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문학과지성 작가론 총서 9
김광규 / 문학과지성사 / 199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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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말만들어 붙이는 식의 글쓰기(김현이나 일반적으로 시비평에서 흔히 쓰는)는 없을 지라도, 작품내용의 소재를 작가 생애와 일일이 비교 대조하는 문헌적 비평들을 짜집기 해놓았다. 벤야민은 여전히 옆길로 새는 삽화들만 읊고 있고 까뮈는 인생을 공연해야 한다는 부조리적 상황으로서의 카프카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또 희극보다는 비극에서 보다 더 형식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다시 써먹는 까뮈를 보니 '시지포스신화'에서 철학교과서를 만들고 있구나 생각했던 옛날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요즘 새롭게 등단하는 이들의 말을 보면 습작 기간 중에 읽어야 할 작가 중에 빠지지 않는 이가 카프카인 것 같다. 보통 습작기간 중에는 세계명작들을 두루 섭렵해야 하는데 거기서 글을 이끌어나가는 형식과 구성상의 기법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신세대 소설가들이 특징인 형식상의 화려함은 그에 수반하는 깊이 있는 보편성을 가지지 않기에 유치해 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패러디란 용어로 이인화 같은 놈은 책을 베끼는 것을 정당화하지만 사실 포스트모던의 명작을 직접 읽어 보면 형식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의 깊이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카프카의 화법은 체험화법 erlebte Rede 라고 말해진다. 3인칭 서술을 해나갈 때, 작중의 어느 한 주인공을 매개로 하고, 그 주인공이 체험하는 어떤 사실을 내적인 독백으로 처리하되, 객관적 서술의 범위와 어긋나지 않게 초점을 모으는 것이다.

보통 상징이라든가 신화적 원형 같은 문학 비평의 기본알레고리들이 카프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리오타르가 말한 바와 비슷하게 개념과 사물을 일치시키는 오성의 능력으로는 카프카가 제시하는 상황의 모습은 그저 막연할 뿐이다.

'우리의 임무는 현실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 될 수 없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암시들을 창안해 내는 것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리오타르)

모순되고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카프카의 책을 읽고 난 아무런 글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서 약간의 위안은 받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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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 강 /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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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1915-80)의 결과로 프랑스 문학사는 기호학을 갖게 된 것이다.' 라는 김현의 찬사로서도 알 수있듯이 프랑스 사상사에서 바르트의 위치는 확고하다.

일종의 상대주의적 인식론은 절대적이고 객관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인식론의 근거를 뒤흔들게 된다. 2차 세계대전 후 대중사회가 가져다 준 계층 문제의 변화는 바르트가 푸코와 그리 다르지 않은 정치적인 분석을 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즉 무지한 대중들에 주어진 새로운 생활 양식, 예술양식들에 대한 회의로서, 대중일반들은 지배계층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방식으로 교육받지는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지배계층의 안전을 위해서이지 않은가 하는 의심에 그의 예술론은 바탕을 둔다. 이러한 탐구의 연장선상에 바로 '신화학'이 위치하며 코노테이션적 측면에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에서 그의 '탈신화화'적 작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학> : 바르트는 문학이 결정적으로 객체화 된 것은 1850년 이후라고 하며 제도화된 문학에 대한 성찰을 발전시킨다. 이는 단지 사회의 모사나 영향 아래에서의 문학을 그 자체로 '기호의 역사'라 부르며 독립시키는 것이다.

'그 때 문학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살고 있는 역사적 불투명성의 기호가 된다. 그 질문은 세계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세계는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고, 여기에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 의미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문학은 그 때 진실이 된다. 그 문학의 진실은 세계가 자기의 불행에 대해 제시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불가능하는것 그 자체이다.'

그는 명확한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인 문헌학적인 것과 시대상황에 바탕을 둔 역사적 비평에 반대한다. 즉 가장 작품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명확한 작품 그 자체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며 비평은 작품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해 말한 것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비평과 책읽기를 구별하며 작품과 욕망 관계를 맺는 책읽기를 언급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을 욕망한다는 것이며 작품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며 작품의 말 외의 다른 말 밖으로 작품을 배가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에 대한 그의 해석은 그가 좌파쪽에서 부르조아 이론가라는 비판을 받는데 일조를 한다.

<언어와 문체> : 바르트에게 있어서 제도로서 미리 주어진 랑그로서의 '언어'에 비해 '문체'가 가지는 영역은 보다 자유롭다. 즉 그에게 문체란 저자의 개인적이고 비밀한 심리적 충동의 산물인 목적없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잠재태> : 현대에 와서 많은 유토피아적 환상이 사라지고 절대적인 사고틀이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생동하는 말이나 문학어의 요구에 대해 그 숨어있는 잠재적인 연관을 찾으려는 시도가 필요하게 된다.

여기와 관련하여 바르트는 '백색기술'(이는 블랑쇼의 영향)이라는 용어로 이야기 상에서 표현되어지지 않는 '감추어진' 것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부르조아의 관습에서 탈피하려면 그것에 잠재되어 있는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형태마저 탈피하여야 한다는 것에서 전위주의와 통하는 그의 예술이론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선택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있다'

지드 때문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되었고, 니체때문에 심성을 문제삼게 되었다해도 그의 욕망은 마르크스(브리히트, 사르트르)와 프로이트(라강, 데리다)를 통합, 극복하려 한 유럽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꿈을 거기에 소쉬르를 이용하여 성취하려는 대체계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지겹도록 고민한 바르트의 내용을 간추려 보니, 그가 방향이나 체계에 있어 각 부분이 가지는 영역들을 고찰 할 때 비로소 부르조아 이론가로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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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돌 - 세계문제시인선집 9
옥따비오 빠스 지음 / 청하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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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19일은 옥따비오 빠스가 죽은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내가 그를 안 것은 대학 1학년 때 시동아리를 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선배들에게서 한국시에 대한 적절한 소개를 받을 수 없었기에 독학을 해야 했던 나는 자연히 외국시로 눈길이 가다 암송할 책으로 고르게 된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 아마 내가 지금도 시를 읽으며 가장 감동하는 말의 비약적 배열은 이 옥다비오 빠스에서 영향받은 것이리라.

'우정'이란 시:

기대하던 시간
탁자 위에
끊임없이
떨어지는 램프의 머리카락
밤은 창문만 키워놓고
아무도 없다
이름없는 존재가 나를 둘러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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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투명성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 문예출판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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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자의 위대성은 그가 사용하는 인용들의 넓이에서 찾아야 한다. 얇은 팜플렛 하나 읽고 그 철학자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기꺼이 십원짜리 욕을 뱉을 수 있다. 역시 의사소통이론과 같은 일반적 개론과는 달리 여기 이 책에서 보여주는 하버마스의 관심폭과 거기에서 자기의 논지를 이끌어 냄은 최고의 철학자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후기 계몽'이나 '탈현대'와 같은 개념들은 그 형식적 규정들과 기술적이고 규칙적 측면에 의해 자유적이고 전통의 부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운동과 그 붕괴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것들에 감추어진 의미는 무엇인가.

보수주의자들의 논의는 삶과 예술의 조화에 대한 문제를 단지 미적으로 치장하고 분리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반모더니스트들은 대중적 이론들을 들먹이며 건축문화의 탈분화를 목표로 하는데 반해, 같은 사안을 가지고 모더니스트들은 '파괴된 생활세계의 탈식민지화 문제'로 받아들이며 저항한다. 반모더니스트들의 보수주의적 경향과 모더니스트들의 진보주의적 경향에 대한 고찰은 결코 건축양식에 국한된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래 건축에 대한 새로운 재료와 기술, 새로운 구성욕구와 상황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두 시각의 분화는 뚜렷하다. 현대건축의 양상 : 대량생산과 재료의 변화에 따른 시각적 감성의 변화, 또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들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벤야민이 말한 '자극으로 가득 찼지만 진정한 만남이 부족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현대건축이 발생하게 된 것은 소외된 일상세계와 경제생활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궁핍한 서민생활에 호응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물론 근대 철학자들이 말한 예술의 이념적 화해과는 결별하는 것이 된다. 건축이 사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정신은 건물의 뒤로 숨어버려 위장된 현실을 보완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때 프로이트가 노이로제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대건축과 사상의 분리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과 방법이다.)

이러한 분리주의와 다양성에 맞서 현대모더니즘건축의 목적적인 기능주의는 다시 부활한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와 신조형주의자들의 목적은 환경을 포괄적 의미에서 다시 종합예술적 기능을 하는 문법을 지향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교육의 한 분야가 된 예술은 이제 사회적 환경에 통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이 통일성은 단순한 의자에서 예배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을 포괄하는 문화의 진정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반모더니스트들의 전통적 가치관의 부활과 연결하여 추진하는 '건축과 이념의 분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즉 이 생활형식은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과거의 개념들은 이 변화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고 보수주의자들이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모더니스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전통의 부활에서 양식의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신보수주의의 한 표본을 읽는 것이다.

분명히 모더니즘적 운동은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도시계획에서 차지하는 전통적 가옥의 보존과 같은 영역은 부분적인 진실들이 수용되어야 함을 모더니스트들에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의 운동에서 오는 자극의 일부를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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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드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미래
김호기 외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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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크게 특징지워진다. 그것은 전체주의 사상을 근거로 댈 수 있는 반공주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적 엘리트 지배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반대중주의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이라고 해서 단지 자본가나 그 인척들, 관료들이 속해있는 집단이려니 하고 혼동하는 사람에게 다음의 말은 조금 충격이 될까. 사실 우리 한국의 모든 신문에서 유포하는 논리들은 거의가 다 신보수주의적 경향이고, 이들은 어느 사회비판이론들에 못지 않게 그 설명이 요청되는 현상들을 선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정치제도의 위기, 통치불가능성, 신뢰감소, 정당성의 상실 등에 대해 이들이 내리는 진단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설명은 정당들의 상호경쟁, 매스 미디어, 단체 다원주의 등을 통해 촉발된 시민들의 국가에 대한 기대의 '과잉'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행정의 조정기구들은 과도한 부담에 시달리며 그 위기는 증폭된다.

문제는 이러한 위기의 근원을 문화나 지식인들, 시민단체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들간 가치합의절차의 다양성과 국가에 대한 불복종이 가져다 주는 문제점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대안은 복지부분의 축소와 행정책임의 해소다. 물론 국가의 권력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여기에 대한 바른 독해법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면 된다. 국가의 통치가 문화적 문제들을 일으킨 것이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은 현대세계는 기술적 진보와 자본주의적 성장에 국한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사적 투자에 기인하는 사회적 역동성은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들이 바탕을 두고 있는 국가관이란 겨우 평화보장이나 안보와 같은 중심임무의 수행을 중점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관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더욱이 공공재정의 위기에 관련하여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거의가 노동시장의 재조정이다.

소위 역사적 유토피아, 과거를 비판하는 '승리자의 도취감'으로써 과거에 패배한 혁명가들(구 소련), 정치가들(예를 들어 김영삼정부)을 곱씹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길이 옳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점점 더 넓은 생활의 금전화, 더 많은 관계들의 행정화와 상품화는 우리가 진정한 사회위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철학에서도 니체를 되돌아 보며 결코 타협을 위한 이성이 아닌 숭배의식의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은 이러한 사조와 결코 떨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항상 이들이 감추고자 하는 것은 전문적 지식이 바탕이 된 사태를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루카치가 부분을 통해 전체를 본다고 말하는 것, 사회적 실천의 영역은 결코 사회 전반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영역에서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영역은 결코 부분적인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난 항상 이 IMF시대가 단지 김영삼 그 '돌대가리'만의 책임이라고만 보는 사람들의 논리가 불만스럽다. 같은 논조로 왜 국가형태자체가 가지는 모순점을 바라보지 못하는가 말이다. 이 책은 그러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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