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한성우 지음 / 창비교육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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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말'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말에 자신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말을 모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는 머리말과

"그 말도 다 옳아요."

말하는 이 모두가 말의 주인이라는 맺음말을 읽다.


처음 시작과 달리 맺음말을 읽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말하는 이 모두가 말의 주인이라는 말. 억지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꾸미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았다.

우리말의 섬세한 맞춤법을 보고 있노라면 더욱 그랬다. 고민하다가 한 마디도 못 떼고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한글은 우수한 글자가 맞지만, 그렇다고 모두에게 이것을 강요할 수 있을까? 문화 우월주의에 빠져 다른 문자를 우습게 볼 수 있을까? 더구나 문자와 말이 다른 것인데.

한참 찌아찌아족에 한글을 수출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 또한 글자를 전파한 것이지 말을 전파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하고서

한글이 우수한 글자이고, 우리가 자랑할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찌아찌아 족에게 말을 만들어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어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귀가 트이고, 발음이 좋으면 더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영어의 소리값을 한글로 표현하여 일상생활언어로서 표현했던 것처럼. 한글은 그러한 것을 적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우면서 우리 말에 맞추어 적고 읽는 것. 우리는 어쩌면 나의 사고 체계에 맞게 말을 글로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아이의 수학책을 펼쳐보니 '최대값'가 아닌 '최댓값'가 적혀있었다. 이게 뭐지?

하며 한참을 들여다보니 사이시옷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아이와 함께 말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다만, 왜 이렇게 됐을지를 물으며.


달짝지근한 소보로 빵을 집어 들고 먹다가 '소보로'가 일본말에서 온 것이라는 부분을 읽었다.

투철한 애국심에 그럼 소보로 빵을 뭐라고 해야 해? 하고 투덜거리다 빵도 외국에서 온 말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말을 우리말에 맞게 순화하는 것만 옳은 것일지를 생각했다.


새롭게 생겨나는 말을 들으며, 내가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한참 유행했던 짱, 일진 이라는 말이 지금도 쓰이는지를 생각해 보면, 말은 사용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겨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단모음체계의 변화로 실제의 소리값과 글자, 말이 달라지기도 한다. 한글을 한참 배우던 아이가 '문희'를 [문흐의]라고 읽었다. [문희]라고 읽어주며, 아이가 왜 이렇게 소리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 작고 꼬물거리던 것이 어느 날 목을 가누고 배밀이를 하고, 또 어느날 팔에 힘을 잔뜩 주고 기어가다가 일어나 걷는 것처럼 말도 변한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얘들아, 짜장면이 맞게? 자장면에 맞게?"

우리는 의심없이 짜장면이요 라고 외쳤다.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땡'을 외쳤다.

"왜요? 우리는 짜장면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장면이라고 해요? 그럼 맛이 없어지는데."

(물론 지금은 짜장면과 자장면을 모두 표준어로 인정했다.)



하나의 고정된 글로써 우리 말을 대할 것이 아니라 변화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더 편안하게 말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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