 정도는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책 [끌리는 말투 호감 가는 말투]는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에서 장소와 상대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표현하는지를 담고 있어서 곁에 두고 한 번씩 꺼내 읽으며 도움을 받으면 참 좋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빠 일기장을 몰래 읽었습니다
김은진 지음 / 이다북스 / 2021년 3월
평점 :
품절


 나는 메모하는 걸 좋아한다.

꽤 어릴 때부터 다이어리를 사서 써 왔고 내 다이어리는 매년 한 권씩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 습관은 지금도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는 아빠에게 온 것으로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 아빠의 수첩과 펜, 그리고 전화를 하거나 혼자 계실 때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계신 아빠의 모습이 선명하다.

                                    

아빠 일기장이었다.

"와! 아빠가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오빠와 나는 오래된 일기장이 혹시라도 찢어질까 봐 조심조심 넘겨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몰랐던 아빠의 인생을 이렇게 마주하다니. 분명 우리 집에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은 이사하면서도 귀중하게 챙겨 놓았다는 건데…….

아빠가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주거나 언급한 일은 내 기억에 없었다. 아빠의 성격대로라면 어렸을 때부터 이 일기장을 수시로 보여주면서 과거 이야기를 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생각할수록 미스터리였다.

일기의 시작은 고등학생 때이고, 마지막 일기를 살펴보니 엄마와 결혼 전이다. 나의 아빠가 아닌 '인간 김종호'의 이야기. 아빠가 오롯이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던 그 시간이 이 한 권의 일기장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일기장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부슬부슬 온다.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아직은 학교생활에 익숙하질 못하다고 느낀다.

-1972년 3월 16일

오늘은 아침부터 마음이 뜨는 것 같다. 괜스레 기분이 좋다.

누구와 말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항상 이 상태를 유지했으면 한다.

나는 내성적이므로 말을 잘 안 한다. 그리 명랑하지 못하다.

누구 말대로 수양이 덜 된 모양이다.

-1972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냥 놀라고 신기했던 마음이 점점 요동쳤다. 아빠가 한 글자씩 일기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밤마다 일기장을 펼쳐서 자신의 마음을 적어 내려가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비밀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모습을. 글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읽을수록 눈물이 나서 제대로 끝까지 읽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아빠의 인생을 마주한다는 상황에 울컥했다.

-p.018~019 '아빠 일기장과 만난 날'中

어린 시절 아빠의 손을 많이 타면서 자라온 기억이 있어 아빠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

외모도 외탁보다는 친탁을 많이 한 편이고 아빠의 성격과 습관 등을 많이 닮았는데 그중에 아빠를 따라 자연스럽게 익힌 메모하는 습관은 지금도 아빠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어릴 적에는 수업의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종호스쿨'을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못해도 혼나지 않고 잘한다고 칭찬만 받는 애정 가득한 학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모의 사랑과 시간을 온몸으로 누렸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다가도 곧잘 뭉클하고 애틋해진다. 내가 만약 부모가 된다면 이렇게 내 온 에너지를 아이에게 바치면서 살 수 있을까? 내 시간에 대한 아쉬움 없이,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게 청춘의 한 시절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까? 아직은 자신이 없다.

-p.031~032 '웰컴 투 종호스쿨'中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블로거를 활동할 수 있는 것도 이 습관에 기인한다.

손으로만 쓰고 나 혼자만 쓰는 다이어리에서 발전한 게 이 블로그라고 할 수 있다.

아빠에서 오빠와 나에게 이어진 기록하는 습관은 우리 남매에게 어릴 때부터 자연스러웠던 것 중 하나였는데 성장하면서 어른이 되고 나서 이 습관이 생각보다 내 일상에 도움이 되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사실 나는 아빠처럼 돈에 대한 큰 상처나 서러움은 없다. 기껏해야 갖고 싶은 걸 마음대로 사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비싼 음식점 앞에서 고민하는 정도의 사사로운 일들이다.

아빠와는 다르게 돈에 사무친 기억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아빠가 이루어 놓은 기본값 덕분이다. 알뜰살뜰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산 내 부모 덕분이라는 걸 안다. 자식들 밥 굶지 않게 살고, 배우고 싶은 것을 돈 걱정 없이 배우게 하는 것이 목표였던 삶. 아빠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에 나는 그 앞을 출발선 삼아 시작할 수 있었던 거니까.

"엄마 아빠 노후는 걱정하지 말고, 너희만 신경 쓰면 돼. 너희 앞가림만 잘 하면 된다."

아빠는 지금도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안심되다가도 미안하기도 하다. 아빠는 자신이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부지런히 돈을 아끼고 모아둔다.

-p.060~061 '돈과 상처'中

어릴 때는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아빠를 엄청 좋아하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 아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거보다 아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특히 나는 10대부터 지금까지 일찍 따로 나와 살면서 아빠와 함께 산 시간보다 혼자 떨어져서 살았던 시간이 훨씬 더 길어서 아빠가 좋아하는 색깔이나 음식, 취향 등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자신의 삶을 글로, 그리고 책으로 엮고 싶은 마음이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으니까. 그래서 이 구절을 보고 아빠가 정말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있었구나, 꽤 진지하게 글에 대한 마음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재미난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이미 독립출판물을 두 번 만들어 본 경험이 있으니, 아빠 일기를 그대로 옮겨 책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자신의 일기가 담긴 책을 받아보면, 자서전은 아니라도 아빠 인생의 한 시절이 담긴 책을 손에 쥘 수 있으리라. 소규모로 100권 정도만 제작해서 주변에 선물도 하고, 독립책방에 입고해서 판매해보는 경험을 아빠도 해보면 일상에 새로운 활력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60대가 분명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아깝고 아쉬우니까. 아빠의 단조로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아빠 일기장을 처음 발견했던 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글쓰기 모임에 가져갔다. 모두가 생각보다 재미있다며 계속 써보라고 했다. 아빠 일기장으로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소박한 계획은 예상하지 못하게 아빠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흘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내가 쓰는 아빠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빠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도 생겼으면 좋겠다. 자판을 누르기에는 불편한 손이지만, 독수리 타법으로라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는 있으니까.

-p.098~099 '인생작을 기대합니다'中

만나거나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누구보다 살갑고 껴안고 손잡는 등 스킨십도 많지만 서로의 생활 환경이나 패턴이 많이 달라진 지금은 만나기도 전화 통화도 쉽지 않다.

"이 책을 읽고 한 번쯤은 자신의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만났을 때 내가 모르는 아빠, 아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엄마는 황당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욕을 했고, 아빠는 민망한지 눈물을 감추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둘이 싸우는 걸 보면 도대체 결혼제도는 왜 있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회의감이 들곤 했다. 저렇게 살지 않으리라 혼자 다짐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그렇게 매일 지겹게 투덕거리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같이 밥 먹으면서 누군가를 흉보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는 꿍짝이 맞는 걸 볼 때 도대체 부부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본다.

"풀고 말고도 없어. 맨날 싸우는 게 일상인데 뭐."

이 한마디로 엄마와 아빠의 냉전은 또 끝이 났다.

"그래. 그래도 김미숙 여사밖에 없지."

중얼거리면서 엄마가 있는 식탁 앞으로 가서 앉은 아빠. 이 정도면 해피엔딩인가 싶기도 하고. 물론 이날 하루에도 여러 번의 투닥거림이 더 반복되었다.

아빠는 일기에 제목을 붙이는 걸 좋아했다. 엄마와 연애하던 시기, '가정'이라고 제목을 붙인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젊을 때 결혼하여 살아온 늙은 마누라.'

아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과 매일 함께하고 있으니 누구보다 행복하겠지? 엄마가 이 글을 읽고 났을 때의 반응이 음성 지원된다.

"아주 말은 잘하지! 소중하면 소중하게 대하라고!"

-p.142~143 '사는 게 기적이다2'中

이 책을 통해 작가님의 아버님인 김종호 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우리 아빠를 생각했다.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빠, 뭐가 그리 급하다고 남들보다 훨씬 일찍 결혼해 20대 초반에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아빠, 그리고 지금도 여러 가족들의 생계를 우직하니 책임지고 있는 아빠, 활기차 보이지만 내성적인 아빠, 생각이 많지만 저돌적인 진격의 아빠, 항상 주위에 사람이 있길 바라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빠, 웃음도 많지만 눈물도 많은 아빠, 아빠를 생각하면 할수록 왠지 눈물이 났다.

 

 

이쯤에서 잠시 우리 엄마를 소개하자면, 김미숙 씨는 김반장 같은 사람이다. 무엇이든 해결해주고 뭐든 척척 잘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존재만으로 든든한. 그런 캐릭터가 엄마다.

손수 만들어 내는 음식들도 놀랄 정도다. 그 증거로 우리 집에는 음식과 관련된 다양한 기계가 있는데, 요구르트 만드는 기계, 두부 만드는 기계, 홍삼 달이는 기계, 아이스크림 만드는 기계가 한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렇게 뭐든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거라면 직접 만들어 가족들에게 해먹인 세월이 30년이다.

요리뿐만이 아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새마을금고에서 일하다가 결혼 후에는 화장품 가게를 차려 운영하기도 하고, 각종 부업, 베이비시터, 폐백 음식 출장서비스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활발하게 일해 온 사람이다. 어떤 것이든 배우면 해내는, 요즘 말로 '만능캐' 같은 사람이다. 엄마는 나라면 절대 해내지 못할 것들을 해냈다. 자식을 둘이나 돌보면서 거기에 죽어가던 아빠를 살려낸 것도 우리 엄마, 김미숙 씨다.

그런 사람이 자신은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 것 같다면서 씁쓸해하다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게도 재능이 있었을까?"라고 말하는데, 짠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순간 구구절절하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를 설명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혹시 배우고 싶은 거나 관심이 가는 거 있으면 뭐든 배워봐~ 인생 길잖아. 백세시대인데!"

애써 웃으며 말을 넘겼다.

"그래 맞아. 근데 다 늙어서 배워 뭐하나 싶고……."

엄마도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어쩌면 나이가 들어도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과 생각은 계속 이어지는 거겠지. 그러면서 엄마도 이제야 자기 자신을 생각할 시간이 주어진 것 아닐까 싶어서 반갑기도 했다.

"이제 다 늙었는데 뭐, 그냥저냥 사는 거지." 대신 엄마의 일상에도 호들갑을 떨만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자식 뒷바라지, 남편 챙기는 일에서 벗어난 지금, 무탈하게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감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그런 일상을 엄마도 누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p.168~171 ''김반장'을 소개합니다'中

주위에 아빠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나는 그에 반해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우리 아빠는 보수적이지만 나보다 훨씬 그릇이 넓은 사람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에 고집이 세지만 나에게는 한 풀 꺾어 주는 사람이고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존재다.

나는 아빠를 닮아 어느 부분에선 굉장히 보수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에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뚜렷한 개성 강하면서 독립적이지만 몸이 약해 골골거리는 딸인지라 나이를 먹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아빠의 속을 썩이는 자식이다.

 

작가님의 아버지와 딸인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우리 아빠와 딸인 나를 마주했다.

성별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지만 피가 이어진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이지만 어쩌면 서로를 누구보다 더 모르는 사이인 아빠와 딸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애틋함을 느낄게 할 거 같다.

'뒤늦게 아빠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랫동안 아빠를 생각했고 오랜만에 아빠에게 전화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썼다, 오늘의 공무원 - 오늘도 국가 뒤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공무원들에게
영지 지음 / 허밍버드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E-0f2b6d02-c3d2-4177-b7b6-43ebcc8af747.jpg

 

나는 직업 에세이를 좋아한다.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도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책을 통해 알게 되고 간접 경험과 대리만족을 느끼는 등에 있는데 직업 에세이야말로 내가 정말 모르는 직업군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고 활약하고 있는 전·현직에 있는 이들의 에세이를 읽었다.

교사, 간호사, 소방관, 화가, 가수, 작사가, 배우, 모델, 승무원 등 진짜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만화나 사진 등과 함께 맛깔지게 쓰셨다.

예전에 책은 작가들만 쓸 수 있는 거였지만 요즘에는 인터넷과 SNS을 통해 그 허들이 많이 낮아졌다.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글재주까지 있는 분들을 많이 알게 돼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업무를 의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분위기를 나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의 태도와 말투, 옷차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한다는 느낌까지. 사실 그런 걸 살쳐볼 여유도 눈치도 내겐 없었다. 내 편이 한 명도 없다는 절박함은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따돌림이었다. '왕따'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차가운 겨울날 회식을 하다 말고 올라간 건물 옥상에서 터트린 나의 눈물은 부서장 때문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는 부서의 직원이 있었다. 물론 부서장과 같은 직렬이었고 평소 그가 아끼는 직원이었다. 그날 회식 자리에서 보란 듯이 아이 갖다 주라며 그 직원만 음식을 챙겨주는 부서장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는 내 모습. 그 순간 그동안 쌓인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어리숙한 데다 찌질한 모습까지 그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가슴 시린 서러움을 피해 한겨울 시린 공기가 서린 옥상으로 올라갔다.

타 직렬이 주류인 부서에서 어리숙한 데다가 눈치도, 특별한 능력도 없었던 7년 전 내 모습. 그들에게 내가 왕따가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애매한 태도와 말투,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주었던 상처, 그들도 모르게 나에게 주었던 상처, 그렇게 함께한 2년의 시간, 지금은 업무적인 용건 외에는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는다.

직렬 간의 벽이 아닌 나의 어리숙함과 무지에서 온 애매한 태도. 뭐 그런 개인적인 것들이 당시 따돌림의 가장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 그때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내게 손을 내밀어주었다면, 내 마음속 이야기에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주었다면, 나는 그 긴 시간을 '따돌림'으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지금 돌이켜보니 딱 하나 마음에 남은 게 바로 그 아쉬움이다.

-p.015~016 '어리숙한 나는 그렇게 왕따가 되었다'中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따돌림이나 왕따 같은 것들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어른이 되고 학교가 아닌 사회라는, 회사라는 조직에 몸을 담고 오래 일을 하다 보니 회사도 결국 성장판 학교이며 돈을 내는 게 아닌 돈을 받기에 더 빡센 공간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 중에는 제대로 성숙한 어른들보다 몸만 크고 늙어가고 있는 어른 아이가 많고 학교보다 더 업그레이드된 유치하면서 악질적인 이 구역의 미친 XX들이 참 많았으며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내 멘탈 강화를 하고 있을 때가 있었다.

 

 

SE-5e8c90be-da50-4270-a6f8-e166cc0b8676.jpg

 

 

[애썼다, 오늘의 공무원]의 저자인 영지 님도 11년간 공무원 조직에 몸담고 계신 현직 7급 공무원이시다.

앞으로 남은 공직의 중간 지점에서 본인께서 경험한 11년간의 공무원의 업무와 고민들을 풀어내셨다.

10여 년 동안 공무원 조직 속에 속해 있으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방황한 이야기부터 어느 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절대 튀지 마! 여기선 그래야 살아남아!' 공직 초기, 스스로 바로 서지 못했던 혼란의 시기에 나 자신에게 수없이 다짐했던 말이다. 처음 느낀 공무원 조직은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일터에서 만난 동료와 선배 그리고 상사들이 의미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 그 속엔 진심 어린 '걱정'도 있었지만, '뼈'도 있었고 '경고'도 있었다.

"그런 옷은 어디서 사는 거야?"

"너무 적극적으로 하지 마. 뭘 그렇게까지 해."

"그러다 다쳐, 적당히 해."

일상의 작은 상처들. 그것들에 지치고 조금씩 작아졌던 나. 그렇게 나는 절대 튀지 않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직장생활에서 '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외모일까. 성격일까, 눈에 띄는 능력 같은 걸까. 아니면 독특한 취향일까. 무엇으로 우리는 조직에서 '튀는 사람'을 정의하고 있을까?

-p.019~020 '절대 튀지 마! 여기선 그래야 살아남아'中

 

튀지 말아라, 나대지 말아라는 말은 어느 조직에서나 통용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도 이 두 가지 말을 다 들었던지라 무척이나 억울해 했던 기억이 나고 지금 다시 생각해도 억울하다.

모순적인 부분에 이해가 안 가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한 기억밖에 없는데 나를 마치 모난 돌처럼, 반란 분자처럼 위험인물 취급 당했던 기억이 정말 생생하다.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거나 불퉁하게 말한 것도 아니고 정말 이해가 안 가서 질문을 하거나 웃으며 난처하게 에둘러 말했을 때도 나에게 네가 아직 어리고 사회경험이 적어서 그런다는 듯 철없는 어린아이 보듯 말하던 이들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SE-201bd27d-7adf-46d5-a216-7f52de97e4e1.jpg

 

직업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이들의 다양한 직업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이해와 수용에 대한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특정 직업군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오해는 생각보다 참 많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분야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놀라울 정도면 그 분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악의가 많다는 걸 경험할 때가 많다.

공무원 조직에서 '순환 보직'(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부서로 옮겨 일하는 것)은 근무한 부서의 수만큼 나에 대한 다채로운 평가, 즉 평판을 만들어낸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던지는 나름의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수천 명이 일하는 조직에서 나를 바라보는 수천 개의 눈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숨겨진 또 다른 눈, 다양한 기준과 잣대, 좋고 싫음, 불편함과 편함 그리고 별 느낌 없음……. 나란 공무원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평가를 이 세상에 그리고 조직에 만들어냈을까. 그들이 나에게 던진 평가, 내가 그들에게 던진 평가.

11년의 공무원 조직생활. 최근 두 명의 팀장으로부터 들은 평가가 과연 나를 전부 대변할 수 있을까. 버겁고 만만치 않은 직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 조직에서 '나다움'을 지키며 어떻게 녹아들 수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진다. 나를 향한 평가만큼 '지금까지 내가 누군가를 향해 쏟아낸 평가'는 과연 괜찮은 것이었을까.

"그분 회식 때 술 드시면 반말한다며?"

"그 팀장 좀 이상해 보이던데, 같이 근무는 안 해봤는데 이미지가 좀 그래."

"옷 입는 게 너무 촌스럽지 않아? 내 스타일은 아냐. 고리타분해 보여서."

"그분 너무 좋으시던데요. 매너도 좋으시고, 저는 무척 좋은 분 같아 보였어요……."

내가 그동안 누군가를 향해 만들어낸 평가의 말들. 그리고 주위에서 주워들은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말들이다. 물론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제3자와 주고받은 말이다. 이 상황에서 만약 평가의 대상이 영화 속 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내 앞에 서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아세요?"라고 묻는다면, 과연 나는 얼마나 당당할 수 있을까.

-p.028~030 ''82년생 김지영'은 나를 바꿔놓았다'中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 많이 반성했다.

내가 그동안 누군가를 향해 만들어냈던 다양한 평가의 말들과 주위에서 주워듣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했을 말들이 적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내가 뭐라고 그들을 평가하고 주워들은 말을 마음대로 전달했을까 싶고, 내가 누군가를 안다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싶어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말과 입 조심을 하자는 생각을 하며 여러 번 읽은 부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적은 내 댓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생각해 댓글 하나 달 때도 고심에 고심을 하면서 정작 말을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특히 큰 조직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람들 사이에 돌고 돌아 나에게로 돌아오는 게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 번씩 말실수를 하는 거 같아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SE-f9559fc4-44fc-45b3-ba55-35cdd569e72e.jpg

 

해보기 전에 먼저 지레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공무원이 맞지 않았다.

오랫동안 기약 없이 재미있을 거 같지도, 내 꿈도 아닌 공무원이 되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고 어렵게 공부를 해서 공무원이 된다고 해도 행복할 거 같지 않아 나는 공무원 시험을 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공무원을 꿈꾸는 이유 중 하나가 안정된 직장이라는 점을 드는데 자신의 적성과 성향을 외면하고 공무원이 된다 하들 그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내가 내 몸의 작은 움직임까지 통제한다는 의미. 이걸 통제해서 얻어지는 내 몸과 배 전체의 균형. 공무원이라는 나의 직업과 누군가의 엄마, 아내, 딸, 친구라는 개인적인 삶. 그 경계 어느 점을 아슬아슬하게 오고가는 일상의 순간순간 속에서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냉정해지고 때로는 절망하는 내 모습을 본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은 내가 공무원이란 직업을 그만두지 않는 한 계속 풀어내고 또 견고하게 만들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잔잔한 호수 위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조정 보트 위. 그 모습은 나의 일상과 꼭 닮았다. 내가 균형을 잡고 있어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평온한 일상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보트 위에서 내가 해야 하는 첫 번째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양손의 노를 가지런히 잡아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다.

균형. 공직과 개인적인 삶 사이 중간 어느 지점. 거기에 나는 단단히 두 발을 땅에 딛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다시 첫 조정 연습 날 아침, 호수 표면의 무수한 수초들 사이를 헤치고 내가 탄 보트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른 아침 정적 속에서 보트 위 네 명의 크루가 만들어내는 노 젓는 소리만이 공기를 가로지른다. 첫 승선인 나는 어떤 힘도 보태지 못했다. 양손의 노를 꽉 쥐고 균형을 유지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막연한 두려움? 아니다. 신기하게도 그때 나는 앞으로 이 배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들어갈 또 하나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왠지 모를 설렘과 기대감. 내 인생 첫 조정 연습 날 아침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p.133~134 '조정은 나에게 아주 특별하다'中

직업인으로서 뿐 아니라 한 사람의 성인으로 살아가는데 이런 균형이 정말로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할과 위치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넘어지거나 휘청이지 않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과 때로는 발버둥이 필요하다.

 

 

SE-28f6cb73-435a-44ae-b807-37d2417f3fd9.jpg

 

공무원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이 책의 저자 님은 행정 공무원이신 듯하다.

이 책은 공무원과 공무원 조직을 지켜본 관찰기이며 사명감으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의 극복기라고 한다.

공무원과 공무원 조직이라는 특수성이 있긴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다양한 분야의 회사원과 회사 조직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과 고민, 악습과 변화들의 유사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화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구청에서 공직자들의 반바지 출근은 거의 일상화가 된 듯했다. 이미 익숙해져서 정작 본인들은 반바지 입은 자신들을 보고 놀라고 있는 내가 더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요즘 젊은 공직자들의 패션 트렌드는 '반바지 입는 공무원'이다. 반바지를 입고 민원 전화를 받고 회의를 준비하고 업무 보고를 하고 현장을 나가 민원 처리를 한다. 누군가는 그놈의 반바지가 무슨 대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건 조금 다르다. 무채색의 눈에 띄지 않는 옷차림에서 '반바지 입는 공무원'으로 프레임의 전환이다.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공무원도, 또 그런 공무원을 바라보는 시민도 뭔가 달라졌음을 느끼는 것. 그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닐까.

휴일이나 주말이 아닌 주중 근무 시간에 반바지를 입고 일하는 나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평범한 직장인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 뭘까? 각자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름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주로 하는 고민은 딱 두 가지다. 아침에는 '오늘 뭐 입지?' 그리고 점심때와 저녁때는 '오늘 뭐 먹지?'다. 직장인에게 옷차림이 주는 상징성은 무척 크다. 그래서 '반바지 입는 공무원'들은 내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반바지가 주는 그 '자유분방함'과 공무원이란 직업이 주는 '경직성'이 공존하는 현실, 그 속에 내가 있음이 신기할 따름이다.

아직은 반바지 입고 출근하는 내가 어색하다. 그래서 공식적인 회의가 있는 날에는 나름 갖춰 입는다. 그에 비해 옆자리, 앞자리 그리고 건너편 자리 8~9급 후배 공무원들은 편한 반바지를 거의 매일 패턴과 색깔을 바꾸가며 입고 출근한다. 사실 부럽다. 그 자유분방함과 쓸데없이 눈치 보지 않는 당당함이. 변화에 앞장서 있다고 자신하던 나였는데 후배 공무원들의 자신만만한 반바지 패션에 괜히 주눅이 든다. 문득 나도 어쩔 수 없이 과거 선배 공무원들이 내게 의미 없이 툭툭 던졌던 '튀지 마, 그래야 편해'라는 마인드가 어느새 익숙해진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든다.

-p.152~154 '반바지 입는 공무원들'中

얼마 전에 읽은 책 [90년생이 온다]가 생각났다.

이제는 90년생이 아니라 00년생이 사회에 나올 때가 됐다.

반바지가 가지는 의미는 어떨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 청바지와 면 티를 입거나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면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는 분들이 계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머리 염색이나 네일 컬러를 가지고 싫은 내색을 넘어 한 소리씩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정말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은 자연스럽게 다들 편한 옷차림과 자유롭게 출근하고 있다.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두근거리며 기대하게 된다.

 

 

SE-31330f1b-939a-4db9-83c6-a1adb8283648.jpg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에서 음료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읽다 오려고 가지고 나왔다가 나 또한 어떠한 조직에 속해 월급을 받고 있는 직장인으로 어느 부분은 공감하고 공무원과 공무원 조직에 대해 새로 알기도 하고 이해하면서 순식간에 다 읽었다.

주변의 공무원과 공무원 조직에 고민하는 공무원이나 공무원을 꿈꾸는 이들에게 선물하면 좋을 거 같다.

굳이 공무원이나 공무원을 꿈꾸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요즘 많이 나오는 직장인, 회사원 에세이처럼 직장과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