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걸어오다
박신일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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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걸어오다]

200710-0723

 

오랜만에 신앙서적을 읽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어서 부담이 적은 책이여서 좋았다. 그만큼 책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읽으면서 힐링이라고 까지 말하기는 뭐하지만, 잊고 있던 사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시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하나님인 동시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문장은 많다.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있다(특히 라헬에 관한 내용).

 

 

살아 있는 믿음은 그 음성에 반응하는 것입니다._P.53

야곱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빼앗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드리겠다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_P.86

마치 라헬이 안장에 드라빔을 깔고 앉은 것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안장에 깔고 앉은 죄악들이 있을 것입니다. P.149

 

 

 

이 책은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현타가 찾아오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점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와 비교해서 특정 인물을 치켜세우거나 책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한 인격, 그대로 대해주신다. 그에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자신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비참함을 위로하기 위해 타인의 아픔과 타인의 어떠함에 빗대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보면서, 문득 깨달은 사실이다. 나의 비참함은 '나의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 옳다. 진정한 위로자 되시기 때문이다. 나의 절망감은 나의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맞다. 참된 소망이 되시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은 나의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을 감찰하시며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의 야곱의 처절함은 인상적이다. 두려움과 공존해온 시간만큼 그의 간절함이 보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는 처절함도 인상적이지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야곱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훨씬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삶의 고백이자 울분섞인 간절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솔직함이 '야곱입니다.'라는 답변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는 이게 아닐까. 야곱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인정하는 순간(kairos)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PR(public relations), 퍼스널 브랜드라고 해서 자신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자신의 강점과 지금까지 해온 것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어떤 시간을 보냈고, 무엇을 했는지 홍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알려서 몸값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자신답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역할을 강요받는다. 직장인, 회장, 리더, 전문가, 학생, 군인 등 여러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다. 역할에 충실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잘 하려는 의지는 좋으나, 역할이 자신은 아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이다. 물론 역할이 주는 무게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역할이 주는 무게는 삶의 무게에 포함된 것뿐이다. 자신을 모르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자신을 모르면, 그저 남이 하던 대로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게 될 뿐이다.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곳을 향해 가게 될 뿐이다.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잘하는 부분, 남들보다 뛰어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 역할의 '역할'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담당한다.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무언가를 결정하고 살아가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가는 경우도 많다. 고등학생때는 수능을 준비하고 대학교가 가장 큰 목표가 되고, 대학생 때는 취업을 걱정한다. 취업 후에는 결혼을 생각하고, 결혼 후에는 노후 준비를 시작한다. 다들 그렇게 준비하고 말하니까 이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혹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쉬운 게 아니다. 남들은 다 하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는 모습을 볼때 현타가 찾아온다. 역할에 충실하기 역시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N포 세대라는 말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N포를 넘어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이생망'이라는 줄임말도 존재한다. 취업은 어렵고, 취업해도 어렵다. 내 집 마련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무언가를 얻기에는 어려운 요소들만 가득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이 없으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학업과 먹을 것, 관계, 연애 등 생각외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타격을 받는다는 점이다. 돈이 궁하면 약속잡기 싫어진다. 자신이 초라해보이기 때문이다. 숨고 싶어진다. 삶의 여유는 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와 쉼표(,)의 갯수에 좌우된다. 쉼표가 적을수록 그만큼 여유를 갖기 힘들다. 조급함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줄어든다. 현타가 찾아오고,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들에 비해, 그리고 특정한 누구에 비해 초라한 자신을 확인한다. 이뤄내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질때마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곤두박질친다. 점점 자존감과 자신감은 떨어진다. 그렇게 자신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갖지 못한, 그리고 가진 게 없는 현재가 영원할 것 같은 생각에 그것들로 자신을 규정한다.

그러나 현재로 자신을 규정짓는 모습은 가진 게 없는 사람만 해당되는 모습이 아니다. 모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등 현재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에서 문을 열어주지 못한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아간다. 하지만 질문이라는 녀석들은 집요하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에 몇 차례 방문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문하는 녀석들을 맞이하지 못할 때마다 회의는 짙어진다. 분명 찾아왔던 녀석들인데, 맞이하지 못하는 자신과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생각이 회의에 파묻히게 만든다. 이처럼 자신을 향한 질문들에 직면하지 않으면 현타를 피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니 모두에게는 야곱과 같이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지금의 어떠함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함께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간절한 울부짖음이 필요하다. 지금의어떠함이 나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나 자신은 아니다. 나의 일부일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이룬 것과 갖고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빼앗는 자', '발 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는 야곱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간다. 갖지 못하는 것보다는 갖고 있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돈과 야망은 미덕이다.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꿈꿀수록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야곱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싸게 값진 것을 얻는 것(팥죽-장자권)을 취하는 것은 지혜로움이다. 이것만 얻으면,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에 성공학과 주식투자, 재테크,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하다. 모두 야곱처럼 얻고 싶은 게 많다.

실제로 야곱은 많은 것을 얻었다. 아내를 얻었고, 가족을 갖게 되었다. 또한 많은 재산을 얻었다. 지금의 N포 세대와 달리 이룰만큼 이뤘다. 비록 자신보다 더 독한 라반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20년 동안 열정페이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열정페이를 해서 얻었지 않은가. 많은 부를 축적했지 않은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현재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아니 노오오오력으로도 얻기 힘든 것을 야곱은 얻지 않았는가.

하지만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야곱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의 많은 재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어릴 적 형을 속여 축복을 빼앗은 야곱.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한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일 생각을 갖고 있음을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듣고는 고향을 도망쳐 나왔다. 이제 그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다. 마음이 편치 않다. 여전히 형이 나를 죽이면 어쩔까, 나의 가족을 해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 이 두려움 때문에 형을 만나기 앞서 많은 예물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과 가축들을 앞에 보내고 자신은 제일 마지막에 갈 생각으로 홀로 남는다.

이 홀로 남은 시간, 이때 하나님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다.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고 마하나임을 고백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홀로 있는 시간, 야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자와 처절한 씨름을 한 모습에서 어렴풋이나마 예측해 볼 수 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세기 32:24-29

우리의 인생도 같지 않을까. 내 안에 있는 근본적인 두려움, 이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고는 많은 걸을 이루고 얻는다 한들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에 직면하게 되는 두려움, 그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나의 지금을, 지나온 시간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해결방법이다. 그럴 때 야곱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러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럴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불행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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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택 2020-07-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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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리뷰도 있습니다.
 
기독교 팩트체크 - 기독교 핵심 질문에 26권의 변증서로 답하다
안환균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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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된다.
팩트체크를 위한 시간과 수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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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팩트체크 - 기독교 핵심 질문에 26권의 변증서로 답하다
안환균 지음 / 두란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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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믿으면 거짓도 진실이 된다.

 팩트체크를 위한 시간과 수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찾아간다.

 

팩트를 체크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가짜인 이유를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한 수고도 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바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팩트를 체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들리는 데로 살아가는 게 훨씬 편해 보인다. 그래서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팩트체크. 요즘 각 방송사마다 꼭 있는 코너다. 어느 순간부터, 팩트체크가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 하나하나 점검할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유익하다. 뭐랄까. 팩트체크가 기다려지게 된다. 팩트체크를 하면 필연적으로 가짜는 탈로난다. 가짜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 속이 시원하다. 주장이 너무 바보같아 보여서. 이 맛에 팩트체크를 챙겨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 사실을 확인하면, 가짜는 저절로 드러난다.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럴듯하게 둔갑한 어리석음이 보인다. 그래서 사실이 중요하다. 이익을 얻기 위해 가짜를 양산하는 이들의 모략을 헛수고로 만들 수 있다. 농락거림이 될 뻔한 사람들이 거짓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사실을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을 알면 다른 사람을 돕는 것까지 가능하다.

이런 맥락에서 '변증학'도 동일하다. 사실을 알아야 가짜를 분별할 수 있다. 가짜를 걸러내야 시간을 속량할 수 있다. 가짜가 섞인 정보로부터 체크하는 시간을 투자해야만 사실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짜에 속고 만다. 교묘하고 그럴듯하게, 그리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다가오는 것이 가짜의 전략이다. 사실을 위한 시간이 투입되어야 새로운 시간이 산출된다. 가짜들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는 새로운 시간이다. 이런 시간은 또 다른 새로운 시간을 불러온다. 시간 속에 시간을 심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변증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철학과 과학, 종교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대답을 구축해야 성경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효과적인 기독교 변증이 가능하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세인들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사고방식으로 그들의 편견과 오해를 먼저 걸러 주지 못한다면, 믿음의 길로 안내하기 어렵다.

《기독교 팩트체크》, p.201

 

 

팀 켈러의 《하나님을 말하다》, 《고통에 답하다》, 《답이 되는 기독교》를 읽으면서 두란노에서는 서포터즈를 안 뽑나 하던 찰나, 두포터 10기를 모집한다고 해서 후다닥 신청했다. 그리고 두포터 10기로 선발되었다.

두포터 10기 첫 활동 서평 작성 책으로 《기독교 팩트체크》가 왔다. 개인적으로 변증에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분야라 좋았다.

우선 목차를 보고 설렜다.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호기심을 자극했다. 생각해 본 질문들과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들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확실히 책을 읽으면서 관심의 중요성을 경험할 수 있었다. 평소 관심 있었던 파트에서는 잘 읽히기도 하고 가이드라인이 잡혀갔다. 그러나 관심이 없었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과 내용들에서는 혼란이 컸다. 어렵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추천할 대상이 떠올랐다.

책은 26권의 변증서로 기독교 핵심 질문에 답한 것이라 각 책에 대한 서평 혹은 서론 느낌이 난다. 하나의 주제를 갖고 이루어진 책이 아니다보니, 특정 주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26권의 변증서로 답한 책이니 만큼, 각 파트의 분량을 그렇게 길지 않다. 그래서 안내서 정도로 생각하는 게 좋을 듯 싶다. 관심 있는 주제가 있다면, 저자가 인용한 책을 읽거나 각 장 뒤에 있는 '더 깊은 탐구를 위한 관련 도서'에 있는 도서를 구입해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반대로, 정말 작정하고 공부하거나 그룹을 만들어서 공부할 사람에게는 입문서 용도로는 추천하고 싶다. 어떤 분야를 건드려야 할 지 모를 때, 이 책은 지도(Map) 역할을 할 것이다. 평소 기독교 변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거나, 같이 공부할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책을 읽고 질문을 발전시켜 나가며 쌓아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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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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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을 위한 카르페 디엠이 아닌

생활방식을 위한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쉽다. 어떤 목적 없이 그냥 감정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즉흥적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면 된다. 바쁜 일상과 잦은 모임, 해야 할 것의 연속으로 구성된 하루는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열거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목적 없이 즉흥적인 매일의 연속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를 관리하기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고, 중독에 빠지고, 쾌락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자랑스레 말한다. "몇시간 밖에 자지 못했고, 며칠 째 ~하고 있다."

젊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라는 생각에 기회가 될 때마다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워라밸이라는 이름으로 퇴근을 일찍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실제로 정시퇴근이 가능한 곳도 많아졌다. 퇴근후에 삶은 어떨까? 대부분은 밸런스가 맞지 않다. 쉼을 원하지만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중독으로 빠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혹은 밸런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일하는 시간만큼 쉬기 위해 애쓰는데, 사실 밸런스는 5:5가 아니다. 1:9도, 2:8일지라도 균형만 맞다면 그게 바로 밸런스이다. 자신의 밸스를 모른다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어도 워라밸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한 번 흘러간 물에는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 또한 구덩이가 매워져야만 물은 흐를 수 있다. 인생 역시 동일하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같은 사건과 같은 선택의 순간이 돌아올 뿐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 시간은 결코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다. 무저갱 같은 니힐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카르페 디엠은 불가능한 채, 단지 오늘만을 위한 카르페 디엠을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의 의미를 알려면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그 고민의 시간이 없다면 워라밸은 없을 것이다. 자유라 착각하는 바쁨이 잠식할 것이다. 바쁨 속에서 활력을 찾는, 점점 자신을 소진시키는 긍정성의 과잉이 라이프를 조금씩 조금씩 붕괴시킬 것이다. 진정한 오늘이 없다면,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오늘'을 버리면 내일의 의미는 퇴색된다. 하루하루가 모여 비로소 인생이 된다는 점과 하루의 일들은 어떻게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A사건이 B사건과 단절되어 보이지만, A부터 Z까지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 사건을 별개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살면서 경험했듯이 영향력의 차이만 있을 뿐 유기적이다.

시간의 의미를 알려면, 자신의 하루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하루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여러 시간관이 자신의 입맛대로 버무려진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체계적으로 우리는 일정한 비율로 맛있게 섞지 않았다. 살다 보니 맛있는 비율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건강식이 아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시간관이 있는지 외울 필요는 없지만, 어떤 시간관이 나에게 유익한지는 알 필요는 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으라”, 또는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이상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성취해야 할까?

요컨대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셋 모두를 이루려면 충족해야 할 요건이 있다.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전체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서문 p.37-38 中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까? 시계가 알려주는 숫자에 의존해 살까?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시계의 역할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초침의 성실한 분주함이 분침과 시침을 움직인다. 초침은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움직여 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보여준다. 이런 시계도 건전지가 없다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계가 시간을 나타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점에서 말이다. 초침이 분침과 시침을 움직여 시간을 나타내듯, 일상의 시침이 별개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사건이라는 분침과 인생으로 드러난다.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무기력에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지라도, 혹은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시간은 성실히 흐른다.

(중략)

 

시계는 성실히 움직이는 시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나타낼까. 시계는 자신의 역할을 알지 못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시계의 역할은 시계를 만든 사람이 안다. 또한 시간을 보는 사람이 시계의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장의 역할, 직급에 맞는 역할, 분위기에 따른 역할, 구성원에 따른 역할, 배운 것에 따른 역할 등. 이처럼, 역할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스스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역할은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살아온 시간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을 지은 존재만이 정체성을 알려줄 수 있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 듯, 사람을 보고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본질이지 않을까. 시계의 존재이유는 시간인 것처럼, 사람의 존재이유는 창조주에게 있지 않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계가 필요 없듯, 창조주가 없다면 사람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단지 우연의 산물이었다면 더욱이.

거대한 어둠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만큼, 오늘날 카르페 디엠의 이상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이타심과 빛나는 자선이 눈에 띌 가능성은 별로 없다.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오늘을 붙잡으려는 충동이 이기심이나 반항이나 절망의 행위로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이타심, 자선, 장기적 사고방식은 시시한 소리에 불과하다. 카르페 디엠은 부자와 탐욕스러운 자의 표어가 될 확률이 높고, 결국 "잡을 수 있는 동안 기회를 붙잡아라"가 될 것이다. 이런 유령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유대교와 기독교의 약속은 매우 분명하다.

p.206-207 中

너는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 30:19

가장 위대한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고 즐길 수 있다. 인생은 짧지만,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인생을 최대한 선용하고, 하루하루를 붙잡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시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을 따른다면, 인생은 의미를 제공하고 그 의미심장함이 인생의 짧음을 훨씬 능가하는 전망을 열어 준다. 시간은 순환적인 것 이상이고, 그 직선적 진행이 구성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역사는 단일하고 우리는 중요하므로, 우리의 존재와 모든 행위는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시간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 세상이 잘못되고 악과 불의가 도처에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 진행 중인 온 지구의 화해와 수선과 회복 작업에 동참하는 그분의 협력자가 되도록, 그리고 우리 인생의 공저자가 되도록 초대하신다.

p.206-207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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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앨런 그린스펀.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지음, 김태훈 옮김, 장경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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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의 대서사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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