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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무선) ㅣ 사계절 1318 문고 2
로버트 뉴턴 펙 지음, 김옥수 옮김 / 사계절 / 2017년 8월
평점 :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20년 전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제목을 보고 ‘돼지고기를 먹을 순 없겠군.’ 생각했다. 내가 살아온 삶 만큼이나 단순한 인식이었다. 당시 나의 생각을 비웃듯 책을 펴면 ‘우리 아버지 헤븐 펙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돼지 잡는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참 다정다감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의 마음과 당시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셰이커 교도들의 삶
이 책은 1940-50년대, 미국 버몬트 주에서 살아가는 셰이커 교도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셰이커 교도들은 근면과 절약을 삶의 근간으로 삼고 살아간다. 헛된 욕심에 사로잡혀 부를 축적하지 않는 셰이커 교도들의 삶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가는 데에서 확인된다. 돼지 잡는 일을 하면서 그 일을 부끄러워하거나 더러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가 해야 할, 고된 일을 자신이 하는 역할이라 겸허히 받아들인다.
로버트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자란다.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소가 송아지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해내는 모습, 소의 목 안에서 혹을 떼어내는 모습, 일상에서 헛간을 청소하고, 동물을 기르는 모습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간다. 공동체의 삶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소설을 읽는 내내 느끼게 한다.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해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책임감을 길러나간다.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체화하게 한다.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 13살
로버트는 12살에 소의 출산을 돕고 돼지를 길러 박람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12살에서 13살로 넘어가는 즈음 아버지께서 로버트에게 당부한다.
“이젠 네가 해야 해, 로버트. 엄마와 이모 둘이서는 할 수 없단다. 봄이 오면 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라구, 열세 살짜리 어른. 어른이 되기에 충분한 나이지.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네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해, 로버트. 너 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어. 바로 너 말고는.”
13살 어른이 되다. 요즘은 서른이 되어도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보다 아이의 연장선에 있는 느낌이다. 13살,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것. 학령기가 길어질수록 배움의 끝에서 아직도 배워야 하는 사람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어른들의 울타리 안에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산다는 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힘이 아직은 부족한 것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 누군가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한다.
오지않을 것 같던 아버지의 죽음의 순간,
“괜찮아요. 오늘 아침에는 푹 주무세요. 일어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빠 일까지 다 할게요. 더 이상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푹 쉬세요.” 라는 로버트가 건네는 말은 고된 일상을 살아온 아버지에게 영원한 안식이었다.
아버지가 부재하면서 어른으로서 걸음을 내딛는 주인공의 의젓함이 돋보였다.
당대 삶의 모습
처음 이 책을 읽으며며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제목의 생경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몽둥이로 자녀를 때릴 수 있다는 점, 가정 안에서 어른과 아이 구분없이 강도높은 역할이 부여된다는 점, 감기에 걸려 전염이 될까 걱정하며 헛간에 머무르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 등은 내가 살아온 삶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미국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의 생각이 어디에 머무는지 인식하게 된다.
자녀 또한 어른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고된 몸의 노동이 줄고 고도의 기술 문명이 확대되고 있다는 점, 의료 기술의 발달과 장례의 절차 등 변화하는 삶의 흔적들을 느끼게 한다. 문학은 시대적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문학을 통해 당대의 삶을 엿볼 수 있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생긴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로 인하여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로버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의 삶을 존중했던 로버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죽음이 아닌 어른이 되는 관문이자, 우리 시대에 어른이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아버지 헤븐 펙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돼지 잡는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참 다정다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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