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의 초대 - 이름을 불러 삶을 묻는다
김경집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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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쳐가던 명사들에 초대장을 보내어 불러 말을 걸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말이 꽤 많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제법 다양했다.


어떤 것들은 과거부터 만나왔고 어떤 것들은 어느 틈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미처 작별인사를 나누지 못한 채 이미 멀어진 이름들도 있었으며, 

어떤 것은 지금 부지런히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들의 생로병사에 대해서 별 생각도 없이 썼던 이름들이 있었다.

또다른 어떤 것들은 새로 나타난 이름들인데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알았던 것처럼 느낄 만큼 일상에 깊숙하게 들어온 이름들도 있었다.


그 다양함과 변화만큼 내 삶도, 우리의 사회도 그렇게 변해간다.

때론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김경집 <명사의 초대> 10~11p / 교유서가



종이 신문을 읽던 시절 빼먹지 않고 읽던 글이 '만물상', '분수대', '여적' 같은 기자들이 하나의 단어에 얽힌 역사부터 현재의 의미까지 풀이해 들려주는 코너였다. 내게 익숙하든 낯설든 어떤 단어가 가진 사연을 듣다보면 세상이 왠지 더 풍부하게 보였다. 


책 <명사의 초대>는 인문학자 김경집이 '그냥 스쳐가던 명사'에 의미를 부여해 엮은 산문집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 강연을 온 적이 있어 이름은 익숙했는데 정작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없었다. 사진에 드러난 인상만으로 날카롭고 냉철한 느낌의 글을 쓰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세대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잊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농익은 문장에, 그리고 그 속에 가득 베어있는 따뜻함에 놀랐다.


책은 가까운 것(근 近), 내 안에 있는 것(내 內), 먼 것(원 遠)으로 나눠 각각 십여개의 명사들을 소재로 삼는다.


신용카드, USB, 리모콘, 면봉, 립밤, 명함 등 우리 일상에 흔히 쓰는 물건부터, 오르골, 압화, 감나무, 우체통 같이 추억을 소환하는 애틋한 것들까지 역사와 추억을 넘나들며 그 속에 담긴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놀라운 건 어떻게 해서 시트러스 즙을 사용했을까 하는 점이다. 

시트러스 즙에는 다량의 구연산이 함유되어 있는데 피지를 분해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그래서 머리카락과 두피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유지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걸 어찌 알아냈는지 정말 놀랍다."

김경집 <명사의 초대> 샴푸 中 / 교유서가


"귀 간지러울 때 면봉처럼 적소에 딱 필요한 물건의 역할처럼 누군가에게 면봉만큼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듯하다. 면봉같은 사람, 엄마 무릎에 누워 귀를 맡기고 면봉으로 살살 간질이면 스스로 잠들던 어린 시절의 기억만으로도 이미 엄마는 우주였다."

김경집 <명사의 초대> 면봉 中 / 교유서가


어쩌다 인류는 이런 걸 다 만들어 쓰게 되었을까하는 궁금증부터 우리의 고단하고 피폐해지는 삶에 이 물건이 함의하는 것에 대한 저자 나름의 생각까지 읽다보면 아무리 작은 물건일지 언정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특히 '압화'와 '사진'이라는 글이 가장 좋았다. 아마 저자의 글이 잊고 있던 내 마음 속 추억의 서랍을 살포시 열어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이 온갖 기억을 다 소환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을 납작하게 말려 보관하는 '압화'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린 시절 아파트 뒷화단에서 친구들과 쪼그려 앉아 네잎 클로버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키고 토끼풀을 뒤지던 추억이 방울방울 올라왔다. 그때는 특별한 기술 없이 책 사이에 넣어 바짝 말려 보관했다. 지금도 산책길에 예쁘게 낙화한 동백이나 치자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주워와서 방 한켠에 놓아둔다. 금세 바짝 말라버려 쓰레기통으로 직행할때마다 피었을 당시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압화를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후회하기도 한다.


저자는 압화 책갈피를 볼 때마다 가난했지만 소박한 아름다움을 누리고자 했던 어른들의 따듯함이 떠올라 애틋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압화에게 '아낌없이 버리고 숨막히게 눌려도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아름다운 간직하는 것'이라 부르며, '인간의 가치를 위해 싸우다 숨진 모든 것의 삶'을 담담히 기린다.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의 발달로 쓸쓸하게 사라져가는 앨범과 인화 사진들을 추억하는 글이다. 저자는 사진을 쉽게, 얼마든지 찍을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눈과 마음으로 피사체와 대화하는 일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괜찮은 사진 한장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던지, 그리고 인화가 되기 전까지 그 결과물에 대한 기대에 얼마나 설레였던지. 그 애틋한 시간들을 이제는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게 못내 아쉽다. 그래서 아날로그 감성을 자꾸 찾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기다림의 시간이 빚어내는 애틋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을 잊지 못해서.


책 속의 이야기는 저자 개인의 추억담일수도 있지만, 읽는 순간 '내 삶에 작용하여 내 삶과 세상을 이어줄 소중한 것들'이 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좋다. 이런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계속 읽고 싶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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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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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이상주의자의 대명사로 꼽히는 돈키호테

사실은 기사 소설을 읽다 그 세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스스로 기사 캐릭터가 되기로 한 과대망상 환자이지만 21세기에는 그의 무모한 도전과 상상력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어린시절 어린이 문고판으로 접했던 돈키호테는 풍차를 용으로 착각하고 공격하는 시퀀스로 기억된다.

원전이 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두꺼운 책이라는 것, 그리고 10년 뒤에 2권이 출시됐다는 사실도 열린책들의 완역본이 나와서야 알게 됐다. 하지만 뭔가 아는 이야기라 생각해서인지 읽을 기회가 없었다.

다양한 매체에 재현된 돈키호테가 아닌 진짜 돈키호테가 궁금해졌다.


1500년대 후반,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살고 있는 작위가 없는 하급 귀족 이달고인 50대 남자는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기사 소설 읽기로 보내고 있다.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기사 소설을 읽어대던 남자는 스스로 편력기사가 되어 소설 속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스스로에게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고, 자신의 삐적 마른 말에게는 로시난테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다. 그리고 편력기사라면 당연히 한 명쯤 있어야할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이웃마을 농부의 딸 알돈사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가상의 여인으로 만들어 혼자 사랑에 빠진다.


당시 50대는 거의 노인 취급 받던 나이였다는데, 이 나이에도 새로운 꿈을 꾸고, 과감히 모험을 떠난 건 꽤나 멋진 일이지만 그의 모험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다. 기사 작위도 없는 그는 객줏집을 성으로 착각하고 들어가 객줏집 주인에게 기사 서품식을 요청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모욕을 당했다 생각하고 애먼 사람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이웃 농부에게 실려 집으로 돌아온다. 굴욕의 첫 모험을 기억도 못하는지, 그의 절친한 친구인 신부와 이발사가 만악의 근원이라 여기는 기사 소설 화형식을 하는 동안에도 돈키호테는 이웃의 멍청한 농부 산초 판사에게 자신이 성을 얻으면 섬의 영주를 시켜주겠다는 말로 꼬셔 자신의 종자로 삼고, 두 번째 모험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모험 역시 맞고 깨지고 모욕 당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망상의 세계 사는 돈키호테와 달리 실리형 인간인 산초 판사는 그 와중에도 필요한 음식이나 전리품을 챙기고,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몸도 사리고- 결국 돈키호테와 같이 두들겨 맞는 일이 더 많지만-, 돈키호테의 지나친 망상에 브레이크를 걸어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등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다. 가끔 말도 안되게 순진하고 멍청한 산초지만, 어떨때는 빛나는 현실감각을 보여준다.



" '나리' 산초가 대답했다.

'물러나는 것은 달아나는 것이 아니며, 위험이 희망을 앞지를 때 그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분별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요.

지혜로운 자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삼갈 줄 알고, 하루에 모든 것을 모험하지 않습니다요.

저는 촌것에 천한 놈이긴 하지만요, 사람들이 말하는 처신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쇼.

그러니 제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생각을 바꾸지 마시고, 타실 수 있다면, 아니면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로시난테에 오르셔서 저를 따라오세요.

눈치로 보아하니 지금부터는 손보다 발이 더 필요합니다요.'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1> p322/ 열린책들


이 둘이 빚는 티키타카는 전반부의 재미를 담당하는데 고전 소설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는지, 16세기 스페인 아재의 개그 감각이 놀랍다.


소설 <돈키호테> 1권의 이야기는 이들의 우당탕 좌충우돌 모험 외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는 코너 속의 코너 같은 이야기가 넘쳐난다. 목동이 된 미모의 여인 마르셀라를 쫓아 다니다 상사병에 걸려 죽은 양치기의 장례식, 시에라 모레네 산맥에서 만난 카르데니오의 '잘못된 만남' 뺨치는 얽히고 얽힌 사랑 이야기, 전쟁 포로와 무어인 여인이 알제에서 탈출한 기막힌 사연 등이 돈키호테와 주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특히 알제에서 전쟁 포로로 갇혀 있다가 무어인 여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의 사연에서는 20대에 군대로 들어가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했던 세르반테스 본인을 출연시키기도 하며, 이런 이야기를 통해 당시 기사 소설이 표현했던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전투와 일방적이고 미사여구만 늘어놓는 실체없는 사랑이 실제와 얼마나 다른지 꼬집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기존 기사도 문학이 가진 천편일률적인 구성과 개연성 없는 전개, 현실성 없는 캐릭터 등을 풍자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한다. 모든 사법권 밖에 있는 현실 세계와 동 떨어진 편력기사의 면모를 고스란히 재현하는 돈키호테의 뻔뻔함 - 객줏집에서 무전취식을 일삼고, 죄수들을 풀어주며 정의를 실현했다고 착각하는 것도 편력기사의 역할에 심취했기에 가능했다- 을 통해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소설이 허구라도 현실을 모방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짓도 진실로 보이면 보일수록 좋고, 

그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것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일수록 더 즐겁다고 말입니다.

거짓을 이야기할 때라도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져야 하는 법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들고 엄청난 사건들을 평범하게 써야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고, 그래야 독자들이 놀라기도 하고 몰두하며 흥분하거나 즐겨서 감탄과 즐거움을 함께할 수 있게 되지요.

진실성과 자연을 모방하는 일을 기피하는 자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완벽한 작품은 이렇게 진짜같이 쓰고 사물을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을 말입니다."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1> p723 / 열린책들


세르반테스의 소설이 근대 소설의 효시로 불리는 까닭은 영웅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돈키호테 인간형'이라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 아닐까.


<돈키호테> 1권은 신부와 이발사의 작전으로 모험을 억지로 마치게 된 돈키호테가 반죽음의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산초 판사가 편력기사와의 모험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으며 끝이 난다. 


그리고 10년 후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나오는데, 어떤 모험이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기다릴지 이 캐미좋은 두 사람의 시즌2가 너무나 기대가 된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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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권민정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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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그 후, 혁명은 얼마나 세상을 바꿨을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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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황소연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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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의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낭만주의 문학의 정수가 담긴 작품,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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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윅 클럽 여행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허진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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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판 돈키호테라니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고 그의 여행기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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