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채
대풍괄과 지음, 강은혜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장르를 안 가리고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편독을 하는 편이라서 만날 읽고 싶은 거만 읽으려고 하는 게 좀 있어서 새로운 장르 개척이 쉽지 않은데 그래도 이런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어서 누군가가 추천 제목이나 표지, 소개 글에 흥미를 느끼며 다양하게 읽으려 한다.

천추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은 나는 울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옥황상제가 날 속계로 내려보낸 건 나보고 천추를 괴롭히라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천추가 날 괴롭히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예를 들면 지금 천추는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약을 한 모금도 삼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약사발을 들고 약을 한입 머금은 다음 선기를 넣을 때처럼 입에서 입으로 넣어줬다. 까놓고 말해서 이건 천추가 손해 보는 걸까, 아니면 내가 손해 보는 걸까?

명격성군 이 망할 노인네, 천추가 죽지 않는다는 건 말이야 쉽지!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했을 것이다. 관짝을 구해다가 묻어버리면 끝이니까. 그런데 죽는 대신 기절하고 침상에서 시름시름 앓으니 시중을 들어줘야 했다. 망할 영감, 능력 있으면 직접 와서 시중 한번 들어보든가.

감히 옥황상제를 욕할 수는 없어서 명격성군을 욕하며 분풀이를 했다. 망할 영감 욕 한마디하고, 천추에게 한입 먹이고, 곁눈질로 보니 방문 틈새와 창문 뒤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녀와 머슴 아이들이 훔쳐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왕부 사람들은 모두 날 불길한 별로 여겼지만, 오늘부터는 날 바라보는 아랫것들의 눈빛이 크게 달라졌다. 이해와 동정과, 사랑꾼인 나에 대한 탄복의 눈빛이었다.

-p.043

비릿한 바람이 아까보다 더욱 짙어졌고 방 앞에는 요기가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기척이 없어,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숨을 죽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붉은 빛 속에서 누군가 형문을 안고 서서 조그맣게 말했다. "선군을 본 후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밤낮으로 그리워했습니다. 저 같은 요괴가 선군을 만나면 죽음뿐이라는 걸 알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목숨을 구걸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바라옵건대……," 그러더니 혀끝으로 형문의 귓가를 가볍게 핥았다. "선군께서 제게 하룻밤 허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선군께선 아시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묘하다는 그 일은 대체 어떤 즐거움일지요……."

이렇게 구구절절 듣는 동안 나는 잠자코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멍하니 놓아서였다.

은백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 양 끝이 비스듬히 올라간 아름다운 눈. 흰여우요괴였다.

몸에 걸친 하얀 도포는 앞섶이 활짝 열려 군살 없는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야말로 죽여줬다.

더 골 때리는 건 그게 수컷 여우라는 거였다.

-p.084~085

이번에 읽게 된 [도화채]는 선협 중국소설로, 일반 선협이 아닌 BL 선협이라는 장르였다.

선협소설은 201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장르소설로 동양 판타지인 무협소설을 기반으로 신선들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몇 년 전에 [삼생삼세 십리도화]와 중국 드라마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면서 신세계가 열렸다.

 

여우는 바람이 되어 사라졌고, 나의 끝나지 않은 말은 야경에 잠겼다.

본 선군이 도리를 논하는데도 가르침을 듣지 않겠다는 건가. 형문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맨날 거저주워 신선이 된 거라고 나불거리더니 수행 방법에 대해서는 맞는 말만 한다?"

나는 우쭐해서 대꾸했다. "하늘에서 몇천 년을 지내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잖아. 털뭉치가 오늘 청군을 희롱하고 내게 한바탕 훈계를 들었으니 백팔십 년은 효과가 있을 거야." 모약언의 수발을 드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나는 여우가 흩트려 놓은 형문의 앞섶을 보고는 손을 뻗어 옷깃을 여며줬다. "난 청군의 곁에 수천 년을 있었고 요 며칠간 한 침상에서 자기까지 했는데, 내가 아직 해보지 못한 걸 털뭉치가 해버리다니 마음이 너무 아파."

형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럼 너랑 나랑 그 여우가 못 한 걸 해보면 어떨까?" 그러더니 옆에 바싹 다가와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댔다. 부드럽고도 따스한 입술이 갑자기 덮쳐와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얌전히 있자. 옥황상제와 명격성군이 지금 하늘 위에서 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어떤 일은 정신을 차린다 한들 마치 호수에 빠진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고 마는 법이다.

이런 행동에 익숙지 않은지 제멋대로 살짝 핥고 깨무는 형문이 갈수록 유혹적이었다. 참지 못한 나는 그의 몸을 꽉 껴안고 기선을 제압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은 깊은 못의 물 같아서 기꺼이 그 속에 빠지고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자 형문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불빛 아래서 윤기 나는 붉은 입술에 웃음기를 떠올리더니 갑자기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알고 보니 이런 즐거움이 있었네."

정말 죽여주는 한마디였다. 마음속에 그 여우처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대어 나는 혀로 그의 귓가를 살짝 핥았다. 품에 안은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다행히 바로 이때 다년간의 수련이 빛을 발했다. 나는 정신이 퍼뜩 들어 형문의 어깨를 잡고 손가락 세 마디쯤 밀어냈다.

형문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나는 씁쓸히 웃었다. "이대로 가다간 주선대에 오를 거야."

형문은 뒤로 물러나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네가 천추에게 그렇게 많이 선기를 불어넣었으니 진작 주선대로 끌려가 여덟 조각으로 잘렸겠지."

나는 묵묵히 냉차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p.088~089

천추의 두 눈은 가까이서 보면 가을 물처럼 맑았고, 남명의 두 눈은 멀리서 보면 민둥산처럼 보였다. 말할 수 없는 애처로움과 슬픔과 그리움과 기쁨, 사랑이 담긴 눈. 그리고 묵직한 그리움과 적나라한 정이 담긴 눈.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딱 그렇게 한 번. 선성릉은 변기통을 들고 무표정하게 뜰을 나섰다. 모약언은 침착한 척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얼굴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졌고 발걸음을 옮길 때는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형문이 말했다. "한 쌍의 원앙이 생이별을 당했으니 확실히 불쌍하긴 해."

내가 덧붙였다. "생이별시킨 장본인도 무척 악랄하고 말이지?"

형문이 하품을 했다. "남명제군은 널 탓할 자격 없어. 예전에 남명제군은 그 누구보다 악랄하게 생이별을 시켰으니까." 그러더니 곁눈질로 나를 흘끗거렸다. "청동과 지란의 일로 아직까지 앙금이 남은 거지?"

난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잊겠어."

-p.101~102

게다가 BL이라는 장르가 보편적인 장르가 아닌 마이너였는데 요즘 중국 선협소설에서도 종종 등장하고 요 근래 제작되는 중국 드라마도 브로맨스라는 말로 살짝 바꿔서 나오곤 해서 막 낯설지는 않는다.

내가 알기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 BL선협소설이라 신기했다.

           

                                          

광운자, 나이는 아마 쉰을 넘지는 않고 마흔 줄일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쉰내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심해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굉장히 오랫동안 씻지 않은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턱 밑에 수염이 나 있었다. 아주 길고 살짝 끈적거렸다. 들어 올려서 살펴보려는데 마침 벌레 한 마리가 먹을거리를 찾는 듯 무성한 수염 사이를 누비는 모습이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꼴이었다.

형문이 허공에서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구린내 나는 더러운 도사라니 나보고 옆에 오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 네가 깨끗이 씻으면 다시 올게." 그러더니 자취를 감췄다. 정말 이러기냐. 이 도사가 설마 이사명의 시체보다 훨씬 더러울까? 저번엔 관 옆에서 노래까지 할 기세더니, 지금은 또 왜 이래?

온몸이 근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목 뒤를 긁었더니 잿빛 때가 볼만하게 밀려나왔다. 튕기고, 뭉치고, 다시 튕기고, 아주 재밌었다.

-p.123

말하다 보니 목이 메었다. 그때 난 일곱 살이었고 많은 걸 알 나이였다. 당시 허 관사의 땅 방랑이 열두세 살의 어린 아가씨였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그 누이를 무척 좋아해서 아버지에게 나중에 크면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말할 참이었는데, 늙은 도사의 몽둥이 한 대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그 도사의 불길한 입은 확실히 영험했다. 방랑은 열네 살에 상인 집안 아들과 혼인했고, 잔뜩 화가 난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어떻게 예전에 내가 계화꽃 떡과 천층병千層餠(얇은 반죽을 여러 겹으로 쌓아 만든 빵), 호두과자를 줬던 정을 저버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방랑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련님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게다가 제가 어찌 감히 도련님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나는 방랑을 태운 붉은 가마가 떠들썩하게 멀어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주도로 약혼을 한 적도 있었다. 상서의 딸이었는데, 매파는 여인의 외모가 꽃처럼 아름다운 데다 사주팔자와 관상이 나와 딱 맞아떨어진다며 하늘이 맺어준 한 쌍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녀는 셋째 왕야의 세자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어느 날 밤 보란 듯이 사랑의 도피를 했다.

나는 다시 약혼했다. 이번에는 국구國舅(황후나 귀비의 남자 형제)의 딸이었는데 그녀는 사촌오라비와 사통하여 도망쳤다. 그다음 약혼한 여인은 군왕가의 군주郡主(친왕의 딸)였는데 그녀는 황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보상으로 여동생을 나와 짝지어주려 했다. 하지만 그 여동생은 젊은 시랑侍郞(육부(六部)의 차관(次官))과 사사로이 정을 통해 회임까지 한 상태였다.

실망한 나는 기루를 전전하다가 한 기생에게 첫눈에 반했고, 하늘과 땅을 감동시킬 정도로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는 결국 가난뱅이 서생과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우연히 신선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누리지 못할 복을 누리게 되었다.

늙은 도사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운명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문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알지, 알지. 네가 얼마나 힘들고 슬픈지 다 안다고. 수천 년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아. 단어라도 바꿔보지 그래? '영원히 외로운 난새'라는 말에 꽂혀서 내내 붙잡고 있잖아. 하늘의 신선인데도 사는 게 즐겁지 않아?"

"즐겁지. 다만 넌 태어날 때부터 신선이라 사랑이란 것의 대단함을 모를 뿐이야.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가 없어. 그게 아니라면 옆방의 천추와 남명이 어떻게 그 대단한 상군이란 자리도 버리고 지금 이 지경이 됐겠어."

형문은 찻잔을 돌리며 말했다. "어, 일리는 있네. 재미있네, 재미있어. 그 말을 옥황상제가 들었으면 분명 너한테 속세의 뿌리가 남아 있다며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냈을 거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또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살짝 후회하며 형문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옥황상제가 듣는 건 둘째 치고, 그냥 아무렇게나 한 말이니까 너도 너무 재미 들리지 마. 시험해볼 사람을 찾을 생각도 말고."

형문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걱정 마. 옆에 있는 사람한테는 시험하지 않을 테니까."

-p.163~165

[도화채]에도 무척이나 매력적인 신선들이 많이 나온다.

금지된 사랑을 나눈 벌로 속인으로 환생한 천추와 남명의 사이를 갈라놓으며 둘을 힘들게 하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선계의 한량 중의 한량 신선인 주인공 송요가 인계로 내려오게 된다.

인계에 내려온 송요는 이미 인생이 꼬인 미인박명 춘추를 납치해 나름 열심히 옥황상제의 명을 이행하는데 처음에 쌀쌀맞기만 하고 벽만 치던 춘추가 송요를 대하는 게 미묘해지면서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긴 도끼 하나가 선성릉의 어깨를 힘껏 내리찍었다. 선혈이 모약언의 저택 담장에 튀었다. 담장 위에는 몸을 웅크린 스라소니의 조그만 그림자가 있었다.

순간 눈부신 번개가 담장 전체를 뒤덮었다. 구름 위에 서 있는 나는 하늘을 뚫고 올라오는 세찬 울부짖음을 들었다.

담장 위에 있던 스라소니의 형태가 점점 팽창하는 것처럼 보였다. 번개가 선성릉의 몸을 감싸더니 선성릉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으아악 하며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새까맣게 탄 시체가 우수수 땅으로 쓰러졌다.

울부짖는 소리가 마침내 끝났을 때 나는 거대한 짐승이 번개 속에서 선성릉 앞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보았다. 짐승이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주변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내가 구름 위에 멍하니 있을 때 형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설산예雪狻猊…… 설산예였어!"

전설로 전해지는 그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영수靈獸 설산예?

천추를 붙잡고 있던 왼쪽 팔에 나도 모르게 힘이 풀렸다. 형문을 보며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손이 허전해졌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모약언이 이미 구름 밑으로 몸을 날린 뒤였다.

갑작스러운 광풍이 몰아쳐 모약언은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나는 다급히 구름에서 뛰어내렸다가 느닷없이 선장에 부딪혀 세계 튕겨나갔다.

구름이 살포시 내 발밑을 받치더니 그림자 하나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네 법력으로는 설산예를 당해낼 수 없을 테니 내가 갈게." 그림자는 그 말을 남기고 바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형문을 외쳐 부르며 손을 뻗어 잡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p.234~235

형문을 풀어주자 과연 얌전히 내 옆에 서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나는 천추에게 말했다. "난 송요라고 한다. 옥황상제께서 광허원군이라는 봉호를 내려주셨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널 이쪽 형문 소선과 함께 속세를 경험시켜줄 것이다. 그 이유는 며칠 후 천궁으로 돌아가면 알게 될 거야. 일단 지금은 나와 속세에 머무르자꾸나."

천추는 쌀쌀맞긴 해도 아이 때는 수려한 외모에 천진난만한 소년이었다. 어린 시절의 형문보다 다루기가 훨씬 쉬웠다. 천추는 그저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며 무슨 말을 하든 다 믿었다. 형문은 어릴 때부터 옥황상제와 서왕모의 손에 자랐고, 삼백 살이 되었을 때 비로소 청군으로 봉해져 문서 업무를 담당하는 문사전을 주관하게 되었다. 천추는 태어날 때부터 천추성군이었으며 북두궁 중에서 품계가 가장 존귀했다. 그런데 천추가 어릴 때 이렇게나 온순했다니. 이렇게 얌전한 아이가 어떻게 커서는 찬바람이 쌩쌩 도는 천추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천추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속세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나는 상냥하게 웃으라 얼굴에 경련이 날 정도였다.

형문은 싱글싱글 웃으며 천추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난 형문이라고 해. 천추라고 불러도 돼? 너도 속세는 처음이야?" 천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북두궁에 살아? 천궁으로 돌아가면 놀러갈게."

천추는 기쁘게 대답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에 나이 든 나는 한쪽에 쭈그려 앉아, 파릇파릇한 형문과 천추가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동화제군이 내 앞에서 소매를 너풀거리며 춤추는 걸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참 후 나는 두 아이에게 속인들 앞에서는 신선의 흔적을 드러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아이들과 함께 머물 만한 마을로 갈 채비를 했다. 거기 머물러 있다가 천궁의 선사가 오면 천추는 윤회하러 가고, 형문은 계속해서 청군으로 살고, 나는 주선대에 오를 것이다.

구름을 띄우려는데 형문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가 옆에 있는 풀숲을 보고 물었다. "저건 뭐예요?"

형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풀숲에 하얀 털뭉치가 쓰러져 있었다. 여우였다.

형문과 천추만 살피느라 여우는 신경 쓰지 못했는데, 벽화령군의 치료로 여우는 정신을 차렸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이들을 챙기느라 분주한 동안 어떻게든 일어나 도망가려다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풀숲에 쓰러져버린 것이다.

형문이 풀숲으로 뛰어가 쪼그리고 앉아 풀을 헤쳤다. "하얀 여우예요. 왜 다쳤지?" 형문은 손을 뻗어 여우의 등을 쓰다듬었다. 여우는 머리를 털 속에 파묻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천추도 옆으로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상처가 심하네." 형문이 풀숲에서 여우를 안아 들었다. 털뭉치는 잘 먹어서 통통했기에 어린아이가 안기에는 약간 버거웠다. 형문이 여우를 안고 말했다. "착하지, 착하지. 내가 데려가서 치료해줄게." 여우는 형문의 작은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감긴 눈에서 눈물이 스며 나왔다.

나는 털뭉치를 보며 길게 한숨을 토했다.

-p.242~244

얼떨결에 운발 게임에서 기가 막히게 당첨돼서 신선이 된 송요답게 그의 행보가 남다르다.

이런 송요의 임무를 돕기 위해 선계에서 능력 있고 인물 좋은 엄친아(?!) 신선이자 송요의 절친인 형문까지 내려와 송요의 곁에 함께하는데 분명 이미 점지되어 있는 운명이고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데 송요의 말처럼 알고 보니 천추와 남명의 벌이 아닌 송요의 몰래카메라 내지는 엿 먹이기인 듯, 근데 난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남 몰래 옥황상제를 씹으며(?!) 속으로 투덜거리는 송요 너무 귀엽다.

 

빚을 진 건 반드시 갚아야 했다. 나와 천추는 선계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명격성군은 천추가 두완명으로 살았던 생에서 내게 빚을 졌다고 했다. 그래서 천궁에 있을 때 날 보호하느라 갖은 고생을 했던 것이다. 형문에게 일편단심이었던 여우는 자신의 목숨과 천 년의 법력을 바쳤다. 형문은 여우에게 빚을 졌고, 지금 나는 또 천추에게 빚을 졌다.

알고 보니 내 모든 인연이 갚아야 할 빚에 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형문의 정해진 운명은 여우였다.

나는 으슥한 오솔길에서 휘청거리며 쓴웃음을 금치 못했다.

천궁에서 신선 노릇을 하며 수많은 신선들을 만나봤는데, 그해 속세에서 내게 점을 쳐준 사람이야말로 진짜 신선이었다.

나는 역시나 영원히 외로운 난새의 운명이었다.

내가 끼어들어 천명을 어지럽혔을 뿐 천추성군과 남명제군이야말로 서로 짝이 되어 빛날 운명이었다.

형문청군은 여우와 함께 정겁을 겪어야 할 숙명이었으며 결국 나로 인해 형문과 여우가 빚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각자에겐 각자의 인연이 있다. 나만 아무와도 인연이 없을 뿐.

나는 그저 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속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할 숙명이었다. 연인을 갈라놓는 몽둥이가 아니라 강을 건너게 해주는 다리였다.

-p.330~331

나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았다. "털뭉치, 좀 괜찮아?"

여우는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옥황상제가 널 핍박하면서 형문청군을 좋아하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여우의 귀가 살짝 떨렸다.

"옥황상제가 네 가죽을 벗기고 뼈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형문을 좋아하지 못하게 만들면?"

여우의 얼굴에 두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또다시 귀만 살짝 떨었다.

아주 좋네.

"그럼 오늘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하도록 해. 형문은 차를 연하게 마시는 걸 좋아해. 글을 쓸 때는 종종 붓을 필세筆洗(붓을 씻는 그릇)에 놓아두고 잊어버리곤 해. 술을 마실 때는 취할 때까지 마시니까 마음껏 마시도록 두지 마. 잠버릇은 딱히 없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어린잎으로 처음 우린 차를 꼭 마셔야해. 일단 공문을 보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니까 종종 밖으로 이끌어서 이곳저곳 거닐며 기분전환을 시켜주고. 그의 책상 앞에는 육경이라는 신선이 있는데, 수시로 그에게 공문을 한 무더기씩 갖다주니까 절대로 상대하지마. 만약 동화제군, 벽화령군, 태백성군이 술 마시자고 찾아오면 주의하도록 해. 형문은 이것저것 잘 잃어버리는 버릇이 있으니 술자리가 끝나면 자리 주변에 깜빡 잊고 놓고 간 부채 같은 것이 있나 살펴봐. 형문은 단 음식은 잘 먹지 않아. 견과류도 소금에 구운 것만 먹지, 설탕절임은 안 먹어. 베개는 낮아야 하고 이불은 부드러워야 해. 찻물은 적당히 따뜻해야 하고."

여우는 앉아서 곤혹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봤다.

나는 여우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앞으로는 네가 형문의 곁을 잘 따라다녀야 해."

여우는 손바닥 밑에서 몸서리를 쳤다.

-p.335~336

인간이었을 때부터 누구와도 사랑을 이루지 못할 거라는 운명을 점지 받아 인연에 대해서 포기한 인간적인 신선 송요와 그의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 같은 형문, 그리고 남명과 천추의 인연까지.

이들의 얽히고 엮인 인연과 운명들을 따라가게 되는 [도화채]를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대륙의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원조 중의 원조 선협BL로 조회수 4억, 150만 부의 인기작이었다고 하는데 읽다 보니 그 인기의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형문은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털을 털어낸 후 베개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를 바라봤다.

형문, 형문. 이거 알아? 수천 년 전 내가 처음 천궁에 올라가 널 봤을 때 넌 미원궁에서 막 나오던 길이었지. 비록 멀리서 뒷모습만 봤지만, 난 그때부터 널 좋아했어. 그때 넌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어서 나는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나중에 연못가에서 다시 만나자 넌 내 처소에 놀러 왔지. 그 후로 수천 년 동안 너랑 나는 친하게 지냈어. 하지만 난 네 곁에 있는데도 무척 멀게만 느껴졌고, 여전히 네게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속세에 있을 때 요상이 했던 말이 맞을 거야. 그때 난 사랑이 뭔지 전혀 몰랐으니까. 천궁에 올라오고 나서야 마침내 그 단어가 뜻하는 바를 알았지만 이미 쓸 수 없는 단어가 돼버렸어.

속세에서 한동안 지내면서 난 충분히 얻었어. 수천 년 신선 생활은 이미 본전을 찾고도 남았지. 그저 다를 놓아주는 역할에 불과했다 해도 수지 타산이 잘 맞는 역할이었어.

난 내가 본분을 지키는 신선이 되어 천궁에 머물 수 있기를 온 마음으로 바라. 신선의 세월은 끝없이 길잖아. 서로 맞닿을 수 없다 해도 오랫동안 곁에 있을 수 있던 것만으로도 만족해.

지금 이렇게 널 보고 있어. 난 남에게 빚지지 않았고 너도 남에게 빚진 거 없어. 난 심지어 네 곁에 남을 인연조차도 없지만, 지금 널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연이 깊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숙여 형문의 입술을 핥은 후 그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침상에서 뛰어내려 방을 빠져나갔다.

-p.339~340

읽으면서 매력쟁이 넘버원 캐릭터는 작가님의 최애 캐릭터이긴도 한 엄친아(?!) 신선 형문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정이 가고 세상 둘도 없이 짠하면서 착하고 귀여운 볼매는 역시 주인공인 송요였다.

진짜 읽으면서 계속 옥황상제의 빅 피처 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건 송요구나 싶어 짠한데 꿋꿋한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애정이 가는 캐릭터였다.

 

 

송요원군와 형문청군, 천추성군, 남명제군 이렇게 중요한 주조연 이외에도 천명부 기록을 담당하고 천명을 관장하는 신선 명격 성군과 송요들과 오랜 친분이 있는 희한한 동물들을 기르는 걸 좋아하는 벽화령군, 그리고 형문을 짝사랑하며 송요에게 털뭉치라고 불리는 신선이 되기 위해 수행 중인 흰여우 요괴인 선리까지 여기 나오는 캐릭터들은 밉상(?!) 옥황상제 빼고는 하나같이 다 개성 있고 매력 있어서 한 권으로 보내기가 너무 아쉽다.

이런 선협물을 드라마 제작 잘 하는 중국에서 이 [도화채]도 꼭 드라마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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