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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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지금, 여기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 주해한 이용주 선생의 번역이 유려하다. 도나 덕이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오해받기 쉬운데 언어에 관한 근본적인 사유, 소비자본주의에서 욕망하는 개인들, 이익 단체화되는 정치 현실을 도덕경을 통해 보다 선명히 인식할 수 있다. 고전과 역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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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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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최상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오직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안다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병이 없는 이유는

자신의 병이 병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이 없다. (71장, 589)


최근 출간된 <노자 도덕경>(이용주,이학사,2024)의 71장이다. 매 시간 복잡한 이슈를 쏟아 붓는 각종 매체는 지식과 정보가 동시대인이 장착해야할 필수 덕목임을 각인시킨다. 하루 영양제를 챙기 듯 정보를 복용하는 현대인은 분사되는 ‘앎’과 ‘의견’을 의심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무지하지 않고, 현대인은 ‘안다.’


이 확신을 노자(B.C. 6세기)는 무색하게 한다. 무지에 대한 무지. 이 이중의 무지가 우리가 앓고 있는 심각한 질병임을 <노자도덕경> 81개 잠언들은 일깨운다.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병, 모르면서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병, 조금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는 병, 노자는 보통 사람들이 앓는 다양한 ‘지식의 병’에 대해 말한다.”(590)


이용주 선생의 <노자 도덕경>은 주석은 정밀하고 해제는 풍부하다. 이용주 선생이 주해한 <노자 도덕경>은 위에 언급한 ‘지식의 병’을 포함해 현대와 현대인이 앓고 있는 사회적 질병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물질도, 사고도, 관계도 적정, 적당, 적절의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과잉과 치우침, 넘침과 질주, 파벌과 뒤집기가 현대의 질병이다. 하지만 현대라고 별난 시기가 아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가 전면에 드러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한 이 근본적인 무지는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것은 ‘도’에 관한 무지이다. ‘덕’에 관한 무지이다. 도와 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도는 근원적 실재이며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자, 생명의 근원이다(678), 덕은 도가 인간 혹은 세상사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된 것이다(678)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어둠에 이어지는 또 다른 어둠

그것이 존재의 신비로 들어가는 문이다. (1장, 14)


도는 비어있지만

아무리 해도 가득 채울 수 없다. (4장, 48)


도라는 것은 황홀할 정도로 눈이 부시고 빠르다.

눈이 부시고 빠르지만 그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 (21장, 192)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 (43장, 374)

없는 듯 보이는 것이 틈이 없는 것 사이로 들어간다 (43장, 374)”


도는 언어화할 수 없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생성시키고, 변화시키고, 관장한다. 도는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고 듣는 만지며 사는 이 세계 자체가 도 그 자체이다. 각각의 사물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에 익숙한 현대인인 나에게 도에 관한 묘사들은 나를 점점 더 안개 속으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 안개는 앞을 가리는 안개가 아니라, 그 흐림 사이로 이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계가 미묘하게 보여 지는 새로움을 품은 안개이다. 인식의 경계를 저 멀리 둥글게 밀고 가는 에너지가 있는 안개이다.


도는 분별 너머의 상태이자 작용이기에 언어로 포착할 수 없지만, 노자는 도를 사람들에게 닿게 하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더해 오독과 오해가 예견된 언어를 부득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한계’를 품은 언어들이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운지. 진리는 시로써만 표현될 수 없는 것인가. 각장이 시이자, 노래이다. 지혜의 서사시다. 인식의 지평이 일상을 뛰어넘어 저 먼 광활한 곳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결국 도는 소박하고 유순한 일상에 경이를 품고 안착한다. 노자가 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언어인 ‘홀’과‘황’처럼, 노자의 음성은 황홀하다.


2018년에 타계한 SF의 거장 어슐러 르 귄은 도덕경을 영문으로 번역할 정도로 노장 사상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간 문명을 통찰하고 우주와 미지의 존재들, 미래를 상상했던 그에게 노장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들을 새롭게 해석하는데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도덕경을 읽다보면 그의 확장된 상상력의 본령이 많은 부분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현실을 극복하려면 이 현실을 지배하는 인식의 틀을 의심하고 확장해가야 한다. 그 단초들이 도덕경에는 무궁하다.


고도로 발달한 소비 자본주의 시스템은 자기 착취형 소비자를 원한다. 그에 부응하기 위한 ‘자기 계발’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자본의 욕망과 스스로의 욕망이 착종된 속에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그라운드 위의 모든 사람을 소진시킨다. 그라운드 자체가 자본과 욕망의 멈출 줄 모르는 회전판 위에서 돌기 때문이다. 자기를 “계발”하기에 앞서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고 자기를 “수행”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노자 도덕경>은 유위의 자기 계발이 지닌 기만성을 폭로하는 무위의 수행서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현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노자는 오래전에 인간성을 간파했고, 문제들을 진단, 예견했으며, 해결 방안을 처방했다. 도덕경이 고전 중의 고전인 이유는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철리와 인간에 관한근원적인 통찰 때문이다. 그만큼 도덕경은 현실적이며 실용적이다. 개인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힘이 책 전체에 미묘한 에너지의 파장으로 가득하다. 현대가 앓고 있는 탐욕과 소비, 속도와 경쟁, 자폐와 나르시시즘의 신경증과 증상들. 이것들을 말끔하게 씻어줄 문장의 폭포수는 맑고 장쾌하다. 부드럽고 소박하다. 청량한 물방울로 정신과 생활이 말끔히 씻겨나가는 기분은 개운하다.



하루 중 가장 고요한 시간, 도덕경을 읽는 내내 심신의 창이 활짝 열리고, 그 창으로 대숲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듯 청량하다. 욕심을 줄인다고 다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더께로 앉은 욕구와 필요의 객진은 심신의 순환을 무겁게 지체시킨다. 순환은 생명의 기본이다. 진득한 욕망의 불순물로 심신과 생활의 활활한 순환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노자는 도와 덕의 순환이 심신과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일갈한다.


<노자도덕경>은 크게 <도경>과 <덕경>으로 주제를 나눌 수 있다. <도>편에서는 도의 심원함을, <덕>경은 그 도가 현실에 적용된 상태를 각각 설명한다. <노자도덕경>은 우주론, 인식론, 가치론이자 수행론, 처세론, 정치론이다. 세계의 본질, 인식 방법에 대한 각성, 가치에 대한 전복적 사고를 논하고, 그 모든 것이 실제 세계에서 발현되는 양상을 촘촘하게 드러내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책의 말미에는 방대한 사유의 체계인 본서를 읽는 방법이 친절하게 소개된다. 주제들을 정리한 표를 보면 이 고전이 말하려는 맥락을 한눈에 가늠해 볼 있다. 노자 사유의 기본 골격을 머릿속에 그리며 책을 읽으면 그 난해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큰 맥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노자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배려한 이용주 선생의 자상함이 느껴진다.


일단, 재밌다. 정신을 쏙 빼놓는 SF 소설이나 감동을 주는 시처럼 문장이 유려하고 흥미진진하다. 문장들을 곱씹을수록 읽는 맛이 더해진다. 노자의 광활한 사유와 시적인 문장에 녹아들어 읽게 된다. 유머러스하다. 기발한 표현에 자주 웃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자 사상의 광맥이라 할 ‘도’는 미묘한 만큼 울림이 크다.


이용주 선생의 꼼꼼한 주석은 압권이다. 노자의 문장들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진단과 지혜로 가득한지 보여주는 설명들은 예리하고, 시의적절해서 역시 빠져 읽게 된다. 이렇게 난해하고 밀도 높은 글이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읽힌다는 것은 이용주 선생님의 글쓰기의 힘이리라. 세심하고 깊이 있다. 양서를 만나는 것은 축복이다.


병 주고 약 주는 자본과 시장의 ‘치유’와 ‘힐링’에 지지 말자.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한’ 앎이고 이 앎은 노자가 2500년 전에 간파했듯이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뛰어넘는 전복적인 ‘무지’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자신의 선입견, 나아가 세상의 편견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성인은 언어, 관념의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36)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15)


“도는 도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14)


“이름은 ‘본질’이나 대상의 ‘실재’가 아니다. - 중략 - 이름은 실재 및 본질을 무시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임시 수단에 불과하다.” (19)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세상을 관념화, 추상화한다. 그런 관념화, 추상화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우리 방식으로 알았다고 생각하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판단하고 이용한다. 그 결과 인간은 철저하게 언어(로고스)적 방식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그 안에서 언어(로고스)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을 단순히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을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22)


언어는 존재의 ‘안전한’ 집이자 감옥이다. 우리는 인간 중심적인 분별의 세계가 망상임을 최근 몇 년 혹독하게 몸으로 체득했다. 기후 위기와 팬대믹의 시대에 비인간 존재들과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노자는 인간이 언어(로고스)적 존재로서 세계를 경계와 구획으로 나누는 것을 경고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는 오래전에 당도해 있었다. 무위(함이 없이 하는 것)와 무지(분별적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앎), 무욕, 부쟁, 그침과 멈춤, 비움, 검소, 자애, 포용, 평화. 노자의 지혜는 시간이 갈수록 새롭다. 산적한 인류의 과제는 오래된 미래, 노자의 도와 덕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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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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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예정된 죽음의 선고,

자타를 투명하게 단련시키는 고통의 연속,

침상을 바라보는 이의 한없는 무기력.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딸의 간병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어머니 프랑스와즈 드 보부아르,

딸 시몬 드 보부아르.



실존주의 철학자,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소설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딸.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침상 옆에서

비범한 지성을 가진 딸의 눈에

어머니의 삶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삶의 마디마다 느꼈을

혼란과 분열을 딸은 기억한다.



욕망하는 개인과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역할의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과 언어적 습성들을 딸은 이제야 독해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어머니는 갖지 못했던 언어로

아내, 어머니라는 역할 뒤에 삭제됐던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재현한다.

여성해방선구자로서 어머니를 한 ‘여자’로,

소설가로서 어머니의 ‘삶의 내적 풍경’을,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복기하고 기록한다.

통제와 회피, 불화와 갈등,

애증과 침묵으로 긴장된 평행선을 그었던 모녀는

죽음이 벗겨낸 상처와 아집의 자리에

여실하게 드러난 인간의 취약성 앞에서

서로의 삶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네가 보이는구나!’

어머니는 딸에게 임종을 앞두고

여러 날 반복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의 눈 속에

비친 딸 보부아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억과 이야기는 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머니 프랑수와즈 드 보부아르’의 삶과

‘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삶은 만난다.

네가 ‘보이기’ 시작하고 (어머니),

엄마의 내면에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성이 살아있음이 ‘보인다’. (보부아르)



죽음이라는 사건이 불러오는 두려움과

번번이 배신당하는 기대, 후회와 자책,

기억과 회한. 그리고 절대적 고독,

이해 불가능의 선으로 넘어가 버린

사건 앞의 절대적 경악.

전면에 드러나는 취약성. 분노.

수용 혹은 평화로운 체념.

죽음은 폭력적인 사건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정의된다.

여기서 죽음은 임종 직전의

진행형으로서의 죽음이자 완료된 죽음이다.


삶을 향한 본인의 의지에 반한

절대적인 추방. 극도의 취약성.

타인의 의지와 의도에 좌우되는 사물화 된 몸.

지극한 순응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부조리한 주문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시기만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배달되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불평등하고

죽음을 둘러싼 선택들은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다.

이 소설에도 현대 의료 시스템의

여러 가지 그늘들이 인물 속 대화로 표현된다.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

당사자, 주변인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국을 설명하기 힘들다.

감정의 파고는 너무 가파라 설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서로를 다독여 줄 여유조차 없다.



추측과 짐작 속에 각자의 마음의 파문은

애써 감추고,

이제는 새로운 일상이 된,

하지만 전혀 낯선 일상을 이어간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회오리들은

고통에 지친 체념과 편안한 휴식에 대한

고요한 갈망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잠잠해진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인간을 벌거벗긴다.


겉치장을 벗어던진 인간들만이

나눌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비애와 연민.

연민은 상대에게 스며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말 없는 약속처럼,

꽃다발이나 화관 없는 장례도 외롭지 않은 이유다.

화려한 장례는 당사자들이 공유하는

존엄한 침묵의 인사를

어쩌면 모욕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제가 언제 주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 간병, 상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보부아르의 문장들은 내면에 상주하는

죽음을 둘러싼 무거운 실루엣에

보다 선명한 윤관을 그려준다.

짓눌리고 뒤엉킨 감정들이

올올히 풀려 설명 가능한 것들이 된다.

감정들을 조금씩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슬픔,

자책과 후회, 더 무거운 죄의식과 회한,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인 무기력.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 감정들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비애의 무게로

늘 질식 상태다. 그래서 정작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책 ‘아주 편안한 죽음’은 말을 걸어온다.

죽음과 관련해 우리 안에서

시끄럽게 침묵하고 있는 말들이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임을 납득시킨다.


보부아르가 먼저 말을 조용히 전해준다.

독자라는 위치는 어떤 반응이나 대답을

즉각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얼마나 지혜로운 위로이자 연대인가.

작가란 존재에 대해, 소설이란 창작물에 대해

새삼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까다롭지 않은 문장들의 글이

어쩌면 이리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지.

각 장, 각 문단, 각 문장들이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정서적 묘사의 과잉 없는 절제된 문장들은

상황과 심리들을 정확히 전달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자,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그는 ‘소설가!’였다.

형식과 의미의 낭비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

보부아르의 성정까지 짐작하게 된다. 멋지다.

이 책은 20년 전에 읽은 소설들부터

최근 국내 출간 저서들까지

보부아르의 글들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성의 삶

가정 ‘내’에서 버려지는 아내,

결혼 관계 '안‘에서 폐기되는 혼인 서약.

가정 안에서 소거되었지만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에 갇혀 가정 안에

머물러야 하는 기혼 여성의 삶,

이 여성이 살고 있는 삶의 모순에 무지한

이들에게 비틀린 신경증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삶. 

폐기된 약속들과 함께 여전히 한 공간에서

남편과 머무르며 욕망을 억누르고

좌절된 욕망들을 딸들에게 투사하고,

여러 방어적인 모습으로 혼란스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여성의 삶.

어머니와 딸의 복잡한 심리적 역사,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인 삶과 죽음까지.



반복하지만,

늦기 전에 많은 이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번에 여성과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새롭게 리커버 에디션으로

나온 책의 만듦새가 단아하다.

표지의 그림은 오래된 구리거울의 거친 질감,

옥색 가락지의 여린 단단함.

조개껍질의 찬란한 반짝임을 연상시킨다.

홍지희 작가의 원화는

침묵 속에 아우성치는 여성들의 내면이

시간 속에 응결된 것처럼 처연하게 아름답다.



푸른빛이 고색창연하면서도 화사함이 현대적이다.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은

기억과 과거, 그리고 망자들과의 연대를 약속한다.

누드 제본으로 만들어진 책등도 고전적이다.

표지의 주색인 미색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

책등의 단정함이 더없이 조화롭다.

현대의 고전이라 불릴 만한 이 책의

가치에 답하는 디자인이다.



사철 제본으로 어디를 펴도 평평하게

펼쳐지는 읽기의 편안함이라니.

보기에도 예쁘고, 문진이 필요 없어 읽기도

편해 이런 제본 방식이 뭔가하고

제본 방법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책 제작의 실무적 조건들이 있겠지만,

많은 책들이 사철 제본 방식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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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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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선물로 누군가에게 봄의 전령사가 되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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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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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절기는 얼마나 절묘한 것인지

열흘이 지나도록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깊은 협곡에 사는 친구는

자두 나무에 봄 기운이 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그만이 감지할 수 대기의 귀띔일 것이다.

내게는 자두 나무 대신

시집이 봄 기운을 가득 안고 도착했으니

아티초크 출판사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에밀리 디킨슨의 식물 표본집에서

가져온 압화로 찍힌 꽃들로 디자인된

표지가 봄의 전령사인 듯

오는 봄을 고요히 마중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참으로 신묘해서

시집에 담긴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말개진다.

가문 겨울을 보낸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도

용케 물이 돌듯

꽃과 나무를 노래한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석버석한 내 마음자리에도

맑은 물이 찰랑이며 고인다.

김승희, 에밀리 디킨슨, 로르카, 페소아, 미스트랄 가브리엘라,

캐서린 맨스필드, 윌리엄 블레이크, 셰익스피어, 에머슨, 워즈워스,

윤동주, 이상, 이육사, 테니슨, 한용운, 휘트먼...

국내외의 시인들이 꽃과 나무에 어떻게 자신들의 마음을 투영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시인들에게 어떤 우정어린 말들을 걸어왔는지

꽃과 나무들과 나눈 시인들의 대화가 더없이 다채롭게 이어진다.

시집의 타이틀이 된

'모든 슬픔은 사라진다'는

김승희 시인이 노래한

'미선나무에게'라는

시의 주인공인 미선나무의 꽃말이다.

( '꽃말'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으로 의미를 붙인 말,

사람들은 예쁜 생각을 잘도 해낸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꽃말이 있는 꽃이라니.

이렇게 처연한 꽃말을 지닌 꽃이

우리 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의 특산종이라니.

여리디 여린 꽃잎을 가진 미선나무도,

꽃말도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된다.

역설적인 꽃말이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3월에 가느다란 줄기에 아름다운 부채 모양의

미색 꽃잎을 수북히 여는 꽃.

3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여리디여린 미선나무 꽃의 만발을 보며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감상을 떠올린

모르는 이의 모습을 나또한 떠올려 본다.

계절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꽃잎을 터뜨리는 미선 나무를 보며,

그 모르는 이는 어쩌면 모든 떠나간 이, 떠나간 것, 떠나간 시간들을

떠올렸을지도.

계절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꽃과는 다르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며,

그는 어쩌면 '모든 슬픔이 찾아온다'라고 생각했을지도.

그 잔인함 진실에 압도당해,

차라리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고 노래했을지도.

이어지는 봄꽃들의 끝도 없는 행렬에

'어제의 비가 오늘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내일의 비가 어제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세계의 슬픔이 또다른 슬픔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발견해내는 김승희 시인의 마음이 

나에게도 포개진다. 

김승희 시인이 말한

'당신에게 못한 1인분의 사랑의 말',

그 당신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당신들을 호명해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들을

우리는 이제 볼 수 없는 그들에게

뒤늦게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서 그가 연결해준 누군가에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미선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

산벚나무, 앵두나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철쭉..

수북한 개화의 행렬에

우리는 떠나간 이들을 맞이한다.

매일 매일 떠나고 떠나지만,

매일 매일 다시 돌아오는 그들을 맞이한다.

1일분의 사랑 고백과 함께.

봄에는 모든 슬픔이 살아난다.

봄꽃의 개화처럼 막을 수 없는 이 슬픔을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로

표현할 수 밖에 아득한 아픔들.

봄이나 아직 겨울의 묵직한 이부자리를

털어내지 못해 못내 무겁고 못내 사나운

2월, 3월의 스산함을

이 시집의 시인들과 시들이 함께 할 생각을 하니

마음에 노오란 아지랑이 같은 따스함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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