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가 걸어오다
박신일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https://blog.naver.com/young-taek/222047705858

 

[은혜가 걸어오다]

200710-0723

 

오랜만에 신앙서적을 읽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어서 부담이 적은 책이여서 좋았다. 그만큼 책 내용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읽으면서 힐링이라고 까지 말하기는 뭐하지만, 잊고 있던 사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시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하나님인 동시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문장은 많다. 새롭게 알게 된 부분도 있다(특히 라헬에 관한 내용).

 

 

살아 있는 믿음은 그 음성에 반응하는 것입니다._P.53

야곱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빼앗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드리겠다는 말이 처음 나옵니다. _P.86

마치 라헬이 안장에 드라빔을 깔고 앉은 것처럼

우리도 자신만의 안장에 깔고 앉은 죄악들이 있을 것입니다. P.149

 

 

 

이 책은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현타가 찾아오지 않을 사람은 없으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인정하는 순간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놀라운 점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와 비교해서 특정 인물을 치켜세우거나 책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한 인격, 그대로 대해주신다. 그에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자신을 세우기 위해, 자신의 비참함을 위로하기 위해 타인의 아픔과 타인의 어떠함에 빗대어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가. 그것은 옳지 않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을 보면서, 문득 깨달은 사실이다. 나의 비참함은 '나의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 옳다. 진정한 위로자 되시기 때문이다. 나의 절망감은 나의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맞다. 참된 소망이 되시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은 나의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을 감찰하시며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이다.

얍복강에서의 야곱의 처절함은 인상적이다. 두려움과 공존해온 시간만큼 그의 간절함이 보이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를 놓지 않는 처절함도 인상적이지만,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야곱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훨씬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삶의 고백이자 울분섞인 간절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솔직함이 '야곱입니다.'라는 답변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언어는 이게 아닐까. 야곱처럼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인정하는 순간(kairos)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PR(public relations), 퍼스널 브랜드라고 해서 자신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나를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자신의 강점과 지금까지 해온 것으로 자신을 알리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어떤 시간을 보냈고, 무엇을 했는지 홍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알려서 몸값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우선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자신답게 살고 있을까.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역할을 강요받는다. 직장인, 회장, 리더, 전문가, 학생, 군인 등 여러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다. 역할에 충실하다보면,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잘 하려는 의지는 좋으나, 역할이 자신은 아니다. 역할은 역할일 뿐이다. 물론 역할이 주는 무게가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역할이 주는 무게는 삶의 무게에 포함된 것뿐이다. 자신을 모르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자신을 모르면, 그저 남이 하던 대로 남이 하는대로 따라하게 될 뿐이다.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곳을 향해 가게 될 뿐이다. 역할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수단이다.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잘하는 부분, 남들보다 뛰어난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 역할의 '역할'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담당한다. 역할을 수행하는 가운데, 무언가를 결정하고 살아가기 급급한 경우가 많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가는 경우도 많다. 고등학생때는 수능을 준비하고 대학교가 가장 큰 목표가 되고, 대학생 때는 취업을 걱정한다. 취업 후에는 결혼을 생각하고, 결혼 후에는 노후 준비를 시작한다. 다들 그렇게 준비하고 말하니까 이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혹은 당연해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쉬운 게 아니다. 남들은 다 하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는 모습을 볼때 현타가 찾아온다. 역할에 충실하기 역시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N포 세대라는 말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N포를 넘어 "이번 생은 망했다"라는 '이생망'이라는 줄임말도 존재한다. 취업은 어렵고, 취업해도 어렵다. 내 집 마련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무언가를 얻기에는 어려운 요소들만 가득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이 없으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학업과 먹을 것, 관계, 연애 등 생각외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존감과 자신감이 타격을 받는다는 점이다. 돈이 궁하면 약속잡기 싫어진다. 자신이 초라해보이기 때문이다. 숨고 싶어진다. 삶의 여유는 통장 잔고에 찍힌 숫자와 쉼표(,)의 갯수에 좌우된다. 쉼표가 적을수록 그만큼 여유를 갖기 힘들다. 조급함에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줄어든다. 현타가 찾아오고,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들에 비해, 그리고 특정한 누구에 비해 초라한 자신을 확인한다. 이뤄내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마다, 이룬 것이 없다고 느껴질때마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곤두박질친다. 점점 자존감과 자신감은 떨어진다. 그렇게 자신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갖지 못한, 그리고 가진 게 없는 현재가 영원할 것 같은 생각에 그것들로 자신을 규정한다.

그러나 현재로 자신을 규정짓는 모습은 가진 게 없는 사람만 해당되는 모습이 아니다. 모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등 현재 자신에 대한 질문들이 갑작스레 찾아온다.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에서 문을 열어주지 못한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아간다. 하지만 질문이라는 녀석들은 집요하다. 대접받고 싶은 마음에 몇 차례 방문하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문하는 녀석들을 맞이하지 못할 때마다 회의는 짙어진다. 분명 찾아왔던 녀석들인데, 맞이하지 못하는 자신과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생각이 회의에 파묻히게 만든다. 이처럼 자신을 향한 질문들에 직면하지 않으면 현타를 피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니 모두에게는 야곱과 같이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솔직함이 필요하다. 지금의 어떠함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과 함께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말할 수 있는 간절한 울부짖음이 필요하다. 지금의어떠함이 나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나 자신은 아니다. 나의 일부일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이룬 것과 갖고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빼앗는 자', '발 뒤꿈치를 잡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는 야곱처럼 무언가를 얻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간다. 갖지 못하는 것보다는 갖고 있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돈과 야망은 미덕이다.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꿈꿀수록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야곱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싸게 값진 것을 얻는 것(팥죽-장자권)을 취하는 것은 지혜로움이다. 이것만 얻으면, 더 좋아질 거라는 생각에 성공학과 주식투자, 재테크,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건 당연하다. 모두 야곱처럼 얻고 싶은 게 많다.

실제로 야곱은 많은 것을 얻었다. 아내를 얻었고, 가족을 갖게 되었다. 또한 많은 재산을 얻었다. 지금의 N포 세대와 달리 이룰만큼 이뤘다. 비록 자신보다 더 독한 라반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20년 동안 열정페이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열정페이를 해서 얻었지 않은가. 많은 부를 축적했지 않은가. 자신을 믿고 따르는 가족들이 있지 않은가. 현재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아니 노오오오력으로도 얻기 힘든 것을 야곱은 얻지 않았는가.

하지만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보이는 야곱에는 근본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자신의 많은 재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어릴 적 형을 속여 축복을 빼앗은 야곱. 그 사실을 알고 분노한 형 에서가 야곱을 죽일 생각을 갖고 있음을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듣고는 고향을 도망쳐 나왔다. 이제 그는 많은 것을 얻었지만,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무겁다. 마음이 편치 않다. 여전히 형이 나를 죽이면 어쩔까, 나의 가족을 해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 이 두려움 때문에 형을 만나기 앞서 많은 예물을 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과 가축들을 앞에 보내고 자신은 제일 마지막에 갈 생각으로 홀로 남는다.

이 홀로 남은 시간, 이때 하나님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는 야곱을 찾아오신다.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고 마하나임을 고백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은 남아 있었다. 홀로 있는 시간, 야곱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자와 처절한 씨름을 한 모습에서 어렴풋이나마 예측해 볼 수 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창세기 32:24-29

우리의 인생도 같지 않을까. 내 안에 있는 근본적인 두려움, 이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고는 많은 걸을 이루고 얻는다 한들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홀로 있는 시간에 직면하게 되는 두려움, 그때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나의 지금을, 지나온 시간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해결방법이다. 그럴 때 야곱을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러 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나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동행하셨던 하나님을 발견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럴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불행을 이깁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영택 2020-07-31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s://blog.naver.com/young-taek/222047705858
블로그에 리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