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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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해방으로 비상하는 절망의 변증법

보편적(?) 인간, 보편적(?) 이성이라는 서양 철학의 거대 담론에서

키르케고르는 개인을 구출해냈다.

(그의 삶과 철학은 실존주의의 시작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세상에서도 결단코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1)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관찰하면

얼마나 불행해지는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얼마나 더 불행해 지는지 ”(27)

‘생’이라는 거대한 미지를 안고 세계에 던져진 존재들은

역사와 시대를 앓느라, 주어진 시스템을 살아내느라

자신이 어떤 정신적 위기 속에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삶의 조류에 휩쓸린다.

키르케고르가 목격한 19세기 유럽은 21세기 세계를 잉태하고 있다.

그의 시선에 담긴 2세기 전 개개인의 실존은

현대인의 내면 풍경, 그 밑그림이다.

우울, 불안, 절망

이 정신적 상태들은 현대의 의술로

치료 받아야만 할 병리적 상태인가?

이 부정적 혐의가 덧씌워진 감정의 정동들은

키르케고르에게 개인의 실존을 이해하는 관문이며

다른 차원의 삶(진리 안의 삶, 윤리적 삶)으로 비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에게 우울과 불안은

현실의 실존 상태를 진단하게 하는 징후이며,

실존을 심원한 심연으로 밀어붙이는 힘이다.

“불안은 정신적인 힘이고,

이런 힘을 가진 육체는 스스로 인간의 심장을

향해 굴을 뚫고 들어간다.” (61)

기꺼이 절망을 선택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개인은

실존의 막다른 경계에 단독자로 서게 된다.

실상의 허무, 그 바닥까지 내려간 개인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지경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경악 속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79)

그에게 남겨진 것은 실존 그 자체이며,

실존적 선택뿐이다.

퇴로가 없는 면벽의 선택만 그 앞에 놓여진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망실된 자기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다.

"선택을 통해 인격은 자신이 선택한 것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반대로 선택을 하지 않을 경우, 인격은 하염없이 쇠약해질 뿐이다.” (101)

동시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실존의 무한한 가능성이다.

타협이 불가능한 절망 속에 행해진 선택은

자기 자신과 단독자로 직면할 수 있는 해방된 고독이자

자유로 도약하는 탈출구다.

“이 말(이것이냐, 저것이냐)은

나에게 항상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 중략 -

이 말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대립을 움직일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대립은 오로지 자유를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싸운다.” (97)

이러한 분투 속에 그는 결국

실존에 가장 절실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

단독자로서 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절망, 선택, 구원.

구원의 트라이앵글.

절망의 변증법을 지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구원은 단독자로서 신과 독대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현대인들에게는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욱 고독하고, 혹독한 자기 책임이 따를 것이다.

“절망이라는 질병은 완전히 변증법적이기 때문에,

그런 질병에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다면,

이는 가장 심각한 불행이다” (81)

“누군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부터 해야 한다. 이는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에

품고 있는 확신이다” (121)

공동체 안의 여러 사회적 지위와 역할로 호명되는

개인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나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어떤 공동체적인 기획이나 목표, 열정 없이

‘윤리적’ 단독자로서, 나는 나를 직면할 수 있을까.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타자와 내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키르케고르가 되찾아야 할 ‘나’라고 부르는

실존은 욕망으로 추동되는 자기애, 자존감, 나르시시즘과는 결이 다르다.

그가 자발적 절망을 관통해서 만나야 한다고 역설하는

자신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내가 선택한 자유의 다른 말은 책임을 지는 나이다.

제도권 종교 시스템을 매개하지 않고

신을 단독자로서 독대하는 나는

무한한 신의 은총을 향유하는 만큼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단독자로서

무한한 책임 또한 감내해 한다.

절망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라는

그의 잠언들이 육중한 무게의 자기발견 요구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의 자리에 괄호를 쳐본다.

괄호 안에 무엇을, 누구를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신념, 가치, 사물, 이상향, 인물, 신일수도 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키르케고르는 허무와 공허 속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보다 높은 정신, 윤리적 가치 속으로 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높은 가치를 향해 자아를 던졌을 때,

응답으로서 되돌려 받는 자유롭고 해방적인 자아.

절망의 변증법가 다다른 종착지는 자기 욕망에 포박당한 자아를 비우고

인간의 욕망에서 해방된 심원한 가치에 복종하는

한없이 충만한 자유로운 자아다.

절망과, 절망의 변증법을 역설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들은 묻는다.

“절망의 변증법”을 통과해

당신은 “무엇” 과 단독자로 직면할 것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구원으로 가는 절대적 조건으로서 절망을 설파하는

키르케고르의 잠언집 제목이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다.

잔인하지만, 부정할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한 제목이 아닌가.

키르케고르가 지금, 여기의 세계를 목격했다면

그의 사유는 어떤 언어를 선택했을까.

물론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유럽도

종교적 독단과 전쟁으로 괴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긍정’과 ‘낙관’이, ‘구원’과 ‘희망’이

시장에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로

사고 팔리는 세계는 아니었다.

절망이나 비관이 이 정도로

부당한 혐의 속에 유폐되지는 않았다.

현대는 그야말로 ‘절망조차 금지된 세계’이다.

어떤 글들은 닳지도, 늙지도 않는다.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전언으로 현재에 거듭 당도한다.

존재의 부조리한 실상을 재차 일깨우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적 현재를 의심하는 질문들은

언제나 현실을 낯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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