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 - 서울 한양도성을 따라 걷고 그려낸 나의 옛길, 옛 동네 답사기
이호정 지음 / 해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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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있는 사무실에 다닐 때는 점심을 먹고 나서, 혹은 퇴근 후에 낙산공원을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낙산공원은 대학로와 동대문을 잇는 공원으로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어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한 곳인데, 높지 않은 곳이라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엇보다 남산 타워까지 가지 않아도 혜화동과 이화동 주변의 서울 도심을 조망해 볼 수 있어 해질 무렵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넘이를 보러 오곤 했다. 또한 주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밀집해 있는 주택 사이로 벽화가 그려진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는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을 거닐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출간된 <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을 읽어 보니 그때 내가 가졌던 감정들과 많은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은 저자가 2017년부터 5년간 두 아이와 함께 한양도성 안팎의 옛길과 동네를 답사했던 기록들을 모아 글과 그림으로 재구성했다고 설명했다.


p.26

성북동에 가면 지금도 옛 벗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가 되어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생기고 예전의 것들이 사라지며 변화는 다반사처럼 일어나지만, 성벽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은 집들과 무심한 굴림체 간판으로 만나는 동네 풍경은 기억 속의 그것과 다름없이 그대로입니다.


p.55

낙산은 성곽 안길이든 바깥길이든 걷다 보면 금세 정상에 이를 낮은 산입니다. 바깥길을 택했다면 복원된 성벽 아래로 축성과 관련된 글자가 새겨진 '각자성석'을 보는 것으로 순성이 시작될 것입니다. 성곽은 옹벽 위로 이어지고, 높은 옹벽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면 지붕이 납작한 집들이 하늘과 맞닿으며 시야가 훤히 트입니다.




이 책의 1부 '한양도성, 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에서는 한양도성과 이어진 성곽길에 대해, 2부 '옛길과 동네, 지나간 것들이 보내는 당부'에서는 한양도성 안팎의 옛길과 동네들을 거닐며, 저자가 생각하는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 공통점 혹은 차이점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1부에서는 성북쉼터에서 출발해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걸으며 혜화문, 낙산, 흥인지문, 다산성곽마루, 숭례문, 인왕산 성곽, 창의문, 세검정, 숙정문 등 여러 역사 유적을 돌고 다시 성북쉼터에 도착하는 여정을 소개했다.


2부에서는 부암동, 인사동, 익선동, 권농동, 가회동, 원서동과 같은 도성 안팎의 옛 동네들과 오간수문, 이간수문 등 서울의 옛 물길을 답사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한 동네들의 정감을 전하고, 도시 개발에 따라 변화해 가는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옛 동네도 둘러볼 수 있다.


p.87

아이들을 데리고 첫 답사로 갔던 곳이 남산이었어요. 먼 나라에서 여행 온 외국인 관광객들처럼 아이들과 여행 가는 기분을 내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원만한 산등성이 위로 솟은 N서울타워의 인상은 압도적이었고, 그게 깃발처럼 보여 그런가, 한양도성의 모든 성곽들이 강물처럼 흘러 흘러 남산으로 모여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p.107

이유야 어찌 됐든 1910년 강제 병합과 함께 버드나무와 연꽃 만발했던 남지마저 위생상의 이유로 메워지고, 좌우 성벽이 완전히 잘려나간 숭례문이 길 복판에 섬처럼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나라 잃은 백성들이 가장 먼저 목도했던 것은 아침저녁으로 마주 보았던 성벽이 허망하게 허물어지는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도시공학을 전공한 저자가 서울의 도시계획 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던 경험들에 비춰 주변 경관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거의 유물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보존에 대한 생각, 그리고 미래 도시에 대한 소소한 견해들을 전해 들을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오래된 성벽과 돌, 낡은 기와들을 보며 길을 따라 걷다가 멈춰 서서 그림을 그리고 생각을 더하고 느낀 점들을 적으면서 그날의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니 과거에 낙산공원 주변을 거닐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휘리릭 하고 기억의 저편으로 지나친다.


한양도성은 태조 5년이던 1396년에 축조되어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에 이르는데, 그중 약 70%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유산 중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도성 기능을 수행해 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p.135

편의점 앞에서 시작되는 인왕산 성곽길은 여느 성곽길처럼 숲이 우거진 오르막길 사이로 드문드문 운동기구가 놓인 산책로입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녹색 철문이 달린 암문이 보이고, 암문 밖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바깥길은 마을버스가 다니던 포장도로 대신 수풀 우거진 오솔길로 바뀌지요.


p.161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저는 어릴 때부터 산이 좋았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이었지만, 첩첩이 둘러싸여 그것을 보는 일도, 오르는 일도 언제나 기꺼운 마음이었지요. 순성을 하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건 도시를 아늑하게 에워싼 산과 마주하며 걷는 일이었습니다.



이 책은 이러한 한양도성을 따라 발로 걸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길 위의 풍경들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직접 그린 70여 점의 도시 풍경 세밀화에 더해 그림을 그리면서 세밀하게 관찰했던 도시의 풍경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어 저자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TV 프로그램 [동네 한 바퀴]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21세기의 도시 서울 곳곳에 있는 성곽과 도성 길을 따라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바쁘게 지내온 일상에서 잠시 쉬어가라며, 과거로 흘러가는 옛길과 옛 동네의 오래된 성벽과 돌, 성가퀴, 낡은 기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해외에 나가면 마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나 여행지에서 구입한 소소한 기념품도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정작 주변에서 자주 보는 우리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새롭게 조성한 광화문 광장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100년 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이번 주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학로에 들려 낙산공원에 올라가 봐야겠다.



이 포스팅은 해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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