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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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성찰과 투쟁 전략을 가슴에 돋을새김 하는 로드의 글들은 년 초에 읽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한 전의를 북돋고,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을 불어 넣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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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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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운동 현장의 목소리는 늘 다층적이다. 광장에 모인 개인들의 정체성은 젠더, 계급, 지역, 인종, 장애유무, 나이 등으로 복잡하게 교차된다. 긴급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공론장에서 우리는 여전히 듣는다. “그 말을 지금 꼭 해야겠어?”, “나중에!” 누군가의 절박한 요구는 사태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르는 한심함으로 야유된다. 광장에서마저 어떤 존재들은 지워진다. (하지만 누구도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는 자의 무지와 무능만 드러낼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차이를 우열화하고 이를 제도화하기까지 하는 무능한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을까.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는 특정 정체성들을 압제하는 이러한 현실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는 삭제된 존재들의 권리와 요구를 정치의 영역으로 들여오고 이들을 정치적 존재로 인식시킨 사상가이자 활동가이다. 오드리 로드의 신간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는 복수의 소수자성을 가진 이들을 위한 성찰과 실천을 담은 연설문, 에세이, 서문, 서평 등을 담고 있다.



1월 우리 사회는 여전히 헌법이 유린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으며, 미국은 트럼프 2기가 시작되어 반인권적 행정 명령이 남발되고 있다. 역사의 시계가 50년 전으로 빠르게 되감기고 있다.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발표된 로드의 이 글들이 지금의 국내외 상황과 너무나 많은 부분 오버랩 되어,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고 참담했다. 이렇게 변화는 더딘 것인가. 이렇게 세계가 퇴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오드리 로드의 냉정한 현실 진단과 저항 전략은 번번이 냉소와 절망으로부터 나를 건져내 주었다.


“좋은 시인은 그녀 혹은 그가 자기 자신이라고 정의하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글을 쓴다.”p93 오드리 로드는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라고 말한다. 연초에 이렇게 속 시원한 문장을 만난 것에 감사한다. 로드는 나를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외부가 나를 규정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 각자가 강해지려면, 자기 탐색의 과정은 필수라는 말이다. 로드에게 나란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로 형성되는 것이다. 언제나 과정 중에 나인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릴 때에야 비로소 타인들과의 차이 또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로드는 말한다. 타인과의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또렷한 자기 인식은 가장 선행되어야 할 저항과 창조의 시작인 셈이다.


차이에 대한 사유는 로드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로드는 차이가 변화의 창조적 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로드는 우선 차이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차이를 탐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차이는 누군가에게 권리를, 누군가에게는 권리 박탈을 가져다준다. 로드는 이렇게 차이를 위계화 하는 사회에서 차이에 반응하는 여러 사회화 방식을 분석한다. 차이가 분열의 심화로 이어지는 현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재화된 차이에 관한 신화적 규범들을 검토할 것을 주문한다. 차이를 스스로 정의할 권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의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성장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긍정된 차이는 타자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닌, 타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고 로드는 이야기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은 유럽과 북미 중심 근현대화를 상징해 왔다. 이후 펼쳐진 세계 질서는 생각 즉 이성의 주체가 이성애 중심 백인 남성임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로드는 확고하게 뿌리 내린 이 기득권을 전복할 대항 선언을 한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그저 존재할 것인가? 자유롭게 존재할 것인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로드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소수자들의 감정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폄하로 억압되어 왔는가. 은폐되고 억압된 감정이야말로 목격과 증언, 탈출과 해방의 가능성으로 풍요로운 바다다. 로드는 감정이 지닌 힘을 살려낸다. 고통과 분노에 침식될 것인가. 고통과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을 직시하고 해방을 향해 그리로 나아갈 것인가. 로드는 고통을 두려워해서도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되며, 피해자에 머물러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픔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소모적인 고통을 그는 경계한다. 통찰과 실천의 원료로써 감정을 활용하라는 로드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그 동안 묵혀두었던 내 감정들의 용처를 드디어 찾은 것 같아 홀가분해진다.


그렇다면 이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필요를 살피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p105 로드는 우리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드러내는 무기로써 말하기,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경험과 통찰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써 표현하기. 로드는 “의식의 심장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면서”p118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다. 로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줄 적당한 시를 찾지 못했을 때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소수자들을 부단히 지우려는 사회를 향해서 존재를 드러내기. 이를 위한 말하기와 글쓰기는 무엇보다 강력한 저항 전술이다. “나는 진실을 직시할 때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사회적 저항과 연대의 단초는 진실을 드러내고, 기록하고, 아카이빙 하는 것이다.


로드는 구체적인 투쟁 중에도 “우리가 도래하길 바라는 형태와 취향과 철학을 갖춘 전망”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며, 그 전망에 제한 또한 두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 내부 약자에 대한 또 다른 억압으로 이어지거나(흑인 사회 내부의 젠더 불평등, 동성애 혐오, 아동 학대 등) 기존의 구조 안에서 파이 나누기에 급급해 억압 구조를 재생산하는 잘못을( 흑인 사회 내부의 계급 불평등 등)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되고 싶은 인간,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의 본성,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계속 탐구해가며 스스로 정의해 가야지만 저항이 치밀한 억압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로드는 말한다.


“전 지구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본질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타자들과의 차이점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연결점을 찾아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생산, 관점, 활동을 아우르는 페미니즘 전망의 전 지구적 지평이 나아갈 길이라고 로드는 이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한다. 억압과 반동은 국제적으로 연결된다. 25년 1.19 서부지법 폭동은 21년 1.16 미국 의회 난입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트럼프가 공표한 젠더 정책(명백한 반인권적 범죄가 정책이라는 중립적 언어에 가려진다.)은 앞으로의 동성애 혐오와 연결 될 것이다. 12.3 내란은 다른 국가에서 극우의 모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 로드는 선언한다. 저항과 연대 또한 전 국가적으로 연결된다고. 이 책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책에 빼곡한 로드의 뜨겁고 생생한 성찰과 투쟁들이 시공간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았는가. 두 달여간 누적된 분노와 피로로 마음에 냉소와 환멸이 스멀스멀 퍼질 기미라면, 이 책을 권한다. 예리한 성찰이 예리한 문장으로 흐릿해지는 정신에 저항의 언어들을 바짝 새겨준다. 지치지 말라고, 함께라면 갈 수 있다고.


“함께, 우리의 차이를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길 수 있고, 이길 것입니다. 투쟁은 계속됩니다.”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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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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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얼하다.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정확히 매일, 강타하는 뉴스들에 정신이 얼얼하다. 현대 민주 공화정의 최소한의 합의와 최후의 마지노선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이 현장들을 실시간 생중계로 장장 50여일을, 미래마저 불확실한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다. 분노와 냉정, 절망과 낙관으로 생채기 난 정신이 혼미하다.


난타당한 정신은 냉소와 환멸로 쉬이 기운다. 하지만 냉소와 환멸은 사치다. 우리에겐 퇴로가 없다. 지치지 않고, 인내하고, 계속 말하고 계속 경청해야 한다. 전면적인 전선이 드러났고,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예정된 듯 이런 우리에게 너무나 간곡한 전언이 도착했다. 편지 봉투에는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라는 묵직한 연대의 선언이 쓰여 있다. 발신인은 전사이자 시인, 흑인 퀴어 지식인 활동가 오드리 로드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강렬한 성찰의 언어로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에 맞서 급진적 사회 운동의 통찰과 전략을 갱신했던 전사, 오드리 로드다.


“전 지구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본질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해제에서 옮긴이는 로드가 이미 1980년대에 미국에 만연했던 각종 혐오 정치가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문제임을 인식하고, 이에 대처할 실천들을 해온 점에 주목한다. 옮긴이의 말대로 2020년대에 우리가 치르고 있는 이 전쟁들, 여성혐오, 노동혐오, 장애인 혐오, 동성애 혐오, 빈곤 혐오, 디지털 성범죄, 난민 혐오 등은 국경을 넘어 전선이 구축되었다. 그 핵심에는 극우 파시즘이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내란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극우 파시즘의 발화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로드는 혐오 정치의 전 지구적 연결에 맞서기 위해 흑인 페미니즘의 지평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했다. “로드는 미국의 흑인과 퀴어 시민은 세계 시민 사회에 책임이 있음을 역설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절실한 성찰이다. 국경을 초월한 혐오 정치와 극우 파시즘에 저항해 싸우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시민 사회도 로드가 강조했던 사회 운동의 전지구적 지평 즉, 관점, 활동, 지식 생산이 모두 연결되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겠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구할 것인가? 어떻게 지치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들 속을 헤매다 이 책의 옮긴이 해제를 읽었다. 해제가 조감해준 로드의 사유를 읽고, 이럴 때일수록 길고 깊은 호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복구와 재건은 생각보다 더 더디고 지리멸렬 할지도 모른다.


 “로드가 이 글에서 제시한 퀴어 비전은 우리가 노력하거나 기대한 만큼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식한 채 꾸준히 계속 시도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가는 정치다.” 목소리 내기, 경청하기, 조급해하지 않기, 혐오에 맞서다 혐오에 물들지 않기, 일상을 가꾸기. 내가 다짐할 수 있는 일이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자미>에서 이미 경험했듯 로드의 문장들에는 열정이라는 말에도 차마 담길 수 없는 힘이 넘실거린다. 그야말로 힘. 언제든 기꺼이 다시 일어나는 힘, 꿈틀거리는 생명의 힘, 유혹하고 잉태하고 살리는 성애의 힘. 나는 그 힘들의 수혈이 필요하다. 이 책이 절실한 이유다.


“이 여정을 통해 나는 내가 이전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어 내 능력을 향상시키는 열매를 얻었다.” 로드의 말처럼, 우리도 이 여정을 함께 걷는 중에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열매들을 얻으리라 믿는다. 아, 이미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얻었고, 또 매주 얻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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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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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축적해 온 용기와 지성을 최대한 동원해 과거를 반추하여, 현재와 미래는 물론 과거마저 구원하는 저자의 치열함이 경이롭다. 좋은 작가는 이렇게 자신을 태워 어둠 속의 누군가를 밝혀주는 존재구나 새삼 느끼게 하는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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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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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역시 도덕적 의무로 만들되, 섹스에 담긴 쾌락은 범죄로 만들어라” p66

 

걸레, 암캐, 꽃뱀, 창녀, 잡년. 이 단어들을 처음 인지했을 때는 언제였을까, 이 단어들이 추적하는 레이다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음 단속, 몸단속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사회가 허락하는 경계 안에서 옷을 고르고, 육체를 관리하고, 신체의 가동 범위를 좁히고, 언어를 선택하고, 가방 속 물건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소녀 시절부터이다.

 

내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설명 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p51

 

취약함. 안타깝게도 나는 이 단어 외에 소녀 시절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겠다. 몸의 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외적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아름답고 조신한 여성이라는 신화, 공사 공간을 막론하고 소녀를 죄어오는 성폭력의 가능성들, 공기처럼 만연한 미세한 성차별에 대한 선명한 자각. 이 억압의 부조리를 설명할 언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소녀는 고통을 선택하는 게, 고통이 너를 선택하게 두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이 문장 앞에 멈춰 섰다. 한때 나이기도 했던, 여전히 나이기도 한, 소녀들의 폭식과 절식, 침잠과 과잉행동, 편집증, 자해와 중독에 뒤엉킨 무수한 시간들.

 

그 애는 그저 자기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남았던 거다” p57

 

이 문장들의 주인공 작가 멀리사 피보스는 십대의 그녀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던 세계와 그 혼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선택했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소녀 시절을 향해 항해를 떠난다. ? 그 고통의 일렁임이 아직도 세포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녀를 어둠에 잠기게 했던 억압과 폭력이, 그 상흔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 떠난 피보스의 항해 기록이 이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에 펼쳐진다. “항해사이자 수평선인”(31)인 나는 몸의 언어로 물살을 헤치며 멀리 보이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라는 수평선으로 나아간다.

 

"사회가 너를 만든다. 그들은 이미 너를 잡년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p88

 

사회에는 낙인이라는 것이 있고 낙인은 혐오와 배제를 불어온다는 것을 소녀들은 몸의 변화와 함께 체득한다. 식별 가능한 젠더를 안주시킬 몸이 성장한다는 것은, 그 몸에 사회의 지문이 새겨진다는 걸 의미한다. 조각의 주체는 남성 중심 사회인지라 조각의 칼날은 소녀의 신체와 정신에 가부장적 질서를 날카롭게 새긴다. 소녀들의 육체와 정신은 깍이고, 조여지고, 조립된다. 소녀는 "거울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p69, 사회에 비춰진 나와 나의 경험, 욕망 사이에서 자기 소외가 시작된다.”p69

 

 

"망각은 과거를 지울 수 없다. 그저 다음 생까지 지고 갈 폐허를 숨길 뿐이다“p58

 

대대적인 사회문화적 수술대 위에서 소녀들은 두려움과 고통, 의문과 적응,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피 흘리고 분열한다. 소녀 시절이라는 내외과적 수술 기간 동안, 누군가는 순수한 소녀, 모범적인 소녀,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로 판명되고, 누군가는 암캐, 걸레, 꽃뱀, 잡년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구분 사이에는 무수한 찢김과 출혈이 있고, 어느 소녀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상처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그 경험이 남긴 결과를 검토하고 싶다.“ p250

 

그러나 동의한 적 없는 일방적인 숭배와 혐오의 그물 안에 포획되지 않으려 저항하며, 소녀들은 생존해왔고, 생환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니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생존기이자 생환기이다. 피보스는 사회적 내러티브와 자신의 실존, 욕망 사이에서 분열되는 정동의 심연, 자신을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의 늪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혼란의 진앙지, 그 어둠, 소녀 시절로 몸을 던져 헤엄쳐 들어갔다. 내 경험을 규정할 언어를 선택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여정이다.

 

돌아가자. 그 애가 아주 오래전에 남긴 자국들이 모두 보인다. 나는 물속으로 손을 뻗어 그 익숙한 형태를 어루만진다.” p375

 

소녀에서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한 작가는 소녀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둘 수 없다. 동시에 소녀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존과정에서 얻은 풍요로운 사유의 힘을 가지고 소녀를 찾아가는 작가는,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충만한 활력으로 넘치는 소녀를 만난다. 현재의 나는 용기와 지혜라는 무기를 가지고 과거의 소녀를 구하고, 과거의 소녀는 자연의 권능과 혼돈의 힘으로 현재의 나를 구한다. 소녀였던 나와 성인이 된 나는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줌으로써 계속 이어질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구원을 노래하는 서사시이다. 지금도 쓰여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서 쓰여 질 세대를 잇는 여성 연대의 서사시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립되도록 길들인다. 사회 구조는 그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다.”p122

 

피보스는 이 책을 통해 회고록, 에세이, 인터뷰, 신화, 미디어 컨텐츠, 문학, 철학, 문화비평을 유기적으로 직조해 여성의 몸, 정체성, 욕망, 낙인과 폭력, 감정의 사회적 속성, 트라우마를 해부한다. 이 지난하고 복잡한 해부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의 경험과 고통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다. 강요된 역할과 수치심과 자기혐오는 내 몸 바깥의 표현”p150이기에 여성 경험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드러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재해석된 여성의 경험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야기되는 여성의 삶을 스스로 재배치하고 재규정할 수 있는 언어와 힘을 얻는다.

 

우리 몸의 진실을 무시하면, 몸이 지닌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p301

 

이 책은 여성의 생애 과정을 관통하는 혼돈과 고통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 작업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종래는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포기되지 않는 수행이 여성을 성찰과 해방의 장소로 인도한다는 희망을 증명한다. 이 책은 다시 쓰는 소녀 시대이며, 소녀였던 그들에게 언젠가, 언제나 다시 쓰기를 당부하는 연대의 손길이다.

 

PS. 피보스의 회고와 그가 수행한 정말 많은 여성들의 인터뷰들을 읽는 내내, 여성 대상 불법촬영, 스토킹, 딥페이크 범죄, 여성혐오가 스포츠처럼 행해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자주 책을 덮고 눈을 감거나 누워야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소녀 시대가 끝나지 않았으며,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폐허 속에 감추고 있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청소년용 성교육을 의미한다.^^)은 내 몸에 일어나고 있던 일이 세상에서의 내 가치를 변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p42 이 문장에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 그랬다. 여성으로서 몸의 변화, 임신 가능성을 알려주는 책이나 어른들은 있었지만, 어쩌면 이후 우리 삶을 더 쥐고 흔들 뿌리 깊은 젠더, 차별과 편견, 성폭력의 가능성들, 그것들에 대해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해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청소년 때 이 글을 읽었더라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고 쓴 김멜라 작가의 추천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너무나 악하고 너무나 뻔뻔해서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이 기괴한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 시민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피보스에게 그랬듯이, 소녀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보스와 소녀가 그랬듯이, 우리도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그 소녀들과 더 없이 매혹적인 연대를 이어가길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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