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개정증보판 을유세계사상고전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의 책이다. 쇼펜하우어는 일단 칸트나 헤겔에 대한 열등감이 매우 심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자신이 칸트의 후계자란 이름을 가진다고 이야기 하고, 이책에서도 칸트 철학비판이라는 논문이 게재되어 있다. 의지와 물자체 이데아는 동의어로 사용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일들은 바로 의지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이야기 한다. 의지는 인간의 맹목적인 의지 세계에서 자연과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이 의지의 세계는 이데아라기 보다는 물자체라고 이야기 하는게 더 좋을거 같다. 이데아는 어찌보면 천국과 같이 이세상의 원형으로 묘사되어 지지만 의지는 다른 종류로서 우리의 모든 성욕 선악 좋은것 나쁜것들을 포함하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쇼펜하우어는 맨처음부터 매우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 지성과 이성 그리고 이성으로 주어지는 인간의 모든 삶에 대해서 집대성을 한다. 의지와 표상으로 세계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1권에서 하는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세상은 의지에 대한 표상이라는것을 이야기 한다. 표상이란 의지로서 주어지는 인간과 동물 모든 자연의 표시라고 이해 하면 좋다. 그렇게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의 세계는 의지의 객관화되어 있는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 말하는 것 보다는 책에서 나와 있는 표현으로는 칸트를 비판하며 칸트는 이성에 대해서 너무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나뉘어 표현 했다고 했다. 또한 자신의 광고성 이야기로 자기가 칸트의 후계자라 이야기 한것처럼, 칸트가 설명하려던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인 이해로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관심은 있지만 조금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험적이라는 이야기와 후험적이라는 이야기에대해서도 고뇌하며 설명하는데 재미있었다. 2권에서는 칸트는 의지에 대한 개념과 힘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 했다. 두 개념의 공통점은 인과론으로 설명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의지는 모든 인간의 삶에 관여하므로 합목적성으로 존재한다. 이념과 필연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체와 의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도 의지의 표현으로 신체가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 했다. 3권에서는 미학을 했다. 미학으로 라오콘조각상과 언어 시문학 음악에 대해서 표현했다. 사실 이 부분은 나는 미학 전공자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이해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음악은 의지의 즉자태라고 표현을 했다. 의지의 표현으로 음악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3권에서는 쇼펜하우어가 의지를 이데아에 빗대어 표현했다고 자기 입으로 공언했다.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칸트의 판단력비판을 빼놓을 수 가 없는데 이 책도 판단력비판에 영향을 받은 티가 너무 났다. 천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술천재는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를 했다. 4권에서는 삶에의 의지 긍정과 부정을 중심적으로 이야기 했다. 삶에의 의지의 긍정은 우리의 삶속에서 의지가 표현되는 것들을 긍정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점점 삶에의 의지를 표현하고 그를 이해함으로서 발생하는 염세주의로 글이 흘러간다. 삶에의 긍정은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는 의지의 긍정이었다. 의지 중에서 우리가 가지는 것은 바로 성욕이나 맹목적인 의지로서 세계에 나타나는 것들을 표현하는데, 이중에서 잘 보아야 할것이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세상에 나타나는 의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타나는 의지라고 한다면, 애벌레가 변태하면서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맹목적인 의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의지이다. 이런것들은 인간은 의지를 부정할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쇼펜하우어가 이야기 하기에 이른다. 이런 부정을 설명하면서 수도사들과 불교의 중들을 이야기 하는데, 이들에 대한 설명은 타당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은총과 의지를 대비시키면서 은총의 삶은 의지를 거부하는 삶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그것에 대한 긍정을 하기에 이르는데, 지나칠정도로 정확한 기독교의 이해라서 사실 매우 놀랐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앞부분만 3번 정도 읽고 그냥 내리 읽었던 글이다. 많이 지루하고 너무나도 난해한 개념이 많았다. 이를 다이해 했다고 보기에는 나도 무리다. 그러나 비판할것은 하고 그냥 리뷰할것은 해야 겠다 싶다.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세계가 유일할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시 플라톤으로 가거나 칸트의 물자체를 반복하는 일이 아닐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니체가 차용했다고 생각이 들어질만큼 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기독교는 아닐지 몰라도 종교는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높은 만큼 그냥 종교인으로서 산다든지 아니면 기독교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수난으로서의 세계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동일한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은 의지로서만 존재한다면 이미 재앙에 가까울정도로 개판이다. 우리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영원한 정의에서 했던 말은 윤회를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악을 억제 하기 위해서 윤회를 사용한다. 이를 보면서 영원회귀의 철학이라고 이야기 하는 니체가 여기에서 차용을 했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리 멸렬하고 머리가 띵할정도로 아픈 글을 읽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서에 모든 사상을 함축시켜 이야기 하려고 하는 의도가 보일 정도로 수학, 수사학, 시학 이런 여러가지 학문에 대한 높은 식견을 볼수 있다. 욕을 하기 보다는 찬양하고 있지만, 아무튼 대단한 철학자임에 틀림이 없다. 사실 이 철학자는 인도의 철학에 심취했다고 보여질정도로 힌두교나 불교에 심취했다. 그사상을 전면으로 내걸만큼 윤회에 빠져 있었다. 윤회나 영원회귀 철학의 장점은 우리의 삶이 반복되어 있는 것들을 탈피하거나 악을 멀리 하기 위해서 쓰지만, 이들은 악을 근본적으로 멀리하게 할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즉, 즉자태로서의 의지만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우리네의 삶이라고 생각이 든다. 맨마지막에 기독교에 대한 글을쓰면서 은총에 대한 삶을 이야기 하는데, 자신이 알다싶이 은총의 삶이 답이라는 것은 신학도로서 이야기 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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