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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 제철 채소 제철 과일처럼 제철 마음을 먹을 것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2년 4월
평점 :
노년에는 시골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들녘에서 한 해를 보냈다고 소개한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를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전국 자전거길 가운데 섬진강변을 따라 조성된 자연미를 가장 잘 살린 자전거길이 있다고 하니 코로나 상황이 좀 더 좋아지면 올여름이나 가을쯤에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고 싶다.
<불멸의 이순신>을 썼을 때부터 김탁환 작가의 필력은 이미 알아봤는데, 이 책에서는 그의 일기장을 엿보는 것처럼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는 봄이 오니 먹을 것이 지천이라며 민들레에서 씀바귀까지 캐서 그냥 먹었다며 시골살이의 오묘한(?) 재미를 전한다. 대전에서 서울에서 그리고 지금은 전라남도 곡성의 섬진강 주변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p.37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1월 27일
2016년 가을,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미리 받은 주소를 살피며 걷다 보니 보수동 책방골목이었다. '낭독서점 시집'은 오래된 중고서점들 속에 섬처럼 놓였다. 그곳에서 신간, 특히 시집을 사는 것도 좋았지만, 골목을 천천히 누비다가 발길 닿는 대로 중고서점에 들어가선 손때 묻은 책들을 쓰다듬고 뒤적이며 냄새 맡는 것이 더 좋았다.
p.101
적정
3월 31일
3월을 결산했다. 섬진강 들녘으로 집필실을 옮기고 장편 초고를 쓰기 시작한 달이다.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여 630매를 채웠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올해는 이 흐름으로 가야 한다.
그는 삶이 바뀌지 않고는 글도 바뀌지 않는다며 자신이 좋아하며 알고 싶은 세계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해마다 봄이 되면 책상 위치를 바꾼다. 어떨 때는 거실이 좋다가 부엌 쪽으로 책상을 옮겨 두었는데, 어제 모처럼 연차를 내고 안방 한 귀퉁이로 책상을 다시 배치했다.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 책상을 옮겼는데 작가의 말이 콕콕 마음에 와닿는다.
그는 파종부터 탈곡까지 한 해 동안 들녘에서 지냈다며 논농사를 처음 지어봤다고 말했다. 농번기 두 달은 집필을 멈추고 들녘으로 향했다고 한다. 이번에 수확한 벼 품종은 630종이라며 텃밭과 정원을 가꾸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람을 가장 적게 만난 한 해였다고 이야기했는데, 시원한 들판에서 벼를 수확하는 기분은 어떨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p.179
모내기랑 음악회랑
6월 5일
아침 일찍 미실란 직원들과 연구용 논의 절반을 손 모내기했다. 나머지는 체험객 몫으로 남겨뒀다. 어젯밤 서울에서 내려온 용석이 <농부가>를 부르며 함께 모를 심었다. 논흙을 느끼기 위해 오늘도 맨발로 들어갔다. 마음은 싸목싸목 행동은 싸게싸게.
p.201
하염없이 걷고 원 없이 쓸 때
6월 21일
섬진강은 내가 추측한 것보다 훨씬 길다. 긴 만큼 여러 마음을 구불구불 어루만지며 흐른다.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시작하여 임실군 옥정호를 지나 순창군 적성면에서 오수천을 만나고 남원시 금지면에서 요청과 합류하여 곡성군으로 흘러내리다가, 곡성군 오곡면 압록에서 대황강과 합쳐 구례군을 거쳐 하동군을 지나 광양시 광양만 바다에 이른다.
책 제목처럼 섬진강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록하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농사도 책방도 마을살이도 섬진강 들녘의 일부로 사는 것도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도 늦지 않게 제철 농사를 짓고 자연의 흐름을 살펴 제철 마음으로 꾸준히 일하겠다고 밝혔다.
회사에서 일하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곤 하는데, 이 책을 읽어 보니 작가도 하늘을 보는 시간이 점점 는다고 이야기했다. 탁 트인 마당에서 문득 나타났다 흐르고 뭉쳤다가 흩어져 사라지는 구름을 바라보는 기분은 어떨지 또 궁금해진다. 이 책은 쓰고 싶은 장편이 있어서 섬진강 들녘으로 집필실을 옮겼다는 작가의 시골살이를 관찰카메라를 들이밀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밀하게 때로는 넉넉한 화면에 담고 있다.
p.237
핑계
7월 24일
오늘은 쉬었다
글 한 자 쓰지 않고
책 한 줄 읽지 않고
바빌론 강가에서 오래 울고 섬진강 강가에서 잠시 웃던
이들도 쉬었으면
p.302
길을 잃은 뒤에야
9월 20일
언제든 숲에서 길을 잃는 것은 놀랍고도 기억할 만한 경험인 동시에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윌든>
작년 5월 26일, 김헌 형을 따라서 제주 하도리 철새도래지에 갔었다. 차를 세우고 도래지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철새들은 주로 겨울을 나고 떠나기에, 물은 맑고 새는 거의 없는 늦봄의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형이 건네준 탐조용 망원경도 두어 번 쓰다 말았다.
2021년 1월 1일, 집필실 '달문의 마음'을 곡성군 곡성읍 섬진강으로 옮겼다는 작가는 더 많은 상상을 하며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상상을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 소설가로서 자신의 업이지만 모험을 하듯 상상을 또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도 섬진강 들녘에서 계속 시도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모험이 다음 이야기책에서는 어떤 빛깔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 포스팅은 해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