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이양호 지음, 박현태 그림 / 글숲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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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에세이를 기대했다. 역시나 설명에 연연하지 않고 제목에 꼿히는 타입의 최대 단점이 이런 예상이 정확히 빗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표지에 그라데이션이 마음에 들었고 또 제목도 동화를 비틀어볼 것 같아서 집어들고 정확히 3개월 만에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렇듯이 기억에도 없는 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물론 그렇지는 않다. 최근에 마저 읽었고 덕분에 전이랑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에 이 책은 단순히 질문하며 책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정도로 파악했다. 이야기 한 토막에 한국어, 영어, 독일어까지 보여주면서 비교해보라고 하다니 작가가 독자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간간-히 정말 심심할때는 영문을 읽기도 했지만. 전혀 읽을 수 없는 독일어랑 읽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책을 읽어나갔기에 점점 영문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다. 삼분의 이쯤 읽었을때 발도르프 얘기가 나와서 집어치웠던 것 같은데...정확히는 작가가 자꾸 질문에 답해보라고 종용했기에 부담감을 느껴서 때려치웠다.

 

그리고 다시 집어든 이유는 전에 읽던 책들을 다 마저 읽고 리뷰를 마쳐야한다는 소명감때문이었다. 결국 다시 손에 잡게 되었고 전과는 다른, 것도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으며 읽어내려갔다. 아마도 이런 것을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다. 마침 코드가 맞았던 것이다. 이래서 책을 여러번 읽어보라고 하는 것 같다. 다시 읽어가며 책은 내게 여러가지 조언을 늘어놓았다. 사실 공주는 멍청한 것이며 그 공주는 우리 자신이고 또 우리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고 잘 살아가게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왕마마께서는 사-악하고 나쁘기 그지 없다고 말해주면 그것은 나쁜 버릇을 들이고 그걸 벗어나지 못해서 생기는 불상사라고 말해준다.

 

물론...그런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동화란 게 엄청난 함의를 가지고 있는 거니까. 속담도 상황에 맞춰 해석하기 나름인데 동화는 오죽하랴. 그리고 그런 생각하는 힘을 기르게 하는 것이 발도르프 교육의 핵심이란다. 아- 주입식 교육으로 자란 세대라 이런 거 아주 지겹기만하다. 질문을 왜 만들어주나, 그럼 그것도 주입식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질문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결국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 그것은 전 세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나는 나은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만감까지 있다면 더 최악이다. 질문은 읽고 스스로가 가지는 것이다. 제시해주는 질문은 진정한 질문이 아니다. 뭐 책이라는 한정된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그럼 돌려 말하기는 왜 있을까~나??? ^^

 

투덜대는 건 이쯤하고 간략히 내용을 기억해보자면...『백설공주』...식으로 번역이 되곤 하는 이 동화는 독일의 동화로 사실 그쪽 언어로 하자면 '새하얀 눈의 아이' 정도라고 한단다. 왕의 자식이긴 하지만 콕 찍어 공주라고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뭐라고 했지만 잘 기억이 안 나는군. 이 녀석은 엄마가 죽었고 아빠가 새엄마를 얻으면서 다 자란 후에 큰 곤욕을 당한다. 우리가 다 알듯이 말이다. 물론 디즈니판보다 조금 더 꼬꼬마 버전에 왠지 천쪼가리 하나 달랑 걸치고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한 것 같다는 이미지가 들었지만 확실한진 알 수가 없다. 암튼 새엄마가 자길 죽이라고 보낸 사냥꾼에게 구원받고...절대 매력으로 살아난 게 아니라 불쌍해서 살려준...난장이네 집에 가서 전~혀 환영받지 않고 집안 잡일이나 해주며 잘 살다가 여왕마마께서 안 죽은 걸 알고 습격하는데...이 바보 꼬마는 난장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잡상인을 집에 들이는 불상사를 자꾸 저지르는 바람에 결국 죽죠...다 알다시피^^

 

근데 그 기반에 기독교와 서양의 문화가 깔리고 그 얘기를 듣다보면...새롭다란 느낌이 들겝니다. '새하얀눈아이'는 하늘,땅,인간의 결합물이고 살곳을 마련하려고 땅의 시련...을 거치죠. 그리고 땅에 속하는 난장이들한테 구조되어 살지요. 그리고 그를 계속 괴롭히는 나~쁜 사람은 우리의 몸과 정신마저 앗가가려고 술수를 부린다네요. 그리고 죽었으나 너무나 어여뻐서 유리관에 씌이고 하늘 가까이에 내여놓은 것은 그녀가 하늘,땅의 자식이고 이웃나라 왕자가 첫눈에 뻑-가는 것은...결국 좋게좋게 결론이라고 낙관론을 뜻하겠죠. 여왕마마는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자기의 버릇에 갖혀 죽게 되는되요..달군 쇠신발을 신고 춤을 추다가 죽는다는 대목...나쁜 버릇에 지배당하고 그로인한 행동이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 같네요. 교훈적인 거 안 좋아하는데 말이죠.

 

좋아하는 구절도 단 세개 있었는데...

P.155

능력이 아니라 , 경쟁력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요? 자기보다 앞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못돼먹은 여자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자가 아닌가요? 몸을 키우는 먹거리에는 독이 묻어있니 어쩌니 따지면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먹거리에는 독이 있는지 없는지 안 따지는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정신과 영혼은 이미 죽어있고, 몸뚱이만 살아 있기에 그러지 않을까요?

┗ 음...둘 다 별 생각없이 섭취하는 저로써는 살짝- 짜증이...^^ 하지만 사실이니 새겨둘 필요가 있죠

P.170

좋은 버릇이든 나쁜 버릇이든 몸에 익히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신발을 벗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벗을때 내 살이 도려 나가는 아픔을 견뎌야해요. 너무 오랫동안 신고 있었기에 내 살과 붙어버렸거든요. 그러니 여간내기가 아니면 신발의 마술에서 벗어니지 못하죠. 공자가 힘주어 말한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라."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도 네 신발을 벗으라는 말일뿐이죠.

┗ 버릇은 정말 고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몸에 익힌 것이기에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버리죠. 하지만 고칠 수 있다고 정말 원하면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죠. 더 중요한 건 선-악의 개념인데...정말 싫단 말이죠. 결국 선악은 내가 판단하는 주관적인 게 대부분이니까.

P.172

쫒겨난 사람을 기다리는 건 뾰족뾰족한 돌과, 앙상한 가시와, 길들지 않은 사나운 짐승들이 득실거기는 세상살이예요. 세상살이가 아려운 건 그것들을 물리칠 수 없어서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것들이 싫어서 그것들과 싸우는데,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통해 그 나쁜 것들이 우리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는 점이에요. 참으로 어려운 것은, 싸우되,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 거예요.

┗ 간디도 아니고 저게 가능할리가 없지...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군요. 그래서 싸움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지원군도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고 세상살이는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만 하는 환경인가 봅니다. 나는야 비폭력주의잔데...왜 세상과 싸워야하는겔까~

 

마지막으로 이거 뒤에 순금아이라고 동화가 하나 더 나오는데 뭔가 들어본듯 싶은듯 아닌듯 헷갈리지만...=ㅂ=;;;; 이것도 재밌어요. 역시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며 자신의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고 그 길 끝에서 실망하지 않기 쉽지 않다 정도...기억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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