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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에 걸린 장자
서야 지음 / 청어람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아홉칸의 위용을 자랑하는 계휜당의 종손 임위.
처음 본 갓 태어난 아이가 궁금해 고개를 내밀고 바라본 어린 위는
무슨 저렇게 못난 아이가 있을 수 있나 싶었다.
나중에 젖살이 오르고 제법 토실해지면 예뻐지기도 한다는 말에
위는 늘 은목이 언제쯤이면 예뻐질까 궁금해하며 그녀를 살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골목대장 은목이 또래들과 즐거이 뛰어 놀며 짓는
캬루룩 캬륵 캬륵 특이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가는 위.
아마도 위의 사랑은 이미 그때 심어져 있었나보다.
현대 삶 속에서도 전통을 지킨다는 이념으로 살아가는 종가의 가문에서
위는 일찍 여읜 아버지를 대신해 종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올곧고 반듯하게 종손의 역할을 하며 자란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을 상대하면서도 위는 한 점 주눅 듬이 없이
자신의 소신껏 가문을 돌본다.
그러면서도 젊디 젊은 위의 가슴에 피어나는 은목을 향한 사랑.
현대의 사랑처럼 금세 찾아와 불꽃처럼 타올라버리는 사랑이 아닌,
은은한 양반의 절개처럼 올곧고 예의바른 그의 사랑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은목을 향해
점차 깊이를 더해가며 뻗어간다.
젊디 젊은 청년이라지만 노인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려운 말만 골라하는 위를
은목은 왜인지 자꾸 마음이 쓰인다. 숨길 듯 숨겨지지 못하는 그의 외로움과 서글픔이
은목에게 짠하게 다가와 왜인지 가만둘 수 없다.
소태처럼 짠 자신의 김치전도 잘만 먹어주고,
불어터져 버린 국물이 있는 게 신기한 라면도 잘만 먹어주는 그이 곁에
있고 싶으면서도 무서워 달아나고 싶다.
종가의 맏며느리 종부. 그 위치가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길인지 아는 은목...
그리고 역시 그 종부라는 힘겨운 길을 밟아 달라 말할 수 없는 위.
사실 처음에는 읽으면서 위의 말투도 말투지만 익숙하지 않은 위쪽 지방의 사투리에 힘겨웠다. 아...다른 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는 책을 읽으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어 왜인지 미안함도 앞섰다.
하지만 점차 사투리에도, 위의 말투에도 익숙해지며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몰입도가 높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요 부분까지만 읽고 화장실가야지...하다가도 어느새 그 페이지를 넘어
다음 페이지를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의외로 이런 잔잔하면서
진지한 책이 나에게도 꽤나 맞는구나 싶었다.
남녀 주인공 모두가 사랑스러운 소설이 아닌가 싶다.
소탈하면서도 귀엽고 재미있는 은목과 얌전하면서도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질투도 할줄 아는 위. 아직 제 것이 되지 못한 은목,
마음에만 품은 은목임에도 질투를 하는 위의 모습은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거기에다 종손 위를 존경하며 모시는 어린 창수가 은목을 마땅찮아하며
아줌씨라고 부르며 은근슬쩍 디스(?)하며 투닥투닥 하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은목이였다면 뒷목잡고 쓰러졌겠지만 읽는 입장인지라
위처럼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현대물이면서도 시대물같기도 한 이 소설은 꽤 특이한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잘 지어진 무대의 소설이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위는 개인적으로 최근 읽은 소설의 남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
심부름 갔던 집에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청실홍실을 엮어 나온 사내아이의 사랑.
양반의 절개처럼 지고지순하게 한 사람만을 마음에 품어온 그 사내의 이야기가
산수화처럼 고요하고 은은하게 빛난다.
진지하고 달달한 얌전한 책이 취향이 아니신분들에게는 좀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