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이유 -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오스 기니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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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을 위한 카르페 디엠이 아닌

생활방식을 위한 카르페 디엠, 시간의 의미를 기억하라

시간을 흘려보내기는 쉽다. 어떤 목적 없이 그냥 감정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즉흥적으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면 된다. 바쁜 일상과 잦은 모임, 해야 할 것의 연속으로 구성된 하루는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열거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목적 없이 즉흥적인 매일의 연속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를 관리하기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고, 중독에 빠지고, 쾌락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자랑스레 말한다. "몇시간 밖에 자지 못했고, 며칠 째 ~하고 있다."

젊을 때,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라는 생각에 기회가 될 때마다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워라밸이라는 이름으로 퇴근을 일찍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실제로 정시퇴근이 가능한 곳도 많아졌다. 퇴근후에 삶은 어떨까? 대부분은 밸런스가 맞지 않다. 쉼을 원하지만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다른 중독으로 빠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혹은 밸런스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일하는 시간만큼 쉬기 위해 애쓰는데, 사실 밸런스는 5:5가 아니다. 1:9도, 2:8일지라도 균형만 맞다면 그게 바로 밸런스이다. 자신의 밸스를 모른다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어도 워라밸은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한 번 흘러간 물에는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 또한 구덩이가 매워져야만 물은 흐를 수 있다. 인생 역시 동일하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같은 사건과 같은 선택의 순간이 돌아올 뿐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지 못한 시간은 결코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다. 무저갱 같은 니힐니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카르페 디엠은 불가능한 채, 단지 오늘만을 위한 카르페 디엠을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의 의미를 알려면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그 고민의 시간이 없다면 워라밸은 없을 것이다. 자유라 착각하는 바쁨이 잠식할 것이다. 바쁨 속에서 활력을 찾는, 점점 자신을 소진시키는 긍정성의 과잉이 라이프를 조금씩 조금씩 붕괴시킬 것이다. 진정한 오늘이 없다면,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다. '오늘'을 버리면 내일의 의미는 퇴색된다. 하루하루가 모여 비로소 인생이 된다는 점과 하루의 일들은 어떻게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A사건이 B사건과 단절되어 보이지만, A부터 Z까지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 사건을 별개로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가 살면서 경험했듯이 영향력의 차이만 있을 뿐 유기적이다.

시간의 의미를 알려면, 자신의 하루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하루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시대의 흐름과 여러 시간관이 자신의 입맛대로 버무려진 것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체계적으로 우리는 일정한 비율로 맛있게 섞지 않았다. 살다 보니 맛있는 비율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이건 건강식이 아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시간관이 있는지 외울 필요는 없지만, 어떤 시간관이 나에게 유익한지는 알 필요는 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으라”, 또는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이상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성취해야 할까?

요컨대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할 수 없다. 셋 모두를 이루려면 충족해야 할 요건이 있다. 우리가 시간을 제대로 다루려면 시간의 창조자와 시간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창조자가 그의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에게 준 역할을 알아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만 시간과 역사 전체의 심오한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서문 p.37-38 中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까? 시계가 알려주는 숫자에 의존해 살까?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시계의 역할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초침의 성실한 분주함이 분침과 시침을 움직인다. 초침은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움직여 시간을 나타낸다. 그리고 보여준다. 이런 시계도 건전지가 없다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계가 시간을 나타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태어났다는 점에서 말이다. 초침이 분침과 시침을 움직여 시간을 나타내듯, 일상의 시침이 별개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사건이라는 분침과 인생으로 드러난다.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무기력에 빠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지라도, 혹은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시간은 성실히 흐른다.

(중략)

 

시계는 성실히 움직이는 시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나타낼까. 시계는 자신의 역할을 알지 못한다. 생각할 수 있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시계의 역할은 시계를 만든 사람이 안다. 또한 시간을 보는 사람이 시계의 역할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식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가장의 역할, 직급에 맞는 역할, 분위기에 따른 역할, 구성원에 따른 역할, 배운 것에 따른 역할 등. 이처럼, 역할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스스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역할은 정체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살아온 시간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을 지은 존재만이 정체성을 알려줄 수 있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 듯, 사람을 보고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본질이지 않을까. 시계의 존재이유는 시간인 것처럼, 사람의 존재이유는 창조주에게 있지 않을까.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시계가 필요 없듯, 창조주가 없다면 사람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단지 우연의 산물이었다면 더욱이.

거대한 어둠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만큼, 오늘날 카르페 디엠의 이상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이타심과 빛나는 자선이 눈에 띌 가능성은 별로 없다.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오늘을 붙잡으려는 충동이 이기심이나 반항이나 절망의 행위로 왜곡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 이타심, 자선, 장기적 사고방식은 시시한 소리에 불과하다. 카르페 디엠은 부자와 탐욕스러운 자의 표어가 될 확률이 높고, 결국 "잡을 수 있는 동안 기회를 붙잡아라"가 될 것이다. 이런 유령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유대교와 기독교의 약속은 매우 분명하다.

p.206-207 中

너는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신 30:19

가장 위대한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고 즐길 수 있다. 인생은 짧지만,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고, 인생을 최대한 선용하고, 하루하루를 붙잡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시간과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을 따른다면, 인생은 의미를 제공하고 그 의미심장함이 인생의 짧음을 훨씬 능가하는 전망을 열어 준다. 시간은 순환적인 것 이상이고, 그 직선적 진행이 구성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중요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역사는 단일하고 우리는 중요하므로, 우리의 존재와 모든 행위는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시간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 세상이 잘못되고 악과 불의가 도처에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현재 진행 중인 온 지구의 화해와 수선과 회복 작업에 동참하는 그분의 협력자가 되도록, 그리고 우리 인생의 공저자가 되도록 초대하신다.

p.206-207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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