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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ㅣ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평점 :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최상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오직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안다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병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이 없다. (71장, 589)
최근 출간된 <노자 도덕경>(이용주,이학사,2024)의 71장이다. 매 시간 복잡한 이슈를 쏟아 붓는 각종 매체는 지식과 정보가 동시대인이 장착해야할 필수 덕목임을 각인시킨다. 하루 영양제를 챙기 듯 정보를 복용하는 현대인은 분사되는 ‘앎’과 ‘의견’을 의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무지하지 않고, 현대인은 ‘안다.’
이 확신을 노자(B.C. 6세기)는 무색하게 한다. 무지에 대한 무지. 이 이중의 무지가 우리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임을 <노자도덕경> 81개 잠언들은 일깨운다.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병,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 조금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병, 노자는 보통 사람들이 앓는 다양한 ‘지식의 병’에 대해 말한다.”(590)
이용주 선생의 <노자 도덕경>은 주석은 정밀하고 해제는 풍부하다. 이용주 선생이 주해한 <노자 도덕경>은 위에 언급한 ‘지식의 병’을 포함해 현대와 현대인이 앓고 있는 사회적 질병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물질도, 사고도, 관계도 적정, 적당, 적절의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과잉과 치우침, 넘침과 질주, 파벌과 뒤집기가 현대의 질병이다. 하지만 현대라고 별난 시기가 아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가 전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이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도’에 관한 무지이다. ‘덕’에 관한 무지이다. 도와 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도는 근원적 실재이며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자, 생명의 근원이다(678), 덕은 도가 인간 혹은 세상사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된 것이다(678)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어둠에 이어지는 또 다른 어둠
그것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다. (1장, 14)
도는 비어있지만
아무리 해도 가득 채울 수 없다. (4장, 48)
도라는 것은 황홀할 정도로 눈이 부시고 빠르다.
눈이 부시고 빠르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 (21장, 192)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 (43장, 374)
없는 듯 보이는 것이 틈이 없는 것 사이로 들어간다 (43장, 374)”
도는 언어화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생성시키고, 변화시키고, 관장한다. 도는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고 듣는 만지며 사는 이 세계 자체가 도 그 자체이다. 각각의 사물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에 익숙한 현대인인 나에게 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점점 더 안개 속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안개는 앞을 가리는 안개가 아니라, 그 흐림 사이로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계가 미묘하게 보여 지는 새로움을 품은 안개이다. 인식의 경계를 저 멀리 둥글게 밀고 가는 에너지가 있는 안개이다.
도는 분별 너머의 상태이자 작용이기에 언어로 포착할 수 없지만, 노자는 도를 사람들에게 닿게 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오독과 오해가 예견된 언어를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한계’를 품은 언어들이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지. 진리는 시로써만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 각장이 시이자, 노래이다. 지혜의 서사시다. 인식의 지평이 일상을 뛰어넘어 저 먼 광활한 곳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결국 도는 소박하고 유순한 일상에 경이를 품고 안착한다.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인 ‘홀’과‘황’처럼, 노자의 음성은 황홀하다.
2018년에 타계한 SF의 거장 어슐러 르 귄은 도덕경을 영문으로 번역할 정도로 노장 사상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 문명을 통찰하고 우주와 미지의 존재들, 미래를 상상했던 그에게 노장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들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도덕경을 읽다보면 그의 확장된 상상력의 본령이 많은 부분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현실을 극복하려면 이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틀을 의심하고 확장해가야 한다. 그 단초들이 도덕경에는 무궁하다.
고도로 발달한 소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기 착취형 소비자를 원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한 ‘자기 계발’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자본의 욕망과 스스로의 욕망이 착종된 속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그라운드 위의 모든 사람을 소진시킨다. 그라운드 자체가 자본과 욕망의 멈출 줄 모르는 회전판 위에서 돌기 때문이다. 자기를 “계발”하기에 앞서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고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노자 도덕경>은 유위의 자기 계발이 지닌 기만성을 폭로하는 무위의 수행서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노자는 오래전에 인간성을 간파했고, 문제들을 진단, 예견했으며, 해결 방안을 처방했다. 도덕경이 고전 중의 고전인 이유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철리와 인간에 관한근원적인 통찰 때문이다. 그만큼 도덕경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이 책 전체에 미묘한 에너지의 파장으로 가득하다. 현대가 앓고 있는 탐욕과 소비, 속도와 경쟁, 자폐와 나르시시즘의 신경증과 증상들. 이것들을 말끔하게 씻어줄 문장의 폭포수는 맑고 장쾌하다. 부드럽고 소박하다. 청량한 물방울로 정신과 생활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은 개운하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도덕경을 읽는 내내 심신의 창이 활짝 열리고, 그 창으로 대숲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듯 청량하다. 욕심을 줄인다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더께로 앉은 욕구와 필요의 객진은 심신의 순환을 무겁게 지체시킨다. 순환은 생명의 기본이다. 진득한 욕망의 불순물로 심신과 생활의 활활한 순환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노자는 도와 덕의 순환이 심신과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일갈한다.
<노자도덕경>은 크게 <도경>과 <덕경>으로 주제를 나눌 수 있다. <도>편에서는 도의 심원함을, <덕>경은 그 도가 현실에 적용된 상태를 각각 설명한다. <노자도덕경>은 우주론, 인식론, 가치론이자 수행론, 처세론, 정치론이다. 세계의 본질, 인식 방법에 대한 각성, 가치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논하고, 그 모든 것이 실제 세계에서 발현되는 양상을 촘촘하게 드러내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책의 말미에는 방대한 사유의 체계인 본서를 읽는 방법이 친절하게 소개된다. 주제들을 정리한 표를 보면 이 고전이 말하려는 맥락을 한눈에 가늠해 볼 있다. 노자 사유의 기본 골격을 머릿속에 그리며 책을 읽으면 그 난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큰 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노자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배려한 이용주 선생의 자상함이 느껴진다.
일단, 재밌다. 정신을 쏙 빼놓는 SF 소설이나 감동을 주는 시처럼 문장이 유려하고 흥미진진하다. 문장들을 곱씹을수록 읽는 맛이 더해진다. 노자의 광활한 사유와 시적인 문장에 녹아들어 읽게 된다. 유머러스하다. 기발한 표현에 자주 웃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자 사상의 광맥이라 할 ‘도’는 미묘한 만큼 울림이 크다.
이용주 선생의 꼼꼼한 주석은 압권이다. 노자의 문장들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진단과 지혜로 가득한지 보여주는 설명들은 예리하고, 시의적절해서 역시 빠져 읽게 된다. 이렇게 난해하고 밀도 높은 글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힌다는 것은 이용주 선생님의 글쓰기의 힘이리라. 세심하고 깊이 있다. 양서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병 주고 약 주는 자본과 시장의 ‘치유’와 ‘힐링’에 지지 말자.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한’ 앎이고 이 앎은 노자가 2500년 전에 간파했듯이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뛰어넘는 전복적인 ‘무지’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선입견, 나아가 세상의 편견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성인은 언어, 관념의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36)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15)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14)
“이름은 ‘본질’이나 대상의 ‘실재’가 아니다. - 중략 - 이름은 실재 및 본질을 무시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임시 수단에 불과하다.” (19)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세상을 관념화, 추상화한다. 그런 관념화,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우리 방식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판단하고 이용한다. 그 결과 인간은 철저하게 언어(로고스)적 방식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언어(로고스)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단순히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22)
언어는 존재의 ‘안전한’ 집이자 감옥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분별의 세계가 망상임을 최근 몇 년 혹독하게 몸으로 체득했다. 기후 위기와 팬대믹의 시대에 비인간 존재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자는 인간이 언어(로고스)적 존재로서 세계를 경계와 구획으로 나누는 것을 경고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오래전에 당도해 있었다. 무위(함이 없이 하는 것)와 무지(분별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앎), 무욕, 부쟁, 그침과 멈춤, 비움, 검소, 자애, 포용, 평화. 노자의 지혜는 시간이 갈수록 새롭다. 산적한 인류의 과제는 오래된 미래, 노자의 도와 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