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그림 읽기 - 고요히 치열했던
이가은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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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관해 무지했던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유럽여행을 하던 시기였다. 20대 초반에 유럽배낭여행을 떠났고, 30대 중반에 신혼여행을 스페인으로 다녀오면서 미술관 투어는 필수였던 그때부터였으리라. 그림이 주는 감동은 막연했지만 궁금했다. 여전히 속시원히 풀지 못한 숙제같은 일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림이 전달하는 메세지에서 잔잔한 감동과 깨달음을 얻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책제목인 '사적인 그림 읽기'는 이중적인 의미였다는 것을 읽다보니 알게 되었다. 그림을 역사적(史的), 개인적(私的)으로 읽는 법을 친절하게 풀어주며,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따라 그림을 보며 글을 읽다보니 그림이 다각도로 이해가 되고, 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빛나는 명화인지 그 이유가 명확해졌다. 이런 종류의 책은 이번에 처음이라 산뜻하고 멋진 경험처럼 느껴졌다.




이 책의 저자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에 전공을 살리지 않고, 역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다. 저자는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지만, 현실은 위태로운 외줄타기에 가까웠다고 고백한다. 대학원에서 새롭게 역사학을 공부하며 학업과 진로 모두 힘들게 느껴지던 시기에 글을 쓰기 시작하며 삶의 균형감을 찾았고, 미술감상은 역사학과 연결되어 그에게 훌륭한 글감이 되었다. 저자는 미술, 역사, 개인의 사색이 얽힌 다소 독특한 구성의 글을 엮었고 이 책이 그 결과물이 되어 빛나고 있다.

그림을 역사적,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풀어냈을까 궁금증은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풀렸고, 이내 반하여 계속 다음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장루이 포랭의 [줄타기 곡예사]는 19세기 파리 야외 서커스의 한 장면이다. 고된 연습 끝에 무대에 올라도 그녀의 수고는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나의 노력은 나에게만 치열할 뿐, 세상을 바꾸지도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지도 않는다면, 그 고된 연습이 무슨 의미일까? 줄 위에 올라설 힘이 있을까? 그러나 그림속 여인은 그렇지 않다. 그녀의 온 신경은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는 타인의 인정과 환호 보다도 더 만족스러운 '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시끌벅적한 공연장에서 아주 고요히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더 높은 하늘에 닿는다면, 그 희열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작가 또한 그런 외줄타기와 같은 시간을 겪었음을 고백하며, 자기 선택에 충실한 삶, 자기만 아는 희열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에게 오로지 집중하는 순간들을 기꺼이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과 그 누구의 만족이 아닌 내 만족이 더 중요함을 되뇌이게 되었다. 고요하지만 치열한 나만의 삶속에서 나만의 보물을 만들어내며 행복하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1부 외롭지 않은 고독

2부 아름답게 치열할 것

3부 고요히 바라보는 시간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부터 접근하다 보면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있었구나' 깨닫게 되고,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깊이 있게 알아가게 된다. 그림의 시대적 상황, 화풍, 작가의 삶과 생각, 그리고 작가의 해석과 별개로 내가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림이 전해주는 메세지는 그야말로 풍부한 자원과 같았다.

1부 '외롭지 않은 고독'에서 눈에 띄였던 작가는 에드워드 호퍼였다. 호퍼는 지난 한 세기 동안 현대인의 내면을 가장 예리하게 표현한 화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특히 호퍼는 1920~40년대에 가장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 시기 미국은 유례없는 성장의 명암 속에 아주 화려한 동시에 몹시 불안정한 날들을 지나고 있었다. 1920년대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지만,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인들의 정신 상태는 혼미할 수밖에 없었다고.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 공개된 1942년에는 제2차세계대전과 맞물려 미국본토가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원했던 원치 않았든 호퍼는 기꺼이 당대가 그를 사랑한 방식대로 그 시대의 고독을 상징하는 화가로 남았다. 하지만 호퍼는 과묵한 예술가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1962년 호퍼의 말년에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그의 작품의 분위기를 묻는 질문에 "딱히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는 대도시의 외로움을 그리고 있었을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같은 인터뷰에서 에드워드 호퍼는 "작가가 느낀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소신을 전하며 해석의 전권을 감상자들에 넘겼다고 한다. 에드워드 호퍼는 고독과 외로움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에 표현된 고독은 어쩌면 본인에게는 표현하고 싶은 자유로움이 아니었을까? 저자 역시, "나는 고독에서 쉼을 찾고, 고독과 사투하며 발전하는 사람이기에 호퍼의 그림에서도 나와 비슷한 이들이 보인다"고 한다. 고독은 부정적인 정서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성장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2부 "아름답게 치열할 것"에서는 경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아이아스의 자살]작품에 눈길이 갔다.



고대 그리스 비극 [아이아스]에서, 아이아스의 경쟁은 꼭 비극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아이아스는 그리스 최고 전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패배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무너져 자살을 하고마는 인물로 나오는데, 이는 타인의 평가와 인정만을 중시하고, 노력해온 자기자신을 인정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였을까. 이 책의 저자는 인기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스우파(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인용하며 이기지 못한 경쟁에도 의미가 있고, 도전 자체로 감동을 줄 수 있으며, 승자와 패자 모두가 빛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경쟁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 "고요히 바라보는 시간"에서는 모네의 작품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로 유명한 그의 작품에 담겨진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의 그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1870년 겨울, 모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런던을 향했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런던에서, 모네는 템스강을 따라 걸으며 수면 위로 가득차는 안개를 자주 바라보았다. 빛과 안개가 만나 수시로 변화하는 풍경은 모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인상주의 화풍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6개월 뒤에 전쟁이 끝나고, 그는 파리로 돌아가 작품활동을 하며 인상주의 화풍의 선두에 섰다. 1899년, 거의 30년만에 모네는 성공한 화가가 되어 다시 런던에 돌아갔고, 그의 나이 60세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때 그는 템스강 풍경만 120점 넘게 그렸다고. 그는 곧 다시 떠나야 하는 도시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랜 시간 열중해서 바라보았고, 최선을 다해 표현했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화가가 설레임을 간직한 채 런던에서의 작품생활에서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 마음이 조금 공감이 되었다.




이 밖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멋진 작품들을 감상하며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의 사연과 고민들을 들여다보며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처음에 저자는 그림을 단순히 역사 연구에 필요한 자료로 바라보며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연구하듯 그림을 읽었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였고, 보이는 만큼 그 안에 경험과 사유를 담아 내 것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정말 그런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이 책은 그림을 바라보는 시야를 좀 더 넓어지게 만들어 준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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