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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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라는 시간대는 묘한 향수를 불러온다. 고도로 치밀하게 뒤얽힌 정치경제 시스템에 깎이고 갈리기 전 인간 본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오래된 거울.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튕겨져 나오기 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깊은 우물. 현대가 앓는 정신적 질곡의 적지 않은 부분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를 간직한 무의식의 시원.

퀴어는 또 어떤가. 퀴어는 젠더의 경계를 묻고, 경계를 지우고, 그것을 넘고 교란시키는 물음이자 실천이다. 그런 만큼 퀴어는 관습적 젠더 규정이나 규범으로부터 달아나며 정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재정의 해볼 것을 재차 요구한다. 퀴어는 인간 안에 있는 성적 지향의 다채로운 틈을 벌려 활짝 개화시킨다.

아일랜드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 숀 휴잇은 고대와 퀴어라는 이 매혹적인 세계를 로맨스라는 주제로 엮어 하나의 작품집을 완성했다. 이 책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가 그 결과물이다. 고대와 퀴어와 로맨스라니.

기다리던 그 책이 아닌가. 여러 장르의 예술을 통해 산발적으로, 늘 아쉽게 접했던 고대 퀴어 로맨스를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나다니. 반가울 수밖에.

“모든 퀴어에게는 동일한 과거가 있고, 모두가 그 과거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 숀 휴잇의 문장이다. 울림이 크다. 작가는 고대 세계의 퀴어 이야기를 읽고 세계 속에 자신의 자리와 소속감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생득권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계시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첨언한다. 그런 만큼 작가는 고대의 이야기가 온전히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원했다. 그래서 숀은 결심한다. “고대인의 눈부신 퀴어 에너지를 이미지와 이야기에 담아” 독자들에게 건네겠다고.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숀의 바람처럼 모든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완성됐다. 영국의 주목받는 현대 화가 루크 에드워드 홀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받은 영감을 붓 끝에 옮겨 책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선명한 핑크 배경에 초록색 화관을 쓰고, 정면을 응시하는 청년을 그린 표지를 보라. 청춘과 사랑이 달콤하게 밀려온다. 화가의 드로잉은 자유 분방하고 색채는 순수하다. 모던하고 경쾌한 루크의 그림은 퀴어 로맨스에 부당하게 드리운 무겁고 어두운 구름들을 말끔히 걷어낸다. 고전과 현대 예술의 발칙한 만남이 창조해낸 이렇게 퀴어한 책이라니. 독자는 두 배로 즐겁다.

책은 선별된 고전에 대한 정보, 문학적 비평, 작가의 감상, 작품의 역사적, 현재적 가치를 작가의 안목으로 살펴보고, 작품의 원전을 읽도록 구성됐다. 이 책을 안심하고 즐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균형 잡힌 관점 덕분이다. 이 고전들이 자기 존재의 기원을 일깨웠다고 고백했다고, 숀이 지난 시대를 무조건 찬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고대 지중해 세계를 낭만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는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신분제, 젠더 불평등, 여성 혐오, 이 외에도 “현대의 진보적 사고”에 동화되지 않는 자유의 장애물들을 작가는 비평가로서 놓치지 않는다.

“고대 세계는 완벽한 거울도 아니고 단순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거울도 아니다.” 작가는 관점을 분명히 한다. 고전을 해석하고 그 영광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재창조할 책임은 후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상화된 사회의 불완전함과 다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열렬한 노래를 한껏 즐기라고 독자에게 권한다. 이처럼 작가는 현대인의 비평적 거리도, 풍요로운 감상 권리도 놓치지 않는다.

숀 선장이 운항하는 황금배를 타고 고대로의 물결을 따라가 보니, 일단,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고대 작가들의 문장들은 어쩌면 이리도 풍요롭고 다채로운지. 작가들의 시적인 묘사에 루크의 그림까지 더해지니, 책 안에 고대 지중해의 자연이 환한 빛처럼 펼쳐진다.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수풀, 주렁주렁한 과일, 철썩이는 파도, 은은한 달, 호박색 밀밭. 여기에 더해지는 또 하나의 자연, 언제 어디에서든 감지되는 인간들의 성적인 기류. 대기 속을 윙윙대며 교차하는 퀴어한 전파들.

본격적으로 이 책에 담긴 인간의 이야기는 지중해의 풍광처럼 더없이 풍요롭다. 초원 목동의 순수한 짝사랑에서부터 네로의 광기어린 폐륜까지. 운문과 산문을 넘나들며 다종한 이야기가 전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달콤함에 노곤하다, 쓸쓸함에 뒤척이고, 쾌락에 달아올랐다, 능청스러움에 킥킥대고, 분노로 타오르다, 적나라함에 움찔하고, 잔인함에 몸서리치다, 운명에 넘어진다. 그야말로 희로애락, 오욕칠정, 그 사이사이의 감정들까지 인간 감정의 마디마디를 살뜰하게 추체험한다. 새삼 이래서 고전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유구한 사랑의 기원을 밝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퀴어한 매력을 이미 알아봤던 키케로의 연설, 사포의 로맨틱한 시들, 헤라클레스의 숱한 사랑과 복수, 라틴어 금석문에 적힌 비가들, 남성 창부의 신세한탄, 티불루스의 고대판 연애 매뉴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들,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향연 속 사랑에 관한 담론, 젠더를 희롱하는 시인들의 시... 신전과 거리, 천상과 지하, 성과 속을 분주히 오가는 이 책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숀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기록한 퀴어와 관련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검열 없이 풍요롭게 이 책에 담았다. 덕분에 독자는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의 축제에 참여하게 된다. 그 중 최고의 아름다움은 단연 시와 신화 속에서 불꽃처럼 터져 나오는 에로스의 향연이다. 섹스와 젠더를 뛰어넘어 주고받는 정신과 육체의 교감은 더없이 시적인 언어들로 화려하게 만개한다. 이에 못지않게 퀴어의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쓰여진 산문들은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고대인들의 능수능란하고 능청스러운 입담과 필력에 허를 찔린다. 그들은 살아있다. 고대인들의 풍자와 해학을 현대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 굉장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가슴 한구석에서 해동의 샘물이 퐁퐁하고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숀의 비평은 해박함과 균형감, 유머와 재치, 유려한 문장으로 빛을 발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다른 대륙들의 고대 퀴어 이야기들도 궁금해진다. 이 책이 뽑아 올린 퀴어 서사의 황금줄이 이렇게 나를 더 넓은 고대 퀴어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퀴어 우주의 무한한 별자리 안에 큐빅처럼 박힌 책. 인간이라는 우주에 찬란하게 빛나는 퀴어의 웃음과 눈물이 책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는 언제 우리 눈에 드리운 안개를 걷고 이 광활한 우주 속 별들을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을까.

초콜릿과 어울리는 로맨틱한 선물로도 제격인 이 사랑스러운 책은 지금 여기에 던지는 질문 또한 넓고도 깊다. 이성애 중심의 사회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범화된다. 이는 정체성의 서열화로 이어지고 이성애 밖의 성적 지향과 성애의 실천은 극단적으로는 질병화, 범죄화 되기까지 한다. 작가는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사랑을 상상하는가? 누구에게 욕망을 부여하는가?” 상상과 욕망의 영역마저 관습과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다.

이 고전이 증명하듯 법과 제도는 당대 인식의 산물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이성애가 사회의 규범이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퀴어에 대한 혐오로 이득을 보는 자들은 누구인가?’ 숀은 이 책으로 “퀴어함의 원형 신화와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힌다. 우리는 섹스와 젠더, 섹슈얼리티의 이분법 세계를 탈출해야 한다. 그 열린 문으로 항해하는 황금배를 타시라. 이 책에 승선해 보시라. “뻔뻔할 만큼 당당하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다. 누구보다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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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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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밀하고 앙큼한 카룰루스의 시 48은 러브레터의 정석이라 할 만하다. 이 편지를 읽고, 내가 이 시인에게 빠져버렸다. 하지만 반전. 다음에 이어진 시 16은 같은 카룰루스가 맞나 싶게, 질투와 분노에 활활 타올라 표정과 어조가 돌변한다. 그는 “수천 번의 키스”와 “달콤한 입술”을 노래하면 남자답지 못한 것인가? 라고 반문하며 이글거린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의 표현들을 꼭 읽어들 보시라. 나는 이 시인에게 더 빠져버렸다.

시인 카룰루스가 남성성을 되묻는다면, 시인 마르티알라스는 여성성을 전복한다. 마르티알라스가 묘사하는 앤드러자인(양성애자) 여성 필라이니스는 성적 쾌감을 추구하는데 거침이 없다. 거침없음을 표현하는 시인의 언어 또한 거침없다. 노골적이고 아찔하다. 이렇게 솔직한 성적 지향과 성애 표현이라니. 젠더의 허구성을 비트는 두 남녀(?) 시인의 시들은 이성애 중심의 섹슈얼리티에 균열을 일으킨다.

플라톤의 <향연>과 크세노폰의 <향연>은 모두 신성한 사랑과 범속한 사랑을 구별해 논한다. 이 때 사랑의 주체는 남성들이며, 신성한 사랑은 영혼의 사랑이며, 범속한 사랑은 육체적 사랑이다. 남성들 간의 사랑이지만 구성은 성인 남성과 소년이다. 잘 알려진 역사지만, 연설문을 직접 다시 읽으니,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남성 동성애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았는지, 여성 혐오가 얼마나 만연했는지,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가늠이 된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남성 동성애가 전쟁과 정치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어떤 정동으로 강력하게 작동했는지 보여준다. <모랄리아>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전쟁에서 전사들을 움직이는 힘으로써 에로스를 주장하는데, 실제로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와 <일리아스>의 호메로스는 각자 써낸 이야기와 인물들을 통해 전사들의 능력과 에로스가 어떻게 호응해 전투를 이끌었는지 상세히 묘사한다. 이 작가들 외에도 이 책의 다른 많은 작가들이 그리스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퀴어한 에너지의 흐름을 드러낸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는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인식되었던 걸 증명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의 공고한 이성애 중심 사회가 자리 잡게 된 맥락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산업화, 계급, 사유재산,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의 핵가족, 여성과 자녀 통제, 소수자 억압, 그리고 이 거대한 체계를 떠받들며 기생하는 종교. 모두 연결된다.

역사를 보면 현재의 규범적 이성애 중심 사회 또한 하나의 현상이다. 다행히 이 현상 또한 끝이 보이는 것 같다. 법과 제도, 종교. 온갖 차별과 혐오로 찍어 누르기에는 계급 사회와 가부장제, 그리고 종교의 밑바닥이 너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정치 세력이 미래를 선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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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 - 고전 속 퀴어 로맨스
숀 휴잇 지음, 루크 에드워드 홀 그림, 김하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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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페이지를 펼치고 나는 오랫동안 머물렀고 행복했다. 풀빛 봄기운으로 충만한 초원, 잘생긴 보랏빛 말 등에 앉은 남자의 육체. 그 또한 풀빛이다. 그들 아래로는 푸른 개울물이 유유히 흐른다. 이 책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의 그림을 그린 루크 에드워드 홀의 그림 속 인간들은 스스럼없이 자연이다.

이 세상이 봄으로 접어들며 꽃으로 타오를 때

에로스도 때맞춰 깨어난다.

(중략)

소년이여 너는 말과 같구나.

이미 씨앗을 물리도록 삼키고서

솜씨 좋은 기수와 탁 트인 초원, 수정처럼 맑은 개울,

그늘진 숲을 찾아 나의 마구간으로 돌아왔구나.

이 책의 작가 숀 휴잇이 처음으로 인용한 시는 테오그니스의 <애가>이다. 봄과 에로스, 봄기운에 깨어나는 초원과 개울물, 숲, 그리고 나에게로 돌아오는 소년. 시인도 역시 인간이 자연임을 표현한다. 서로에게 스며든 시와 그림이 마음을 더없이 평온하게 해준다.


고대와 퀴어. 나를 늘 매혹하는 두 단어로 이 책은 나를 잃어버린 세계로 초대한다. 루크 에드워드 홀의 말마따나 “신화는 일종의 통로가 되어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그 다른 세상이란 이미 있었고, 지금도 현존하는 봉인된 세계 일 뿐이다. 이 책 <키스를 멈추지 않을 거야>는 그 봉인을 풀어헤친다. 고대 지중해의 숲과 절벽, 강과 바다에서 사랑하고, 질투하고, 상심했던 퀴어들의 생생한 신화는 현실 퀴어의 풍요로운 삶을 강렬하게 비춰주는 태양이 된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플라톤, 호메로스, 플루타르코스,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사포, 키케로... 우선 눈에 들어오는 작가 목록이 화려하다. 여기에 카룰루스, 테오그니스, 마르티알리스... 낯선 이름들이 이어진다. 먼저 미지의 작가들 시 몇 편을 읽어보니, 너무 좋다. 아름답고, 대범하고, 여리고, 익살스럽기 그지없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마음에 향긋하고 따스한 소생의 강물을 흘려보내는 퀴어 로맨스의 시원에 느긋하게 발을 들여 놓는다. 단단한 껍질이 씻겨 내려간 내 발목도 지중해 퀴어 목동의 마음처럼 약동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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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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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성찰과 투쟁 전략을 가슴에 돋을새김 하는 로드의 글들은 년 초에 읽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한 전의를 북돋고,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사랑을 불어 넣어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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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
오드리 로드 지음, 박미선.이향미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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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운동 현장의 목소리는 늘 다층적이다. 광장에 모인 개인들의 정체성은 젠더, 계급, 지역, 인종, 장애유무, 나이 등으로 복잡하게 교차된다. 긴급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공론장에서 우리는 여전히 듣는다. “그 말을 지금 꼭 해야겠어?”, “나중에!” 누군가의 절박한 요구는 사태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르는 한심함으로 야유된다. 광장에서마저 어떤 존재들은 지워진다. (하지만 누구도 지워지지 않는다, 지우는 자의 무지와 무능만 드러낼 뿐이다.) 언제쯤 우리는 차이를 우열화하고 이를 제도화하기까지 하는 무능한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을까.


흑인 퀴어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는 특정 정체성들을 압제하는 이러한 현실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는 삭제된 존재들의 권리와 요구를 정치의 영역으로 들여오고 이들을 정치적 존재로 인식시킨 사상가이자 활동가이다. 오드리 로드의 신간 <나는 당신의 자매입니다>는 복수의 소수자성을 가진 이들을 위한 성찰과 실천을 담은 연설문, 에세이, 서문, 서평 등을 담고 있다.



1월 우리 사회는 여전히 헌법이 유린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으며, 미국은 트럼프 2기가 시작되어 반인권적 행정 명령이 남발되고 있다. 역사의 시계가 50년 전으로 빠르게 되감기고 있다. 1970년대에서 90년대에 발표된 로드의 이 글들이 지금의 국내외 상황과 너무나 많은 부분 오버랩 되어,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하고 참담했다. 이렇게 변화는 더딘 것인가. 이렇게 세계가 퇴행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오드리 로드의 냉정한 현실 진단과 저항 전략은 번번이 냉소와 절망으로부터 나를 건져내 주었다.


“좋은 시인은 그녀 혹은 그가 자기 자신이라고 정의하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글을 쓴다.”p93 오드리 로드는 자기를 해방시킬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라고 말한다. 연초에 이렇게 속 시원한 문장을 만난 것에 감사한다. 로드는 나를 스스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외부가 나를 규정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 각자가 강해지려면, 자기 탐색의 과정은 필수라는 말이다. 로드에게 나란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로 형성되는 것이다. 언제나 과정 중에 나인 것이다. 이것을 알아차릴 때에야 비로소 타인들과의 차이 또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로드는 말한다. 타인과의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또렷한 자기 인식은 가장 선행되어야 할 저항과 창조의 시작인 셈이다.


차이에 대한 사유는 로드 페미니즘의 핵심이다. 로드는 차이가 변화의 창조적 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로드는 우선 차이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차이를 탐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차이는 누군가에게 권리를, 누군가에게는 권리 박탈을 가져다준다. 로드는 이렇게 차이를 위계화 하는 사회에서 차이에 반응하는 여러 사회화 방식을 분석한다. 차이가 분열의 심화로 이어지는 현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재화된 차이에 관한 신화적 규범들을 검토할 것을 주문한다. 차이를 스스로 정의할 권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의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는 차이를 성장의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긍정된 차이는 타자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닌, 타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고 로드는 이야기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문장은 유럽과 북미 중심 근현대화를 상징해 왔다. 이후 펼쳐진 세계 질서는 생각 즉 이성의 주체가 이성애 중심 백인 남성임을 여실하게 증명했다. 로드는 확고하게 뿌리 내린 이 기득권을 전복할 대항 선언을 한다.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자유롭다.” 그저 존재할 것인가? 자유롭게 존재할 것인가?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로드는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표현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소수자들의 감정은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폄하로 억압되어 왔는가. 은폐되고 억압된 감정이야말로 목격과 증언, 탈출과 해방의 가능성으로 풍요로운 바다다. 로드는 감정이 지닌 힘을 살려낸다. 고통과 분노에 침식될 것인가. 고통과 분노가 가리키는 방향을 직시하고 해방을 향해 그리로 나아갈 것인가. 로드는 고통을 두려워해서도 고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되며, 피해자에 머물러도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픔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소모적인 고통을 그는 경계한다. 통찰과 실천의 원료로써 감정을 활용하라는 로드의 문장들을 읽다보면 그 동안 묵혀두었던 내 감정들의 용처를 드디어 찾은 것 같아 홀가분해진다.


그렇다면 이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신의 필요를 살피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p105 로드는 우리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드러내는 무기로써 말하기,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경험과 통찰을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써 표현하기. 로드는 “의식의 심장부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면서”p118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라고 격려한다. 로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줄 적당한 시를 찾지 못했을 때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소수자들을 부단히 지우려는 사회를 향해서 존재를 드러내기. 이를 위한 말하기와 글쓰기는 무엇보다 강력한 저항 전술이다. “나는 진실을 직시할 때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사회적 저항과 연대의 단초는 진실을 드러내고, 기록하고, 아카이빙 하는 것이다.


로드는 구체적인 투쟁 중에도 “우리가 도래하길 바라는 형태와 취향과 철학을 갖춘 전망”을 언제나 기억해야 하며, 그 전망에 제한 또한 두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억압에 대한 저항이 내부 약자에 대한 또 다른 억압으로 이어지거나(흑인 사회 내부의 젠더 불평등, 동성애 혐오, 아동 학대 등) 기존의 구조 안에서 파이 나누기에 급급해 억압 구조를 재생산하는 잘못을( 흑인 사회 내부의 계급 불평등 등)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되고 싶은 인간, 우리가 소망하는 것들의 본성,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을 계속 탐구해가며 스스로 정의해 가야지만 저항이 치밀한 억압 구조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로드는 말한다.


“전 지구적 페미니즘의 진정한 본질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타자들과의 차이점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연결점을 찾아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생산, 관점, 활동을 아우르는 페미니즘 전망의 전 지구적 지평이 나아갈 길이라고 로드는 이 책 전반을 통해 이야기한다. 억압과 반동은 국제적으로 연결된다. 25년 1.19 서부지법 폭동은 21년 1.16 미국 의회 난입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트럼프가 공표한 젠더 정책(명백한 반인권적 범죄가 정책이라는 중립적 언어에 가려진다.)은 앞으로의 동성애 혐오와 연결 될 것이다. 12.3 내란은 다른 국가에서 극우의 모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 로드는 선언한다. 저항과 연대 또한 전 국가적으로 연결된다고. 이 책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책에 빼곡한 로드의 뜨겁고 생생한 성찰과 투쟁들이 시공간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 당도하지 않았는가. 두 달여간 누적된 분노와 피로로 마음에 냉소와 환멸이 스멀스멀 퍼질 기미라면, 이 책을 권한다. 예리한 성찰이 예리한 문장으로 흐릿해지는 정신에 저항의 언어들을 바짝 새겨준다. 지치지 말라고, 함께라면 갈 수 있다고.


“함께, 우리의 차이를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길 수 있고, 이길 것입니다. 투쟁은 계속됩니다.”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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