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들의 정원 햇살그림책 (봄볕) 50
피레트 라우드 지음, 서진석 옮김 / 봄볕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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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을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일까?

작은 나무가 살고 있던 숲의 나무들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가 어우러져 행복한 삶이 었다. 그들의 평화를 망가뜨리는 건 톱이었다. 톱을 피해 멀리 도망치던 작은 나무는 신기한 정원에 도착한다.

단정한 모양으로 재단된 나무들의 일률적인 표정. 동그랗고 큰 뿌리를 가지고 "우린 모두 땅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잖아. 그건 정말 중요한 거야!"라고 외치는 나무들.

작은 나무는 몸을 뒤집어 가지를 땅으로 넣는다. 바오밥 나무. 6천년 전, 물이 부족한 곳에서 물을 찾아 뻗어나가기 위해 크고 튼튼한 뿌리를 가졌던 나무. 가지보다 더 큰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존재하기 위해서.

정원의 나무들이 큰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결국, 존재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뿌리가 깊은 나무들만이 살아가는 정원에서는 빗물 웅덩이도, 하늘에서 내려온 별도, 바위도, 낯선 새도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낯선 새의 노래를 듣기 전까지.

낯선 새의 노래를 들은 후 "굉장한 것"을 묻는다.

웅덩이는 "세상을 유람하는 것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야."

별은 "꿈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거야."

바위는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에 방해되지 않는 거야." 라고 말한다.

생각에 잠긴 나무들. 저마다 자신의 가지에, 자신의 뿌리에 꽃을 피워낸다. 꽃의 모양은 비슷하지만, 표정이 살아난다.

저마다 존재의 이유는 다르다. 서로가 같은 모양과 같은 표정으로 재단한 듯 있다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숲의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 나타난 톱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정돈된 정원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을 재단해 버리는 존재. 평탄한 길과 같은 길 위에 높인 나무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깊고 튼튼한 뿌리를 내려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전부라 여겼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다양한 생명들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나의 존재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뿌리깊은나무들의정원 #봄볕 #피레트라우드 #서진석 #그림책사랑모임

굉장한 것은 나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면서 여러 가지 재미잇는 생각을 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의 삶에 방해되지 않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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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가지 빛깔의 그림책 수업 - 무지개색 아이들이 살아 숨 쉬는,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그림책사랑교사모임 지음 / 교육과실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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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읽고, 아이들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왔다. 주로 조회나 종례 시간에 이루어진 그림책 읽기라 깊이 있는 생각 나눔이 어려웠다. 어떤때는 읽기만 할 때가 있고, 조금 더 시간을 내면 키워드와 전체적인 감상만 나눌 때가 있었다. 그림책으로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들을 접하면서 어떻게 수업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특히 고등학교에서도 그림책으로 수업을 진행하신다는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왔다.

<14가지 빛깔의 그림책 수업>을 봤을 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수업만 있으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앞섰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도, 막연하게 체계적인 수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문인 것 같다.

창작, 연극, 미술, 음악, , 자서전, 게이미피케이션, 놀이, 프로젝트, 디자인 씽킹, 토의, 행복, 철학, 온라인 협력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수업은 활동지를 조금만 수정하면 초등학생~고등학생은 물론, 어른 사이에서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국어 수업으로 중3을 만나고 있는 상황에서 기말고사를 마친 아이들과 어떤 수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만난 이 책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아이들의 자기표현과 수업의 충실성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와 닿은 내용은 시 창작 수업과 자서전 쓰기 수업이었다. 올해 학생들과 동아리에서 건드리고 있는 기후환경에 대한 수업은 그림책을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해 주었다.

시 쓰기 수업은 시집을 통해서만 했는데, 그림책으로 만나니 시화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글 작가와 그림작가의 협업이 이리도 중요하구나 싶었고, 그것을 포착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선생님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다른 영역의 수업들도 따라하기만해도 수업의 품격이 올라갈 것만 같았다. 그림책을 다양하게 읽어가면 아이들도 새롭고, 수업을 하는 나도 더 깊이있게 그림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과 소통하며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수업을 원하는 선생님, 아이들의 정서와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 수업을 원하는 선생님, 아이들의 생각을 자극하고 앎이 삶으로 반영되는 수업을 원하는 선생님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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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한성우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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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말에 자신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말을 모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는 머리말과

"그 말도 다 옳아요."

말하는 이 모두가 말의 주인이라는 맺음말을 읽다.


처음 시작과 달리 맺음말을 읽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말하는 이 모두가 말의 주인이라는 말. 억지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꾸미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우리말의 섬세한 맞춤법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랬다. 고민하다가 한 마디도 못 떼고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한글은 우수한 글자가 맞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 있을까? 문화 우월주의에 빠져 다른 문자를 우습게 볼 수 있을까? 더구나 문자와 말이 다른 것인데.

한참 찌아찌아족에 한글을 수출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 또한 글자를 전파한 것이지 말을 전파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하고서

한글이 우수한 글자이고,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찌아찌아 족에게 말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어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귀가 트이고, 발음이 좋으면 더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영어의 소리값을 한글로 표현하여 일상생활언어로서 표현했던 것처럼. 한글은 그러한 것을 적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우면서 우리 말에 맞추어 적고 읽는 것. 우리는 어쩌면 나의 사고 체계에 맞게 말을 글로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아이의 수학책을 펼쳐보니 '최대값'가 아닌 '최댓값'가 적혀있었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을 들여다보니 사이시옷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아이와 함께 말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다만, 왜 이렇게 됐을지를 물으며.


달짝지근한 소보로 빵을 집어 들고 먹다가 '소보로'가 일본말에서 온 것이라는 부분을 읽었다.

투철한 애국심에 그럼 소보로 빵을 뭐라고 해야 해? 하고 투덜거리다 빵도 외국에서 온 말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을 우리말에 맞게 순화하는 것만 옳은 것일지를 생각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말을 들으며, 내가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한참 유행했던 짱, 일진 이라는 말이 지금도 쓰이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은 사용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겨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단모음체계의 변화로 실제의 소리값과 글자, 말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글을 한참 배우던 아이가 '문희'를 [문흐의]라고 읽었다. [문희]라고 읽어주며, 아이가 왜 이렇게 소리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 작고 꼬물거리던 것이 어느 날 목을 가누고 배밀이를 하고, 또 어느날 팔에 힘을 잔뜩 주고 기어가다가 일어나 걷는 것처럼 말도 변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얘들아, 짜장면이 맞게? 자장면에 맞게?"

우리는 의심없이 짜장면이요 라고 외쳤다.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땡'을 외쳤다.

"왜요? 우리는 짜장면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장면이라고 해요? 그럼 맛이 없어지는데."

(물론 지금은 짜장면과 자장면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했다.)



하나의 고정된 글로써 우리 말을 대할 것이 아니라 변화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더 편안하게 말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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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스틴 평화징검돌 8
권윤덕 지음 / 평화를품은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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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마을에서 소소하게 자라온 탓에 사회적인 일에 무관심했던 나였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뉴스를 즐겨보고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3년 봄이었던가? 학교 내에 있었던 사건으로 친구들과 피켓 시위를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정치란, 역사란 나와 무관한 삶이 아니란 것을. 이후 동아리 활동을 하며 근현대사를 알게 되고, 내가 겪는 현재의 삶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광주에서 온 친구와 이야기를 하며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근현대사에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책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16살 청소년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책을 받아들고 M16과 하얀 동그라미가 그려진 총을 보고 순간, 숨이 멈칫했다. 계엄군의 총 M16. M16의 눈으로 그려진 1980년 광주의 광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표지를 열었을 때 보이는 얼룩덜룩한 군복의 무늬가 나타났다. 왠지 모르게 군복 모양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요즘 내가 만나는 군인은 그렇지 않은데, 어릴 때 만났던 군인의 삼엄한 눈빛이 떠올랐다. 삼엄함을 넘어 공포감을 자아내던 그 눈빛이 나에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그것만으로도 긴장이 되었다.

M16은 계엄군의 총이었다. 광주에 투입되기 전, 폭도와 빨갱이들의 무자비함과 그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교육받은 대로 폭도와 빨갱이들을 처단했고, 그들을 돕는 자들까지도 공격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그들의 삶이 광장에 널브러지며 M16은 느끼게 된다. 크림빵을 든 딸, 트럭에 실려 간 친구, 장사 나온 우리 엄마, 회사에 간 신랑을 찾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가 만난 사람이 폭도나 빨갱이가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시민을 향해 서게 된다. 시민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하고 신랑이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빠가 광주에 투입됐던 부대 나왔어. 그런데 다행히도 2월인가 3월에 전역하셨대.”

몇 해 전, 촛불집회가 열릴 때 집회에 나온 사람과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이 보였다.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은 방어막을 들고, 죽창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마주한 20대 초반의 또 다른 청년은 일렬로 선 군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갑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차마 할 수 없어 멀어져 가는 시선으로 맥없이 서있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들의 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상명하복의 문화가 지배하는 군인이라는 조직에서 자신의 신념과 뜻을 달리한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법을 날카롭게 공격하던 대치된 상황, 그러나 불법은 어디에서 명명되었으며, 누가 규정한 것이었던가?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잃은 시선은 허망했다.

만약 그 날, 아버님께서 광주에 계셨더라면, 나는 지금 아버님을 원망했을까? 상상하기 싫은 생각을 하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날,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던 많은 분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기 위해,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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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나눔 - 함께 배우고 서로 나누는 교직생활의 전환점
터닝포인트 지음 / 에듀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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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수업 나눔이란 공개 수업과 이후의 협의회였다.

그래서 수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배움의 공동체를 접했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공개 수업이 떠올랐다.

많은 분들이 와 계신 가운데 자신의 일에 열중하던 아이들.

잠을 자고, 만화책을 읽고, 멍 때리고, 옆 친구와 이야기하고.

 

최근 했던 공개 수업도 떠올랐다.

평소와 달리 대답을 너무나 잘 하고, 적극적인 아이들.

잠을 자지 않고, 무엇이든 하려고 했으며 끊임없이 눈을 마주치는.

 

공개 수업을 한다는 것, 수업을 나눈다는 것이 진정성 있게 다가서는 일일까?

혼란스러웠다.

 

수업을 나눈다는 것은 꼭 공개수업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지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내 수업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는 것 또한 수업 나눔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혼자서는 어렵고 함께 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 나의 수업을 객관화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촘촘하게, 엉성하게 얼기설기 엮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과감히 이야기할 수 있고,

주어진 상황을 함께 둘러보는 일.

그래서 교실 삶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수업이 확장될 수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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