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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생과 죽음이 격렬하게 대비되면서도 또 끈덕지게 들러붙어 있다.
제대로 조여주지 못해 흘러내리는 아내의 똥물이나
제대로 열리지 못해 고여가는 남자의 오줌은 죽음을 알리는 시그널같다.
그러면서도 살아있다는, 살아가고 있다는 근거다.
MRI 사진 속에서 밝고 환하게 반짝이는 종양의 모습이 삶이 아니듯
악취 풍기고 거북살스럽다고 해서 죽음의 증거가 아니다.
악취가 수치스럽고 거북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결국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생의 비율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명쾌한 죽음에는 그런 여지조차 없다.
죽음은 급속냉동과 화장 속에서도 의연하다.
몇 토막 뼈조각과 부스러기들은 수치를 모른다.
굶고 있을 애완견도 걱정하지 않는다.
확고부동한 죽음이 되려면 이쯤은 돼야 한다.
그러나 자신이, 우리가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여기는 남자에게는
'추은주'로 대변되는 확고한 삶의 증거만을 연모할 따름이다.
제대로 조이고 제대로 열리는, 제대로 오물거리고 제대로 내딛는 추은주와 그녀의 아기.
그것은 변질되거나 의심받을 것도 없이 확고부동한 삶이요 생명이어서
남자는 경외하며 흠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씻은 물김치를 받아먹던 조그만 아기의 입도
언젠가 제대로 닫히지 않으며 입 속 침 따위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마치 여기서 위싱턴만큼이나 뚝 떨어져 존재하는 삶은 없다.
죽음에 수렴하는 삶이 아니라 열리고 닫히고 고장나고 수치스럽고 하는
삶 자체가 그냥 삶이다.
죽음은 완전히 별개여서 누구나 알아챌 수 있다.
(2008.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