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의 신학 - 20세기 최고의 신학이 교부
김명용 지음 / 이레서원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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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신학 그 이름하여 거창하고도 대단한 제목의 책이름이다. 장신대 총장 김명용 교수의 글이다. 글이 아주 명료하고 재미있고 이해하기 편하며 길고 장대한 칼바르트 신학을 잘 요약 한듯 싶다. 1만 페이지나 되는 교회교의학을 읽어본 사람인것 같다. 아주 극찬을 하면서 칼바르트를 찬양시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사람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나 싶을 정도이다. 너무 찬양하는건 하나님을 모욕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문시까지 들게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것은 칼바르트는 이시대를 이끌어나간 한시대의 교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칼바르트가 없었다면 자유주의시대의 종말을 고할수 없는 그 실정이다. 종말은 없고 인간의 죄악은 끊임 없이 일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에서는 성경책을 난도질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우리의 생각과 잣대를 심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종지부인것인가. 자유주의 주장이 거짓되고 참되지 않다는 것인가? 아무튼 그까지도 허용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참 궁금하다.
 
 칼바르트의 신학은 대체로 크게 3가지 분기점을 두고 읽어야 하는것 같다. 교회교의학과 로마서 강해 1판 2판 시기별 내용 그리고 바르멘 신학선언에 대한 분기점이 있다. 로마서 강해에서 이야기하는 주된 이야기는 정반합으로서의 신학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칼 바르트에 명료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절대정신이라는것을 계시로 치환해서 이시대의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을 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또한 로마서 강해 2판에서 키에르케고르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나라는 이세상에 올수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질문으로 남겨둔다. 일면 사실로 받아들일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불가해성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내던진 로마서 강해는 자유주의가 팽배해 있던 곳에 떨어진 폭탄과도 같은 아주 강한 시너지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한 칼바르트도 너무 학적인것에 치중하지 않았나하는 의문도 들게 하였다. 그것의 이유는 단한가지이다. 신학에 대한 독립적 주장을 하지 않는것에 대한 의문이다. 바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철학자의 사상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나간다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시대를 거쳐나간 신학자 중에서 어거스틴은 플라톤에 영향을 받은 신학자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향을 받은 신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그들의 것을 읽을때마다 발전을 해야 할 가능성만 남겨둔채로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광신대학교 교수님께서도 칼바르트에 대한 책을 전부다 읽어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비판하는 주된 이야기는 하나님의 너만 존재하는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며 칼바르트의 계시론을 비꼬며 헤겔의 영향을 너무 받았다고 비판하게 되었다. 이모든 것이 바로 내가 보기엔 하나님의 의도이다. 불완전하게 만들기 위하고 비판할 사람을 비판하고 받아들일사람은 받아들일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이다. 일부러 연약하게 만들어 놓으신것이다. 칼바르트는 많은 비판을 받아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철칙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그 비판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그 모든것을 뒤집고 시대에 가장 중요한 비판을 하게 되는데 자유주의를 뒤집어 엎는 것이었다. 그또한 여호와 아바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나 칼바르트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하였고 자신의 사상이 너무나 많은 면에서 오가는 일을 하였다. 인간이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 성령님께서 하신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약함으로 자유주의에서도 욕먹고 근본주의에서도 욕먹는 비판을 제일 많이 하되 비판을 제일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시대에 이사람의 신학을 정반합으로 발젼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진 신학자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칼바르트의 신학을 발전 계승시켜야 된다고 본다. 그 사람이 누군가는 있을것이다. 칼바르트의 지적이 옳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정죄를 하시지 않고 단지 완성 합에의 길을 제시하는 위대한 사람이자 신이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헤겔의 정반합의 신학은 일면 타당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르나 아주 중요한 신학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이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중의 하나는 너무 성경을 중시여기는 성격 탓에 자연신학을 부정했다는 가장 큰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신학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있어야 한다는 귀중한 사실을 배제한다면 그것 또한 부정해야 하는것임에 틀림없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저서 세계와 인간에서 말하기를 세계모든것에 신의 성령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에서도 우리 우주에는 한가지 변수가 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신이 있을 여지를 남겨두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있다고 했다. 그만큼 자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변수들이 있고 그것으로 신학하는것은 가능한것이다. 그 신학을 전개해나가는데 쓰는 사람들이 아마도 자유주의 신학자일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하면서 성경 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나가고 있지만, 성경 외적인 신학을 하면서 자기 오류에 빠져 해메이고 있는 사람중의 한명일것이다. 오로지 성경을 중심으로 신학을 해야 하는 우리는 그런 시대적 사명을 지닌 사람임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자연신학은 아무튼 내 주장이지만 필요하다.
 
 또한 교회교의학에서 이야기 하는 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창조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의 근원인 악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바르트의 주장은 일면 타당한것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본주의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것이다. 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종이다. 욥기서에서 욥에게 고난을 주라고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악을 허용하신다. 그것이 바로 악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간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즉 우리는 그 증거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왜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악을통해서 우리에게 어떻게 섭리하실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봐야 하는것이다. 귀히 쓸 그릇을 귀히 만들고 선하게 쓸 그릇을 선하게 만든다는 이 칼빈의 예정론도 하나님께서 지옥에 갈 리스트를 적어두고 있다는 오만한 발상을 뒤집어 하나님께서 이중적으로 그렇게 구원 받지 못할 사람 마저 구원할수 있다는 예정론을 제시한다. 이면을 보면 칼바르트는 하나님의 예정론을 좀더 완벽하게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또한, 칼바르트가 가장 욕을 먹고 있는 만인 구원론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인화해론이다. 그것은 가장 큰 실수를 하게 된것이기도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만인을 화해시키기 위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수 있는 것인가 구원 받을수 있는 것인가? 그것에 긍정할수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자유와 선택을 넓히고 가능성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교회교의학에서 이야기하는 이중예정론은 의미있는 논의이다. 가장 중요한 논의인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수가 없다. 이것은 아마도 칼바르트의 신학의 정수임에 틀림이 없다. 계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부분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것이 바로 성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책에서는 재수 없게도 성경을 성서라고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오류는 존재하는 neo othodox를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알아 두어야 할것은 성경을 성서라고 하든간에 칼 바르트는 성경의 권위를 위해서 일한 사람임에는 틀림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보고 코넬리우스 반틸과 같은 사람이 교회교의학은 읽어볼필요 없다며 비판해야 할 권위또한 없는 것이다. 읽어보고 비판해야 할 부분을 비판해야 된다고 본다. 그렇기때문에 근본주의는 고립을 하고 세월의 역사속으로 묻혀질 위기에 처해져 있다. 우리는 연구를 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연구해봐야 한다. 칼 바르트를 발전 계승시켜야 할부분을 해야 하는것이다. 칼바르트가 많은 비판을 받은 신학자라는 것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는 이시대적 사명과 소명에 부름받은 하나님의 신학자라는 사실도 알아두어야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이 있다. 신학적인 일이 산재해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것은 계시론에서 이야기 했듯이 성경에 대한 권위를 복구 시키는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 우리는 주지하고 있어야 한다.
 
 칼바르트의 비판을 하자면 끝이 없다. 칼바르트는 아무래도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하는 숙명에 시달리고 있어서 그다지 비판하고 싶지는 않지만, 몇가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이것이다. 칼바르트를 따르는 신정통주의자들은 자신의 시대적 부름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것인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칼바르트에 열려 있다면 그로인한 성경의 권위의 실추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이 오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그것으로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가치가 격하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사실 칼바르트도 인정해야 하는것이 자신이 살았던 배경과 상황을 인정해야 한다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칼바르트가 어찌됬던간에 그사람은 고전 자유주의자 하르낙의 제자였고 자유주의적 사고가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성경의 권위를 찾는다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교묘하게 낮추는 사람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반문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사람에게 비판 받을수밖에 없는것이다. 우리가 칼바르트의 의견을 일면 따르면서도 따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칼바르트는 성령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쓸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신의 이야기를 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되는것이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도 인간이다. 성령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는 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하는것도 사실이다. 개혁주의자는 칼바르트를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행위도 그만하고 칼바르트를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그에게 의지하는것도 안된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 성령, 아빠 아버지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들임에 분명하다. 개혁되어야 할것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는것은 우리 기독교이다. 지금여기에 계시는 우리 그리스도 예수를 찬양하며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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