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 무엇이든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 읽지 않더라도 갑자기 책을 덮고는 무엇이든 쓰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하는 작가의 멘트는 어쩌면 이 책의 모든 것을 담아낸 말인지도 모른다. 책 제목처럼 당신이 이 책 이후 무엇이든 자유롭게 글을 쓰며 즐겁길 바란다 라는게 작가의 마음이 아닐까.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좋다. 어차피 그런 대단함은 기존의 작가들이 충분히 내어주고 있고 우리는 소소한, 다듬어지지 않은 글들을 써내려가며 점점 스스로의 글솜씨를 늘려가기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일상에서 쓰는 작은 조각글, 다이어리 등도 모두가 글이고 나처럼 독서를 좋아해 읽은 책의 서평을 쓰는 것 역시 글인데 우리는 늘 글쓰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잘 다듬어지고 잘 쓰인 글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을 타인에게 공개했다가 자칫 두고두고 흑역사가 되어버리는 게 무서운지도 모른다.
사실 난 가끔 말도 안 되는 유치한 글들을 적어서 친구에게 대뜸 보여줄 때가 있다.( 어찌보면 나름 일방적인 글 통보와 마찬가지다) 그때 만큼은 왜인지 글을 썼다는 약간의 의기양양한 자부심에 흐뭇해하다 나중엔 그저 실실 웃음을 건네며 좀 유치했지? 라고 말을 건넨다. 그 작은 일이 친구와 또하나의 연결된 추억고리를 만들어주기에 난 유치한 글이라도 친구에게 통보한 것에 그다지 후회를 하진 않는다.
어떤 날은 시를 썼다가, 어떤 날은 에세이 같은 글을 썼다가, 또 어떤 날은 캐릭터 설정에 관한 글을 쓰기도 한다. 이름과 외모 그리고 간간이 떠오르는 대사 등등을.. 하지만 쓰지 않는 날이 더 많다. 난 작가가 아니니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으니 말이다.
책 내용 중 글을 쓰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 독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취향의 독서를 많이 하느냐에 따라 글을 쓰는 취향이 달라진다는 말에는 꽤 공감했다. 내가 처음으로 어떠한 글. 정확하게는 [소설]을 썼던 기억은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에 판타지 문학이 붐을 일으켰고 당연하게도 나는 판타지 문학에 열을 올리며 읽었다. 자연스레 내가 쓰는 글들은 판타지와 밀접한 글들이었다. 그 때 떠올린 머릿속의 상상들, 캐릭터들 대사들.. 무엇이든 썼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그냥 무엇일 뿐인 것이 아니라 소중한 무언가가 되어버린 소중한 경험의 글들이다.
왕좌의 게임속 가문들의 가언을 보여주는 것이 있던데,
난 여러 가언들 중에 마르텔 가문의 굽히지 않고, 꺾이지 않고, 부러지지 않는다.가 마음에 들었다.
보통의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거리가 먼데 어째서인지 이 가언에 매력을 느꼈다. 난 굽히는 사람이고 꺾이는 사람이며 부러지는 사람이다. 자주 좌절하고 안된다고 포기하고 체념하는 데에 익숙한 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더 매력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내가 해줄 수 없는 것을 이 가언을 가진 마르텔가문은 이루어주겠지.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며 살아가니까. 그래서 상상하는 것은 즐겁고 창조한다는 행위는 예술이 되는가 보다. 다른 독자들은 과연 어떤 가문을 선택했을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정리 정돈하는게 아니다. 더 어지럽게, 더 헝클어뜨려서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마음껏 어지르자.
헝클어뜨릴수록 더 생겨난다니 당장 두피에서 탈출해버린, 그래서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내 머리카락 한 올을 마구 헝클어뜨려본다. 과연 무엇이 생겨날까?. 둥글 둥글 말려버린 머리카락이 어쩐지 한 마리의 검은 양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과연 김중혁 당신의 말대로 헝클어 뜨리니 뭔가 나오긴 나오는군요.라고 중얼거려 본다.
마지막 대목을 교훈이나 반성으로 끝내는 글도 믿을 수 없다.
간단한 반성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세가지 기준 중에서 살마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글쓰기의 함정은 세번째(위의 대목)일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그렇게 글쓰기를 배웠다. 우리는 글을 마칠 때 쯤이면 반드시 뭔가 깨달아야 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나는 내일부터 어찌어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거나 나는 반성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라고 쓰도록 배웠다.
세상에, 반성과 후회가 그토록 쉬운 것이었나.
나와 같은 세대인 걸까? 하는 생각에 잠깐 그의 프로필을 검색해봤다.
같은 세대라고 하기엔 10살 가까운 나이 차이가 났지만 그럼에도 비슷한 교육의 시대를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리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같은 감정을 배우도록 강제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 내용은 이러 이러하고 시대상은 이러했기에 여기에서 느끼는 감정은 바로 이것이다하고 말이다.
예전 어느 문학자가 자신의 글을 두고 강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강의자가 이 작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러한 감정으로 글을 쓰셨을거다라는 말을 듣고는 긍정도 반박도 못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난 아무 생각없이 그저 써지는 대로 썼는데...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받은 대로 이 글에선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어 둔다. 사실 생각해보면 글을 쓴 이에게 이만한 실례도 없다..
어느 방송에서 김영학 작가는 "문학은 읽은 사람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정답이다. 열 사람이 있으면 열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게 문학이다"라는 뉘앙스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상당히 공감이 되던 대목이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 사람들은 글을 쓴다. 슬플 때만 글이 써지는 게 아니고 즐거울 때만 글이 써지는 게 아니다. 다양한 감정 속에서 언제든 글을 쓰는게 중요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작가가 권하는 어떠한 디테일한 노하우라기 보다 작은 자신의 일상 속 글 쓰는 이야기를 해준 것 같은 글이었다.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소소한 일상 속 인물인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글을 쓰기 위해서 이런게 필요하고 이렇게 써야 한다는 글이 아니라 그냥 무엇이든 용감하게 써보라는 의미의 책인 것 같다.
그가 그린 그림들도 어쩐지 정감이 간다. 디테일하게 잘 그린 그림은 아닐지라도.. (사실 그랬다면 멀티플레이라는 점에서 좀 배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내 기준에서 두가지 다 잘하는 건 너무 반칙이다..)
뜬금없지만 나는 사실 이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종이질에 기분이 좋았다. 재생지 같은 느낌의 표지와 속지에는 실제로 회색의 갱지가 쓰였다. 게다가 문제 풀이 공간은 말 그대로 학교 다닐 시절 갱지로 치르던 시험이 떠올라서 위트 있는 구성 같아 좋았다.
당신의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 용기를 내라는 듯 말해 준 작가의 결과물에 애정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