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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불투명성
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 문예출판사 / 1995년 12월
평점 :
절판
한 철학자의 위대성은 그가 사용하는 인용들의 넓이에서 찾아야 한다. 얇은 팜플렛 하나 읽고 그 철학자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기꺼이 십원짜리 욕을 뱉을 수 있다. 역시 의사소통이론과 같은 일반적 개론과는 달리 여기 이 책에서 보여주는 하버마스의 관심폭과 거기에서 자기의 논지를 이끌어 냄은 최고의 철학자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후기 계몽'이나 '탈현대'와 같은 개념들은 그 형식적 규정들과 기술적이고 규칙적 측면에 의해 자유적이고 전통의 부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운동과 그 붕괴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것들에 감추어진 의미는 무엇인가.
보수주의자들의 논의는 삶과 예술의 조화에 대한 문제를 단지 미적으로 치장하고 분리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반모더니스트들은 대중적 이론들을 들먹이며 건축문화의 탈분화를 목표로 하는데 반해, 같은 사안을 가지고 모더니스트들은 '파괴된 생활세계의 탈식민지화 문제'로 받아들이며 저항한다. 반모더니스트들의 보수주의적 경향과 모더니스트들의 진보주의적 경향에 대한 고찰은 결코 건축양식에 국한된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이래 건축에 대한 새로운 재료와 기술, 새로운 구성욕구와 상황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두 시각의 분화는 뚜렷하다. 현대건축의 양상 : 대량생산과 재료의 변화에 따른 시각적 감성의 변화, 또 그렇게 해서 세워진 건물들의 자본주의적 이용은 벤야민이 말한 '자극으로 가득 찼지만 진정한 만남이 부족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현대건축이 발생하게 된 것은 소외된 일상세계와 경제생활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궁핍한 서민생활에 호응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물론 근대 철학자들이 말한 예술의 이념적 화해과는 결별하는 것이 된다. 건축이 사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정신은 건물의 뒤로 숨어버려 위장된 현실을 보완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 때 프로이트가 노이로제이론을 발전시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현대건축과 사상의 분리는 보수주의자들의 주장과 방법이다.)
이러한 분리주의와 다양성에 맞서 현대모더니즘건축의 목적적인 기능주의는 다시 부활한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와 신조형주의자들의 목적은 환경을 포괄적 의미에서 다시 종합예술적 기능을 하는 문법을 지향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교육의 한 분야가 된 예술은 이제 사회적 환경에 통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이 통일성은 단순한 의자에서 예배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물을 포괄하는 문화의 진정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은 반모더니스트들의 전통적 가치관의 부활과 연결하여 추진하는 '건축과 이념의 분리'에 대항하는 것이다. 즉 이 생활형식은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과거의 개념들은 이 변화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고 보수주의자들이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모더니스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전통의 부활에서 양식의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신보수주의의 한 표본을 읽는 것이다.
분명히 모더니즘적 운동은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도시계획에서 차지하는 전통적 가옥의 보존과 같은 영역은 부분적인 진실들이 수용되어야 함을 모더니스트들에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의 운동에서 오는 자극의 일부를 수용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