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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 마운틴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고트
마운틴 -데이비드
밴
규범과
본능에 관한 치열한 고찰
[네
명의 사내가 사슴 사냥을 하러 고트 마운틴으로 갔다.
자신들의
토지에서 밀렵을 하는 사람을 열 한 살 아이가 총으로 쏘아 살해하게 되고 이들은 남은 사냥 캠프 기간동안 서로 갈등한다.]
이
책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시간적으로는
사냥 캠프 기간인 이틀,
장소는
야생의 모습을 간직한 고트 마운틴,
중심
사건은 어린 아들의 밀렵꾼 살해,
등장인물은
단 네 명.
무척
단순한 얼게를 가지고 있지만 소설의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글은
시종일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의 상당부분은 공간적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문장들이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듯,
세밀화를
그리듯 아들의 눈을 통해 자세하게 묘사되는 자연의 풍경을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때로는 어지럽고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빙빙도는 어린 시절 놀이기구를 탄 채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판타지한
공간이 아니라 현실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의식과 함께 묘사되기도 하고 비유(특히
은유)와
상징이 뒤섞여 있어 어지럽게 느껴진다.
역자가
번역의 난해함을 토로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한낮의 무더위,
인간을
보잘 것 없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자연(산)이
주는 위압감과 야생성을 독자로 하여금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읽은 어떤 독자는 책을 끝까지 읽기 힘들었다고도 한다.
몇
번이고 책을 그만 읽고 싶다 생각했으며 다 읽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도 했다.
그
독자의 말도 일부 공감이 간다.
그만큼
쉽지 않은 글이다.
나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읽기도 했고,
다시
이전 문단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도 했다.
이
소설의 배경처럼 한 낮 무더위에 거친 수풀을 헤치고 다니는 느낌으로 읽었기에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를
읽는 것 같았다.(개인적으로는
고트 마운틴이 좀 더 어렵지만 훨씬 재미있었다)
이
작가가 왜 헤밍웨이와 코맥 매카시와 비교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내용으로
돌아가 보면 열 한 살 아들의 성인식으로 마련된 사슴사냥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데에서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고조된다.
도덕을
최우선으로 삼아 온 아버지는 살인자로서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여 이를 은폐하려고 하고,
문명
이전이자 나를 통해 악의 상징이 되어 있는 할아버지는 손자를 악마처럼 생각하며 죽이려고 한다.
톰
아저씨는 이 사건 초기부터 진실을 밝혀 아들과 이 사건을 은폐하려는 삼부자를 신고하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생각도 변하고 이들의 갈등은 서로 크게 부딪쳐 불꽃이 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냥을 멈추지 않는다.
예정되었던
대로 사슴 몰이와 사슴 사냥을 한다.
솔직히
이런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는 데도 시체를 캠프에 걸어 놓고 사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밤에는
서로 이를 드러내며 심하게 갈등하지만 낮에는 사슴 사냥에 몰두하는 것 처러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잊은 듯,
사냥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모두 합심해야 성공할 수 있는 사슴사냥에서 서로의 마음에 미묘하게 균열이 가는 것이 느껴진다.
예정된
캠프의 마지막 날을 마지노선으로 그들은 각자의 입장을 세우는 듯 보인다.
마치
격론이 오가는 토론의 끝에 자신의 입장을 정해 강하게 주장하는 것 처럼.
'나'는
결국 사슴 사냥에 성공하지만,
축하받지
못한다.
이
여행의 취지이자 성인으로서 인정 받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지만 냉대 속에 사냥한 사슴을 개복하고,
사슴과
함께 버려진다.
어쩌면
사슴사냥으로 '어른'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은 형식적인 성인식일 뿐이라고 생각한건지도 모르겠다.
첫번째
살인을 함으로써 이미 비공식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는 '어른'이
되었음을 그들에게 인정 받은 것일지도...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미성년자라 사회에서는 살인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없기에,
소설
말미에서 할아버지는 그만의 방식으로 손자에게 '어른'으로서의
책임감과 삶의 무게를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 깊은 세 부분을 꼽아보자면,
첫째는
인물의 상황과 마음을 반영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묘사이다.
헤치고
지나갈 때마다 발을 붙잡고 온 몸에 생채기를 내는 가시덤불,
온
몸으로 퍼지며 극심한 가려움을 주고 긁기라도 하면 더욱 통증을 주는 옻독,
풀로
올가미를 만들어 도마뱀을 잡고 놓아주었을 때,
목에
올가미를 걸고 평생 살아야할 도마뱀의 모습을 생각하는 장면은 주인공 '나'의
모습과 상황을 반영하는 듯 하다.
둘째는
종교(신)와
야생,
도덕에
관한 철학적 의문이다.
'나'는
자신의 살인을 성경 속 카인과 연관 짓는다.
인간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후예이기에 살해본능은 이미 타고난 본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너그럽지 못한 신의 모습에 대한 원망도 나온다.
십계명은
어차피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를
이루고 법과 도덕을 만들어 지키는 세계가 아닌,
야생의
모습을 간직한,
그것도
악마의 모습과 닮은 염소의 이름을 가진 산 속에서는 우리 세계의 법과 도덕이 무의미하다.
할아버지로
대변되는 힘과 악에 의해 룰은 바뀌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나'의
시선으로 본 밀렵꾼 시체에 대한 냉혹한 묘사이다.
그는
시종일관 감정을 배제한 채 시체에 대해 묘사를 한다.
분명
끔찍한 모습인데도,
'웃고
있다'든지
'빌고
있다',
'즐거워한다'라고
말한다.
이후
사슴 사냥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애처로움을 느끼며,
그
상황을 돌리고 싶어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런데
시체를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데 너무 실감나서 소름이 돋았다.
시체의
모습과 표정이 눈 앞에 생생하게 나타났고,
끝까지
죄책감 없이 자신이 죽인 시체에 대해 한 톨의 연민도 없이 묘사할 수 있는 섬뜩함에 사실 난 이 책을 읽는 기간동안 악몽을 꾸기도
했다.
법과
규범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무작위이
뿐'이라는
'나'의
생각에 따른다면 사실 살인이냐,
사냥이냐를
구분 짓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는
첫번째 '살해'행위는
어른임을 인정받는 행위일 뿐이라 생각하고,
그
이후의 '살해'행위를
통해 비로소 무거운 책임감과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할 줄 알게 된 것 같다.
성인식의
대상이 사슴이 아니라 사람으로만 바뀐 것이 뿐이라는...
끝으로
사슴사냥에 성공한 후 개복의식에 관한 묘사도 압권이다.
특히
나는 '의식은
끔찍한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 가슴에 내리꽂혔다.
산
제물,
전족,
할례,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등등...
법과
도덕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문명화된 사회에서도 인간은 '의식'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잔인한 행위들을 자행했는가?
과연
남의 땅에서 밀렵하던 나쁜 사람을 살해한 행위가 우리가 암묵적으로 용인해왔던 위의 비인간적인 문화보다 나쁘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그래서
'우리가
지옥에서 끌어야 할 시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라는
책 속의 말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125쪽
우리는,
개미굴을
따라 행군하는 개미들처럼 왔던 길을 되짚어 가고 있었다.
인지작용일
뿐인 습관적인 움직임.
새로운
발견과는 거리가 먼.
난
그런 생각이 맘에 든다.
그때
그 방아쇠도 내가 아니라 그전의 어느 세대가 당긴 것이다.
인지하기는
했어도 의도하지는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손이 내 안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 같은.
126쪽
톰
아저씨가 언젠가 어린 사슴을 다치게 한 곳이어서,
이지역을
지날 때마다 다들 그 일을 떠올렸다.
늘
그렇듯 교훈을 남기지만,
교훈의
맥락이 애매모호한 그런 이야기.
뿔이
아직 갈라지지 않은 어린 사슴은 쏘지 말 것.
(...) 계약은
법과 규범을 따른다.
어떻게
그런 규정들이 생겼는지 모른다해도 마찬가지다.
암사슴을
쏘는 것마저 합법인 나라도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가,
어떤
규칙을,
왜
따르는지 누가 알겠는가?
불가침인
듯 보이는 것들도 대개는 무작위일 뿐이다.
아무
근거도 없는.
172쪽
카인은
동생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내리친다.
이때
카인은 본성을 완전히 드러낸다.
이제는
그 역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그
순간 우리는 카인의 실체를 알아차린다.
그의
삶을 이끄는 힘은,
완전히
어긋나고 왜곡되었으며 너무 늦게 인지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카인의 후예가 되었다.
본능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느 것이다.
의식에
배신당한 동물적 본능.
성경의
선(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성경은
우리가 각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낙원에서
어떻게 처음으로 수치심을 배웠는지,
인간이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를 되살려낸 인간 본래의 꿈이다.
카인은
우리의 일부가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최초의 인물이다.
우리
일부는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 최최의 본능에는 살인 충동이 있다.
십계명은
우리는 결코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우리 본능의 목록이다.
184쪽
짐승은
모두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들었지만,
당연히
거짓말이다.
사슴은
제 영역을 위해 싸웠다.
울부짖고
뿔을 흔들고 목을 젖히며 나를 떨쳐내려 했다.
사슴은
살고 싶어했다.
죽은
남자에게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살해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도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슴의 목을 잡은 두 손엔 사슴의 맥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공포와
처절한 상실감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핻 공정해질 수 없는 것.
바로
우리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죽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살상을
통해 모든 것을 빼앗는다.
내가
직접 파괴하 이사 재생은 불가능하다.
살상에
대한 욕망도 사라진 지 오래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려 총으 쏘지 않고 사슴ㅇ
숲속으로
달아나게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회한에
가득 찼지만,
당시엔
그런 단어조차 알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5쪽
하지만
나는 그전과 달랐다.
그
순간 이후 살상은 늘 내게 너무 가혹했다.
살상은
언제나 강요에 따라 일어났다.
내가
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인간이 되었다.
피할
수 있었지만 살상을 하고,
원하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죽였다.
187쪽
의식(의식).
의식은
끔찍한 행위를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나는
어느새 이 개복의식에 적응하고 있었다.(...)
바로
몇 분 전의 살상은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어 나를 위협하지 못했다.
202쪽
우리가
지옥에서 끌어야 할 시체는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존재,
그
존재의 무게를 우리는 뒷걸음으로 질질 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