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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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해방으로 비상하는 절망의 변증법

보편적(?) 인간, 보편적(?) 이성이라는 서양 철학의 거대 담론에서

키르케고르는 개인을 구출해냈다.

(그의 삶과 철학은 실존주의의 시작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세상에서도 결단코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1)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관찰하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얼마나 더 불행해 지는지 ”(27)

‘생’이라는 거대한 미지를 안고 세계에 던져진 존재들은

역사와 시대를 앓느라, 주어진 시스템을 살아내느라

자신이 어떤 정신적 위기 속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삶의 조류에 휩쓸린다.

키르케고르가 목격한 19세기 유럽은 21세기 세계를 잉태하고 있다.

그의 시선에 담긴 2세기 전 개개인의 실존은

현대인의 내면 풍경, 그 밑그림이다.

우울, 불안, 절망

이 정신적 상태들은 현대의 의술로

치료 받아야만 할 병리적 상태인가?

이 부정적 혐의가 덧씌워진 감정의 정동들은

키르케고르에게 개인의 실존을 이해하는 관문이며

다른 차원의 삶(진리 안의 삶, 윤리적 삶)으로 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에게 우울과 불안은

현실의 실존 상태를 진단하게 하는 징후이며,

실존을 심원한 심연으로 밀어붙이는 힘이다.

“불안은 정신적인 힘이고,

이런 힘을 가진 육체는 스스로 인간의 심장을

향해 굴을 뚫고 들어간다.” (61)

기꺼이 절망을 선택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개인은

실존의 막다른 경계에 단독자로 서게 된다.

실상의 허무, 그 바닥까지 내려간 개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경악 속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79)

그에게 남겨진 것은 실존 그 자체이며,

실존적 선택뿐이다.

퇴로가 없는 면벽의 선택만 그 앞에 놓여진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실된 자기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다.

"선택을 통해 인격은 자신이 선택한 것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반대로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인격은 하염없이 쇠약해질 뿐이다.” (101)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타협이 불가능한 절망 속에 행해진 선택은

자기 자신과 단독자로 직면할 수 있는 해방된 고독이자

자유로 도약하는 탈출구다.

“이 말(이것이냐, 저것이냐)은

나에게 항상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 중략 -

이 말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대립을 움직일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대립은 오로지 자유를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싸운다.” (97)

이러한 분투 속에 그는 결국

실존에 가장 절실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절망, 선택, 구원.

구원의 트라이앵글.

절망의 변증법을 지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구원은 단독자로서 신과 독대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현대인들에게는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욱 고독하고, 혹독한 자기 책임이 따를 것이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완전히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면,

이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81)

“누군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부터 해야 한다. 이는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확신이다” (121)

공동체 안의 여러 사회적 지위와 역할로 호명되는

개인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어떤 공동체적인 기획이나 목표, 열정 없이

‘윤리적’ 단독자로서, 나는 나를 직면할 수 있을까.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타자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키르케고르가 되찾아야 할 ‘나’라고 부르는

실존은 욕망으로 추동되는 자기애, 자존감, 나르시시즘과는 결이 다르다.

그가 자발적 절망을 관통해서 만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자신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내가 선택한 자유의 다른 말은 책임을 지는 나이다.

제도권 종교 시스템을 매개하지 않고

신을 단독자로서 독대하는 나는

무한한 신의 은총을 향유하는 만큼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단독자로서

무한한 책임 또한 감내해 한다.

절망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라는

그의 잠언들이 육중한 무게의 자기발견 요구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의 자리에 괄호를 쳐본다.

괄호 안에 무엇을, 누구를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신념, 가치, 사물, 이상향, 인물, 신일수도 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키르케고르는 허무와 공허 속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보다 높은 정신, 윤리적 가치 속으로 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높은 가치를 향해 자아를 던졌을 때,

응답으로서 되돌려 받는 자유롭고 해방적인 자아.

절망의 변증법가 다다른 종착지는 자기 욕망에 포박당한 자아를 비우고

인간의 욕망에서 해방된 심원한 가치에 복종하는

한없이 충만한 자유로운 자아다.

절망과, 절망의 변증법을 역설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들은 묻는다.

“절망의 변증법”을 통과해

당신은 “무엇” 과 단독자로 직면할 것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구원으로 가는 절대적 조건으로서 절망을 설파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집 제목이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다.

잔인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한 제목이 아닌가.

키르케고르가 지금, 여기의 세계를 목격했다면

그의 사유는 어떤 언어를 선택했을까.

물론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도

종교적 독단과 전쟁으로 괴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긍정’과 ‘낙관’이, ‘구원’과 ‘희망’이

시장에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로

사고 팔리는 세계는 아니었다.

절망이나 비관이 이 정도로

부당한 혐의 속에 유폐되지는 않았다.

현대는 그야말로 ‘절망조차 금지된 세계’이다.

어떤 글들은 닳지도, 늙지도 않는다.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전언으로 현재에 거듭 당도한다.

존재의 부조리한 실상을 재차 일깨우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적 현재를 의심하는 질문들은

언제나 현실을 낯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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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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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지금, 여기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주해한 이용주 선생의 번역이 유려하다. 도나 덕이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오해받기 쉬운데 언어에 관한 근본적인 사유, 소비자본주의에서 욕망하는 개인들, 이익 단체화되는 정치 현실을 도덕경을 통해 보다 선명히 인식할 수 있다. 고전과 역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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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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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최상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오직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안다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병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이 없다. (71장, 589)


최근 출간된 <노자 도덕경>(이용주,이학사,2024)의 71장이다. 매 시간 복잡한 이슈를 쏟아 붓는 각종 매체는 지식과 정보가 동시대인이 장착해야할 필수 덕목임을 각인시킨다. 하루 영양제를 챙기 듯 정보를 복용하는 현대인은 분사되는 ‘앎’과 ‘의견’을 의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무지하지 않고, 현대인은 ‘안다.’


이 확신을 노자(B.C. 6세기)는 무색하게 한다. 무지에 대한 무지. 이 이중의 무지가 우리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임을 <노자도덕경> 81개 잠언들은 일깨운다.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병,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 조금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병, 노자는 보통 사람들이 앓는 다양한 ‘지식의 병’에 대해 말한다.”(590)


이용주 선생의 <노자 도덕경>은 주석은 정밀하고 해제는 풍부하다. 이용주 선생이 주해한 <노자 도덕경>은 위에 언급한 ‘지식의 병’을 포함해 현대와 현대인이 앓고 있는 사회적 질병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물질도, 사고도, 관계도 적정, 적당, 적절의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과잉과 치우침, 넘침과 질주, 파벌과 뒤집기가 현대의 질병이다. 하지만 현대라고 별난 시기가 아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가 전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이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도’에 관한 무지이다. ‘덕’에 관한 무지이다. 도와 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도는 근원적 실재이며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자, 생명의 근원이다(678), 덕은 도가 인간 혹은 세상사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된 것이다(678)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어둠에 이어지는 또 다른 어둠

그것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다. (1장, 14)


도는 비어있지만

아무리 해도 가득 채울 수 없다. (4장, 48)


도라는 것은 황홀할 정도로 눈이 부시고 빠르다.

눈이 부시고 빠르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 (21장, 192)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 (43장, 374)

없는 듯 보이는 것이 틈이 없는 것 사이로 들어간다 (43장, 374)”


도는 언어화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생성시키고, 변화시키고, 관장한다. 도는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고 듣는 만지며 사는 이 세계 자체가 도 그 자체이다. 각각의 사물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에 익숙한 현대인인 나에게 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점점 더 안개 속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안개는 앞을 가리는 안개가 아니라, 그 흐림 사이로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계가 미묘하게 보여 지는 새로움을 품은 안개이다. 인식의 경계를 저 멀리 둥글게 밀고 가는 에너지가 있는 안개이다.


도는 분별 너머의 상태이자 작용이기에 언어로 포착할 수 없지만, 노자는 도를 사람들에게 닿게 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오독과 오해가 예견된 언어를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한계’를 품은 언어들이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지. 진리는 시로써만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 각장이 시이자, 노래이다. 지혜의 서사시다. 인식의 지평이 일상을 뛰어넘어 저 먼 광활한 곳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결국 도는 소박하고 유순한 일상에 경이를 품고 안착한다.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인 ‘홀’과‘황’처럼, 노자의 음성은 황홀하다.


2018년에 타계한 SF의 거장 어슐러 르 귄은 도덕경을 영문으로 번역할 정도로 노장 사상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 문명을 통찰하고 우주와 미지의 존재들, 미래를 상상했던 그에게 노장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들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도덕경을 읽다보면 그의 확장된 상상력의 본령이 많은 부분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현실을 극복하려면 이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틀을 의심하고 확장해가야 한다. 그 단초들이 도덕경에는 무궁하다.


고도로 발달한 소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기 착취형 소비자를 원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한 ‘자기 계발’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자본의 욕망과 스스로의 욕망이 착종된 속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그라운드 위의 모든 사람을 소진시킨다. 그라운드 자체가 자본과 욕망의 멈출 줄 모르는 회전판 위에서 돌기 때문이다. 자기를 “계발”하기에 앞서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고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노자 도덕경>은 유위의 자기 계발이 지닌 기만성을 폭로하는 무위의 수행서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노자는 오래전에 인간성을 간파했고, 문제들을 진단, 예견했으며, 해결 방안을 처방했다. 도덕경이 고전 중의 고전인 이유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철리와 인간에 관한근원적인 통찰 때문이다. 그만큼 도덕경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이 책 전체에 미묘한 에너지의 파장으로 가득하다. 현대가 앓고 있는 탐욕과 소비, 속도와 경쟁, 자폐와 나르시시즘의 신경증과 증상들. 이것들을 말끔하게 씻어줄 문장의 폭포수는 맑고 장쾌하다. 부드럽고 소박하다. 청량한 물방울로 정신과 생활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은 개운하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도덕경을 읽는 내내 심신의 창이 활짝 열리고, 그 창으로 대숲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듯 청량하다. 욕심을 줄인다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더께로 앉은 욕구와 필요의 객진은 심신의 순환을 무겁게 지체시킨다. 순환은 생명의 기본이다. 진득한 욕망의 불순물로 심신과 생활의 활활한 순환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노자는 도와 덕의 순환이 심신과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일갈한다.


<노자도덕경>은 크게 <도경>과 <덕경>으로 주제를 나눌 수 있다. <도>편에서는 도의 심원함을, <덕>경은 그 도가 현실에 적용된 상태를 각각 설명한다. <노자도덕경>은 우주론, 인식론, 가치론이자 수행론, 처세론, 정치론이다. 세계의 본질, 인식 방법에 대한 각성, 가치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논하고, 그 모든 것이 실제 세계에서 발현되는 양상을 촘촘하게 드러내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책의 말미에는 방대한 사유의 체계인 본서를 읽는 방법이 친절하게 소개된다. 주제들을 정리한 표를 보면 이 고전이 말하려는 맥락을 한눈에 가늠해 볼 있다. 노자 사유의 기본 골격을 머릿속에 그리며 책을 읽으면 그 난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큰 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노자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배려한 이용주 선생의 자상함이 느껴진다.


일단, 재밌다. 정신을 쏙 빼놓는 SF 소설이나 감동을 주는 시처럼 문장이 유려하고 흥미진진하다. 문장들을 곱씹을수록 읽는 맛이 더해진다. 노자의 광활한 사유와 시적인 문장에 녹아들어 읽게 된다. 유머러스하다. 기발한 표현에 자주 웃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자 사상의 광맥이라 할 ‘도’는 미묘한 만큼 울림이 크다.


이용주 선생의 꼼꼼한 주석은 압권이다. 노자의 문장들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진단과 지혜로 가득한지 보여주는 설명들은 예리하고, 시의적절해서 역시 빠져 읽게 된다. 이렇게 난해하고 밀도 높은 글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힌다는 것은 이용주 선생님의 글쓰기의 힘이리라. 세심하고 깊이 있다. 양서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병 주고 약 주는 자본과 시장의 ‘치유’와 ‘힐링’에 지지 말자.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한’ 앎이고 이 앎은 노자가 2500년 전에 간파했듯이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뛰어넘는 전복적인 ‘무지’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선입견, 나아가 세상의 편견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성인은 언어, 관념의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36)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15)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14)


“이름은 ‘본질’이나 대상의 ‘실재’가 아니다. - 중략 - 이름은 실재 및 본질을 무시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임시 수단에 불과하다.” (19)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세상을 관념화, 추상화한다. 그런 관념화,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우리 방식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판단하고 이용한다. 그 결과 인간은 철저하게 언어(로고스)적 방식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언어(로고스)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단순히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22)


언어는 존재의 ‘안전한’ 집이자 감옥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분별의 세계가 망상임을 최근 몇 년 혹독하게 몸으로 체득했다. 기후 위기와 팬대믹의 시대에 비인간 존재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자는 인간이 언어(로고스)적 존재로서 세계를 경계와 구획으로 나누는 것을 경고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오래전에 당도해 있었다. 무위(함이 없이 하는 것)와 무지(분별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앎), 무욕, 부쟁, 그침과 멈춤, 비움, 검소, 자애, 포용, 평화. 노자의 지혜는 시간이 갈수록 새롭다. 산적한 인류의 과제는 오래된 미래, 노자의 도와 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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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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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예정된 죽음의 선고,

자타를 투명하게 단련시키는 고통의 연속,

침상을 바라보는 이의 한없는 무기력.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딸의 간병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어머니 프랑스와즈 드 보부아르,

딸 시몬 드 보부아르.



실존주의 철학자,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소설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딸.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침상 옆에서

비범한 지성을 가진 딸의 눈에

어머니의 삶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삶의 마디마다 느꼈을

혼란과 분열을 딸은 기억한다.



욕망하는 개인과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역할의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과 언어적 습성들을 딸은 이제야 독해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어머니는 갖지 못했던 언어로

아내, 어머니라는 역할 뒤에 삭제됐던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재현한다.

여성해방선구자로서 어머니를 한 ‘여자’로,

소설가로서 어머니의 ‘삶의 내적 풍경’을,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복기하고 기록한다.

통제와 회피, 불화와 갈등,

애증과 침묵으로 긴장된 평행선을 그었던 모녀는

죽음이 벗겨낸 상처와 아집의 자리에

여실하게 드러난 인간의 취약성 앞에서

서로의 삶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네가 보이는구나!’

어머니는 딸에게 임종을 앞두고

여러 날 반복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의 눈 속에

비친 딸 보부아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억과 이야기는 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머니 프랑수와즈 드 보부아르’의 삶과

‘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삶은 만난다.

네가 ‘보이기’ 시작하고 (어머니),

엄마의 내면에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성이 살아있음이 ‘보인다’. (보부아르)



죽음이라는 사건이 불러오는 두려움과

번번이 배신당하는 기대, 후회와 자책,

기억과 회한. 그리고 절대적 고독,

이해 불가능의 선으로 넘어가 버린

사건 앞의 절대적 경악.

전면에 드러나는 취약성. 분노.

수용 혹은 평화로운 체념.

죽음은 폭력적인 사건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정의된다.

여기서 죽음은 임종 직전의

진행형으로서의 죽음이자 완료된 죽음이다.


삶을 향한 본인의 의지에 반한

절대적인 추방. 극도의 취약성.

타인의 의지와 의도에 좌우되는 사물화 된 몸.

지극한 순응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부조리한 주문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시기만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배달되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불평등하고

죽음을 둘러싼 선택들은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다.

이 소설에도 현대 의료 시스템의

여러 가지 그늘들이 인물 속 대화로 표현된다.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

당사자, 주변인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국을 설명하기 힘들다.

감정의 파고는 너무 가파라 설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서로를 다독여 줄 여유조차 없다.



추측과 짐작 속에 각자의 마음의 파문은

애써 감추고,

이제는 새로운 일상이 된,

하지만 전혀 낯선 일상을 이어간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회오리들은

고통에 지친 체념과 편안한 휴식에 대한

고요한 갈망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잠잠해진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인간을 벌거벗긴다.


겉치장을 벗어던진 인간들만이

나눌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비애와 연민.

연민은 상대에게 스며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말 없는 약속처럼,

꽃다발이나 화관 없는 장례도 외롭지 않은 이유다.

화려한 장례는 당사자들이 공유하는

존엄한 침묵의 인사를

어쩌면 모욕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제가 언제 주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 간병, 상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보부아르의 문장들은 내면에 상주하는

죽음을 둘러싼 무거운 실루엣에

보다 선명한 윤관을 그려준다.

짓눌리고 뒤엉킨 감정들이

올올히 풀려 설명 가능한 것들이 된다.

감정들을 조금씩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슬픔,

자책과 후회, 더 무거운 죄의식과 회한,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인 무기력.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 감정들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비애의 무게로

늘 질식 상태다. 그래서 정작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책 ‘아주 편안한 죽음’은 말을 걸어온다.

죽음과 관련해 우리 안에서

시끄럽게 침묵하고 있는 말들이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임을 납득시킨다.


보부아르가 먼저 말을 조용히 전해준다.

독자라는 위치는 어떤 반응이나 대답을

즉각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얼마나 지혜로운 위로이자 연대인가.

작가란 존재에 대해, 소설이란 창작물에 대해

새삼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까다롭지 않은 문장들의 글이

어쩌면 이리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지.

각 장, 각 문단, 각 문장들이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정서적 묘사의 과잉 없는 절제된 문장들은

상황과 심리들을 정확히 전달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자,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그는 ‘소설가!’였다.

형식과 의미의 낭비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

보부아르의 성정까지 짐작하게 된다. 멋지다.

이 책은 20년 전에 읽은 소설들부터

최근 국내 출간 저서들까지

보부아르의 글들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성의 삶

가정 ‘내’에서 버려지는 아내,

결혼 관계 '안‘에서 폐기되는 혼인 서약.

가정 안에서 소거되었지만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에 갇혀 가정 안에

머물러야 하는 기혼 여성의 삶,

이 여성이 살고 있는 삶의 모순에 무지한

이들에게 비틀린 신경증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삶. 

폐기된 약속들과 함께 여전히 한 공간에서

남편과 머무르며 욕망을 억누르고

좌절된 욕망들을 딸들에게 투사하고,

여러 방어적인 모습으로 혼란스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여성의 삶.

어머니와 딸의 복잡한 심리적 역사,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인 삶과 죽음까지.



반복하지만,

늦기 전에 많은 이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번에 여성과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새롭게 리커버 에디션으로

나온 책의 만듦새가 단아하다.

표지의 그림은 오래된 구리거울의 거친 질감,

옥색 가락지의 여린 단단함.

조개껍질의 찬란한 반짝임을 연상시킨다.

홍지희 작가의 원화는

침묵 속에 아우성치는 여성들의 내면이

시간 속에 응결된 것처럼 처연하게 아름답다.



푸른빛이 고색창연하면서도 화사함이 현대적이다.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은

기억과 과거, 그리고 망자들과의 연대를 약속한다.

누드 제본으로 만들어진 책등도 고전적이다.

표지의 주색인 미색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

책등의 단정함이 더없이 조화롭다.

현대의 고전이라 불릴 만한 이 책의

가치에 답하는 디자인이다.



사철 제본으로 어디를 펴도 평평하게

펼쳐지는 읽기의 편안함이라니.

보기에도 예쁘고, 문진이 필요 없어 읽기도

편해 이런 제본 방식이 뭔가하고

제본 방법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책 제작의 실무적 조건들이 있겠지만,

많은 책들이 사철 제본 방식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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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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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선물로 누군가에게 봄의 전령사가 되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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