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문학을 이제서야 조금씩 접하는 나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였다.

이젠 고인이 되어 소설로만 세상에 흔적이 남은 한 소설가의 책.


자기 앞의 생이란 제목으로 나는 이 책이 굉장히 무거운 느낌의 책일까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한 아이의 조곤 조곤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무거운 분위기는 있으나

전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게 다가왔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 

그렇게 철이 들수 밖에 없던 시절이였고, 그 당시 아이들에겐 그다지 특별하지도 않은

흔한 일상이였을 것이다. 

모모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에서 로자아줌마와 여러 아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흔히 말해 엉덩이로 벌어먹는 매춘부의 아이들로, 당시 피임과 관련된

약이나 방법들이 정확하지 않아 생긴 아이들, 혹여는 매춘부가 원해서 생긴 아이들이

맡겨진 것이다. 이런 집이 여럿있었고 모모는 로자아줌마의 집에서 길러진 아이였다.

유태인으로 수용소에 잡혀갔다 돌아온 로자아줌마와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모모.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모와 로자아줌마의 관계는 꽤나 깊은 연민을 품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가족인것이다.


로자 아줌마에게는 지하실에 유태인 둥지가 있다. 본인이 겁이 날때 숨을 수 있는 둥지.

언제 또 다시 독일인에게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있고 그와 함께 

누구든 자신을 유태인이라고 밀고 할수 있다며 타인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지독한 증후군속에서 삶에 시달리는지를 보여준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얼마나 한 인간이 인격을 망가뜨려 놓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그녀이기에 죽음이 다가왔을때는 여지없이 그 죽음에 자신을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병든 몸으로 치매에 까지 걸리지만 그녀는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서 억지로 생명을 이어가며

괴롭힘당하고 싶지 않아했다. 유태인으로 수용소에서 그와 비슷한 고통을 이미 겪을대로 겪은 그녀는 삶에서 죽음이 올때는 쉬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었던가보다.


자신을 길러준 그녀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 그녀는 모모의 곁에서 그녀가 바라는 죽음을 맞이할수 있어서 생의 마지막이 조금은 위안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어려운 것을 어린 모모는 해낸다. 한 사람에게 있어 오롯이 한 사람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 어린 모모는 현대의 우리보다 너무나도 정직하게 알고있다.



열다섯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였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삶이 로자아줌마를 파괴했다는 모모의 말처럼 삶은 누구에게든 자비가 없다.

언제고 우린 나이를 먹고 삶에서 조금씩 생체기를 얻어가며 늙어갈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내 늙어감을 사랑해줄 사람이 내곁에 남아있을까?....

우리들 누구든지 삶의 끝자락에 삶의 파괴속에서도 내곁에서 나를 아름답다 사랑한다 여겨줄

모모같은 사람이 곁에 남아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