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 무언지 알면서도 잘은 알지 못한다.
문학의 한 종류인 것으로 알고는 있음에도 수필은 자주 접해보질 못했기에
언뜻 어떤장르인지 정의내리기가 어렵다.
수필의 사전적 의미는 일상 생활속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라고 한다.
자유롭게 쓰인 글.
어렵게 생각할 필요없이 자유롭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찬찬히 듣는다고 생각하며 읽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제목부터 꽤 마음에 든 책이었다. 수필 한 편.
그리고 표지가 깔끔하고 정갈해서 마음에 들었다.
잘 정돈된 느낌이 들어서 그만큼 책도
잘 정리되어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생긴 책이다.
책을 읽으며 상당히 깊은 시골에서 작가가 살았던 걸까? 생각하다
궁금해져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45년생. 우리 어머니의 연세와 비슷했다.
노작가의 책인만큼 고향을 그리는 글들에 고향의 해묵은 기억들이
흑백사진처럼 알알아 박혀있는 것 같다.
어머니와 동년배쯤 되시는 어느 분이 지역의 문학인이신데
그분께서 어머니께 책을 선물하셨다.
평소 책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편은 아니셨던 어머니가
밤새 책을 읽으셔서 신기해했더니 읽어보라고 엄마의 어릴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책이라고 하셨다. 지역은 달라도 우리 또래는 다 비슷했나봐
딱 내 이야기 같애. 라던 어머니. 가게에 놀러오시는 분들에게 책을 소개하셨다는데
읽으신분들이 똑같은 말들을 하셨단다. "이거 완전 내 이야기네?" 라고 말이다.
아마 이 책도 내가 읽고 난 후 엄마에게 권하면 읽으면서 똑같은 말을 하실것 같다.
그 옛날 이십대에 떠나와 간간히 들리셨을 엄마의 고향.
작가의 향수가 엄마의 향수와 같지 않을까.
노작가께서 초가집이 허물어진 것에 아쉬움을 느끼듯 엄마도 고향에 들릴때면
달라진 지붕들에 아쉬움이 넘치셨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소중한 것. 근원적인 것을 놔두고 우리는 지금 정신없이 어디로 가고 있다.
삶의 모태인 시골을 떠나 빠른 속도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워낭소리는 그런 속도와는 무관하다.
노인과 누렁이의 느리게 걷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처럼
읽어버린 시간을 찾는 기분이었다.
앞만보며 달리느라 지친 영혼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본문 워낭소리 中---
빠른 도시지만 그럼에도 더 빠르게를 외친다.
걷기보다 버스를 버스보다 지하철을, 택시를..
하루종일 그런 빠른 소음들에 지쳐 점점 생겨난 것이
명상, 요가가 아닐까. 최근에는 모 연예인이 하는 것을 보고
싱잉볼이라는 것도 꽤나 유행했다.
워낭소리편을 읽다가 싱잉볼이 떠올랐다.
소리를 내는 종이란 것은 한번 타작을 해 소리를 울리게 하고
스스로 소리가 끊어질때까지 듣는게 미덕이다.
종이 울리고있는 와중에 종을 잡아 소리를 끊으면 이상한 불쾌함이 서린다.
추억을 걷는 시간들이 그렇다.
천천히 추억속을 걸으며 힐링을 하는 시간에 다급함, 재촉은 어울리지 않는다.
워낭소리를 듣듯 싱잉볼의 울림이 끝날때까지 그저 가만히 듣고 쉬면 되는 것이다.
작가의 글 속에 방언들이 자주 나오는데 나는 지방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간혹 아는 방언이 나오면 특유의 발음이나 억양이 자동생성되곤 했다.
아 광주에서도 이런 말을 썼나보다싶어 놀라기도 했다.
'12월의 달력 앞에서' 에서는
마치, '너, 뭘했지?' 하는 것도 같고, '참 빠르다.' 하는 것도 같다는 글에
70이 넘은 노작가의 12월이나 30대의 내가 맞이하는 12월이나
다를 것 없이 애처롭고 허망한 일년의 마지막 달이란 생각이 들었다.
세월 앞에 노작가나 독자인 나나 모두 그저 쫒기는 가련한 사슴인가보다.
어이, <수필문학>, 자네는 영원한 내 친구네.
변심할 일 없는 영원한 친구 한명을 단단히 곁에 두고 있는 작가의 마음이 든든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